•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2. 아관파천
  • 3) 친러·친미내각의 성립
  • (1) 러·일의 반응

(1) 러·일의 반응

 아관파천의 성취로 삼국간섭 이래 한반도를 무대로 지속된 러·일의 대립은 일단 러시아의 승리로 귀착되었다. 이후 러시아의 조선지배는 사실상 시간문제나 다름없이 보였다. 그러나 당시의 러시아로서는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완공된 이후라면 몰라도 당장에 조선을 병합한다거나 보호국화 하자는 입장이 아니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이미 영국이 간파하고 있었듯이 러시아는 조선의 병합에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 대한 제3국 즉 일본의 독점적 영향의 배제에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가 과거 영국의 巨文島占領事件(1885∼1887)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이미 확인된 바였고,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착공 이후는 더욱 그러하였다.

 사토우(Ernest Mason Satow) 주일 영국공사가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 일본외상 및 이준용과 나눈 대화에서도 그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이준용이 아관파천으로 인해 러시아가 조선을 병탄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면서 영국의 지원 가능성을 묻자, 사토우는 “조선 병탄은 1886년 영국함대의 거문도 철수 당시의 조건, 즉 조선의 영토보전과 상반되는 것으로 러시아의 목적은 조선의 독립 파괴가 아니라 일본의 독점적 영향력 배제에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하였다.

 아울러 사토우는 “러시아가 조선을 병합할 의도가 없는 것으로 무츠는 파악하고 있다. 러시아는 조선인같이 다루기 어려운 인종을 지배하지 않고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즉 영국은 아관파천으로 “조선이 러시아에 대항하려는 어떤 강국의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희망이 성취된 이상, 러시아는 조선에서 특수 권익을 확보하여 영국과 일본의 반발을 사기보다는 일본과의 관계 조정을 우선시 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0134)George Alexander Lensen, Korea and Manchuria between Russia and Japan 1895∼1904:the Observations of Sir Ernest Satow(Tallahassee, Florida:the Diplomatic Press, 1966), p.62.

 아관파천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과 향후의 조선에 대한 방침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러시아는 아관파천에 대해 결코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공식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를 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아관파천의 현상을 유지하자는 것이 희망 사항이었다. 이후 러시아 당국의 대조선 방침의 맥락은 ①일본의 독점적인 조선지배를 저지하여 조선을 일본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②적어도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완성까지는 명목상이나마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게 하여 타국이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선에서 유지되어 갔다. 이 점은 상황이 불리해진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배경하에 러·일은 조선문제에 관하여 종래와 같은 ‘실력행사’, 예컨대 왕비시해와 아관파천과 같은 무력을 앞세운 대응을 보류하고 외교적 타협을 모색하였다. 러시아 당국이 이렇게 조선문제를 놓고 일본과 타협하자는 방침을 굳히는 과정에서 조선과 일본주재 러시아 외교관 및 군사전문가들의 견해가 반드시 일치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앞서부터 이들은 조선문제의 처리를 놓고 각기 본국 정부에 상이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다. 첫째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조선을 보호국화 하는 것, 둘째 조선을 아예 병합하는 것, 셋째 일본과 타협하여 일정한 이권을 허용하는 대신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주도적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조선의 현상을 유지시키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서울의 스페이에르와 베베르는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로 인해 야기될지 모르는 조선 내외의 비판적 여론을 우려하여 표면적으로는 조선 내각의 구성에도 관여하기를 꺼렸다. 당시 각국은 러시아가 조선 내정에 개입하는가에 대해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3월초에 이르기까지 단발을 강제하지 않겠다는 조치 외에는 종래 일본에 의한 개혁 중 취소된 것이 없었고, 러시아공사도 내정 개입을 피하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공사는 왕비시해사건의 수사에 미국인 고문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 具禮)를 참여시키고, 영국인 재정고문 브라운(John McLeavy Brown, 柏卓安)에게 조선의 재정 운영에 관한 폭넓은 권한을 부여하는 등, 영·미 모두를 만족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0135)Hillier to Beauclerk, Inclosure 1 in No. 19, Seoul, Mar. 2, 1896, F. O. 405-Ⅸ;Sill to the Secretary of State, No. 226, Seoul, July 17, 1896, DUSMK 등을 참조.

