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Ⅰ. 러·일간의 각축
  • 2. 아관파천
  • 4) 고종의 환궁
  • (1) 러시아 군사교관의 초빙

(1) 러시아 군사교관의 초빙

 아관파천 이후 조선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당면문제의 하나는 고종의 환궁이었다. 비록 만부득이한 사정에 의해 빚어진 것이기는 하더라도, 일국의 군주가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해 간 것은 결코 정상적이며 온당한 일이라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아관파천 직후로부터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상소도 상하로부터 쇄도하고 있었다. 이들이 당시에 느꼈던 심정은 前主事 尹孝定 등의 다음과 같은 상소에 잘 드러난다.

아아! 지난 8월 20일의 일을 어찌 차마 말로 다할 수 있겠읍니까. 안으로의 화란과 외부의 기세가 서로 뒤얽혀 만고에 없었던 큰 변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온 나라의 하늘에 머리를 두고 땅을 밟고 사는 사람이라면 뉘라서 피눈물을 뿌리고 울음을 삼키며 우리 國母의 원수를 갚고 싶지 않겠습니까?…그러나 그날 폐하께서 外館으로 나가신 것은 한때의 임기응변이며 만부득이한 지경으로 빚어진 것이었으나, 절대로 정상적이며 온당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로써 民情이 황망하고 國體가 위태롭게 된 것을 어찌 한두 마디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현재의 安危의 대관건은 폐하께서 돌아오시는 날짜의 지속에 달렸습니다.…삼가 폐하에게 바라노니 안으로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동요를 깊이 걱정하시지 말고 밖으로는 틈을 엿보는 강대국을 너무 염려하지 말아서, 여론을 살피시고 곧장 환어하시어 종사를 편안케 하고 민심을 안정시키소서(≪駐韓日本公使館記錄≫9, 162∼163쪽).

 그러나 고종이 환궁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주장과 어느 시기에 어떻게 환궁을 할 수 있느냐 하는 현실적 여건 사이에는 괴리가 컸다. 바로 2년전의 청일전쟁 당시 그리고 얼마전 을미사변 당시의 처참했던 조선 조정의 경험은 고종이 환궁하지 못하는 이유를 구구히 나열할 필요조차 없게 한다. 아무런 군사적 대비책도 없이 고종에게 환궁을 하라는 것은 조선에서 날뛰는 일본인패들에게 최후의 날을 맞아 왕비의 전철을 밟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고종은 가까운 시일내에 환궁하겠다는 형식으로 비답을 내리고는 있었지만, 정부 당로자들의 입장에서는 환궁 이후 국왕의 안전을 책임질 현실적 대책의 수립이 무엇보다 시급한 사안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고종의 환궁 이전에 조선정부로서 구비해야 할 일이란 분명하였다. 아관파천에 의해 조선이 가까스로 일본에 의한 보호국화의 위기를 모면했다고는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무엇보다 군사·재정문제의 대책이 시급하였다.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습격과 1895년 재차의 경복궁 습격 및 왕비시해 당시의 상황을 통해 드러나듯 조선군의 전투력은 서울 주둔의 일본군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했던 당시 조선군의 숫자는 서류상 약 7,500명, 실제로는 약 4,000명 정도의 병력 중 일부가 서울의 치안과 궁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정도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무기까지 보잘 것이 없었으니 당시 조선의 군대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0157)Captain Mercer, R. M. L. I., to Jordan, Inclosure 2 in No. 97 Seoul, June 11, 1897, F. O. 405-Ⅹ.
러시아大藏省 編, 崔 璇·金炳璘 譯,≪韓國誌-本文篇≫(韓國精神文化硏究院 資料調査室, 1984), 678∼681쪽 및 707쪽.

 아울러 1895년 소위 내정개혁의 명분하에 일본이 제공한 차관 300만 엔 의 이자·상환·담보 등의 가혹한 조건은 가뜩이나 재정난에 처한 조선정부의 심장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아관파천 직후 고종의 내밀한 명을 받은 브라운이 정부 재정을 조사한 결과 파산직전이었다고 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영국공사도 지적했듯이 이노우에가 조선에 들여놓았던 대일차관 300만 엔은 1년도 채 안되어 정부 재정의 악화와 파탄을 초래한 주요인의 하나였다. 이처럼 고종의 환궁과 재정·군사의 문제는 아관파천 직후의 상황에서 보다 근본적이고도 시급히 해결을 요하는 조선의 과제였다.

 다시 말해 이미 각계 인사들의 상소에서 드러나듯 아관파천은 국가의 위신에 관련된 것이었고, 현실적으로는 러시아의 내정간섭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배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이 환궁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궁궐을 경비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할 만한 병력이 필요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재정도 필요하였다. 과거에 훈련대 소속 조선군이 일본교관에 의해 훈련받아 민비시해사건에 어떻게든 이용되었던 사실은 신뢰할 만한 병력의 구비를 절실히 요하였다. 그 밖에도 자국 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 등을 구실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약 500명의 일본군 병력은 현실적으로 상존하는 위협이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적절한 기회가 조선에 주어졌다. 러시아에서는 1896년 5월 26일에 거행되는 니콜라이 2세(Nikolai Ⅱ)의 대관식에 세계 20여 개 국의 사절을 초청하였다. 이때 청국에서는 李鴻章을, 일본에서는 쵸슈(長州) 출신의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를 특사로 파견하였다. 전자는 러시아가 동청철도의 부설권 획득을 위해 비밀 교섭의 상대자로 내정한 자였고, 후자는 조선문제에 관한 일본과의 회담 상대자였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조선의 사절 파견도 요청했던 바 조선에서도 閔泳煥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이후 조선과 청국, 일본은 각기 비밀리에 러시아와 교섭을 진행하였다. 이때 민영환은 다음과 같은 5개항을 러시아에 요청하였다.0158)Lensen, op.cit., pp.649∼650.

1. 만족할 만한 수준의 조선 군대가 창설될 때까지 국왕의 호위를 러시아 군대가 맡아줄 것.

2. 군사와 경찰의 훈련을 위해 다수의 교관을 파견해 줄 것.

3. 내각과 산업 및 철도 분야를 지도할 고문을 보내줄 것.

4. 3백만 엔의 차관을 허용해 줄 것.

5. 조선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전신선 설치에