 그들은 그러나 이 같은 표면적 행동과 달리 아관파천의 호기를 적극 이용하자는 입장이었다. 일례로 아관파천 직후 스페이에르는 러시아의 지원을 갈망하는 고종의 요청을 내세워 본국 정부의 신속한 조치를 거듭 촉구하고 있었다. 즉 조선 내각에 배치할 러시아 고문의 파견과 재정의 원조, 조선군의 조직을 위한 지원 요청 등이 그것이다. 물론 러시아의 재정고문 파견 및 재정 지원, 조선군 조직 등에 관해 고종의 요청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고종은 일본에 대한 극도의 공포로 인해 러시아의 의도에 대해서는 미처 경각심을 갖지 못하였고,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다.0136)Allen to the Secretary of State, No. 10, Oct. 2, 1897, DUSMK;Lensen, op.cit., pp.592∼593. 스페이에르나 베베르의 이러한 구상은 이노우에가 서울에 부임한(1894년 10월 27일) 이래 취했던 방식, 요컨대 조선정부내 일본인 고문관 배치와 차관의 투여, 조선군의 일본군 예속화 등을 통해 조선 내정을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속박해 가던 방식을 연상시킨다.

 한걸음 나아가 스페이에르는 조선의 보호국화까지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동아에서의 분규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가 조선의 보호자 역할을 회피한다면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만일 방관하고 있다가 어쩔 수 없는 사태가 조선에서 야기된다면, 그때 가서 개입해 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따라서 조선이 이렇게 러시아에 달려오는 이상, 이 기회를 이용하면 러시아가 태평양연안에서 강력한 입지를 확보할 것이다. 대신 일본에게 조선의 무역 이익과 재정 분야의 주도권을 허용한다면 양국이 합의에 도달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는 의견이었다.0137)Lensen, op.cit., pp.592∼593.

 그 외에 일부 군부의 인물들도 아관파천의 호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자는 입장이었다. 참모장 알프탄(Al'ftan)이나 아무르관구 사령관 그로데고프(N. I. Grodegov) 등의 주장이 그것이다. 전자는 부동항을 구하기에는 만주보다 한반도가 적합하므로 조선을 보호국화하자는 것이었고, 후자는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여 동해를 內海로 삼아 그 입구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조선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0138)Ibid., pp.592∼593. 이들은 군사전문가답게 주로 부동항 확보의 문제와 군사전략상의 관점에서 그러한 주장을 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주재 러시아공사 히트로보와 보각(Colonel Vogack)대령은 일본과 타협을 주장하는 쪽이었다. 이들은 일본이 러시아와 타협을 원하고 있고, 조선도 현재로서는 러시아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견해였다. 즉 일본의 적의를 불러일으키지 않고도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마당에 구태여 일본을 자극하거나 도발적 행동을 유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0139)이때 러시아는 조선에 3,000정의 총을 선물하였고, 로바노프는 이것으로 인해 일본과의 화의적 협의가 방해받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지시를 베베르에게 내리고 있었다(Ibid., pp.591∼596).

 여기서 본국의 로바노프(A. B. Lobanov-Rostorskii) 외무대신은 “조선 국왕에게 조언을 해 줄 의향은 있지만, 복잡한 조선 내외의 정세에 비추어 조선정부의 고문이나 군사교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시기상조”라 하여 앞서 있은 스페이에르의 제안을 기각하였다.0140)Ibid., p.595. 이어 스페이에르공사는 휴가를 받아 귀국하는 히트로보를 대신하여 일본공사로 발령을 받았고, 다음날 그는 서울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이미 멕시코주재 공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본국의 훈령에 따라 서울에 대기하고 있던 베베르는 다시 조선주재 공사로 유임됨과 동시에 특명 전권공사로 승임되었다.0141)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編,≪舊韓國外交文書≫(高麗大 出版部, 1969),≪俄案≫1, 문서번호 737, 1896년 2월 28일, 士貝耶公使의 駐日本公使署理 및 韋貝公使의 接任事.

 한편 아관파천으로 인해 조선에서 입지가 강화된 러시아와 달리 일본은 “천자를 빼앗겨 이제 만사가 끝장났다”고 할 정도로 입지가 실추되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러시아의 의도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사토우는 일본정부는 아관파천에 관한 러시아의 희망과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일본정부가 알고 있는 것은 “아관파천이 러시아정부의 사전인지 없이 모의되었지만, 러시아정부는 이미 이뤄진 일을 승인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하고 있다.0142)Satow to Salisbury, No. 23, Tokio, Mar. 12, 1896, F. O. 405∼Ⅷ.

 설상가상으로 왕비시해와 단발령으로 조선의 상하 인심이 일본으로부터 철저히 이반되어 있어 일본은 조선에서 최악의 국면에 처한 형세였다. 이에 일본은 궁궐을 버리고 달아난 국왕의 폐위 운운하면서 환궁을 촉구하는 한편, 러시아와의 일전에 대비한 군비강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조선문제를 놓고 러시아와 타협을 모색하여 갔다.0143)위와 같음.

 먼저 일본은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완성 이전에 러일전쟁을 치르고자 하였고, 그에 대비하여 10개년 계획의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상비군 15만 명과 전시병력 60만 명, 22만 톤의 해군력 달성 목표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드는 비용을 일본은 청국에서 약취한 2억 냥의 배상금과 정부예산의 40% 이상을 매년 투입함으로써 충당하였다. 일본이 청일전쟁 기간 중(1894∼95) 투자한 군비에 비해 1896∼97년간의 투자예산은 거의 3∼5배에 달하였다.0144)信夫淸三郞·中山治一 編,≪日露戰爭史の硏究≫(東京:河出書房新社, 1959), pp.68∼72쪽.

 다음으로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협상의 추진은 이 시기에 와서야 시도된 것만은 물론 아니었다. 이미 1895년 12월과 1896년 1월 및 2월초의 아관파천 직전까지도 이토총리나 사이온지외상 등이 꾸준히 러시아에 협상을 제의한 바 있었다.0145)Lensen, op.cit., pp.602∼603. 이것은 일본의 압제하에 형성된 국왕과 조선정부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인정하자는 것으로서 일본의 ‘사기적’ 성격이 농후한 것이었다. 조선 내각에서는 일본인 고문관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고종과 대신들은 일본공사의 꼭두각시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의 현상을 인정하고 자립하게 하자는 것은 ‘조선보호국화’ 작업을 지속하겠다는 의미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정부가 스페이에르를 파견하여 아관파천을 성취시킴에 따라 이제는 조선의 보호국화 기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국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아가 더 이상 조선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대러협상을 적극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일본은 우선 아관파천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사전인지 여부와 의도의 파악에 주력함과 동시에 협상을 모색하였다. 곧 이어 니시 주러 일본공사와 히트로보 등이 각기 러시아정부의 “사전인지가 없었다”고 알려오자, 일본정부는 일단 러시아의 의도가 조선보호국화에 있지 않다고 판단하였다.0146)Satow to Salisbury, No. 23, Tokio, Mar. 12, 1896, F. O. 405-Ⅷ.

 바로 이상과 같은 배경하에 양국간에 교섭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가 1896년 4월 15일 서울에서 체결된 베베르-고무라(Waeber-小村 Memorandum) 覺書였고, 같은 해 6월 9일 모스코바에서 체결된 로바노프-야마가타(Lobanov-山縣 Protocol) 議定書였다. 이들 협약의 내용은 대체로 아관파천의 현상을 인정한 가운데 양국간에 조선 군주의 신변문제와 군사·재정 등에 관해 일정한 한계를 지은 것으로서 그 문맥상 사기성이 그대로 노출되어 보이는 일시적이고도 잠정적인 타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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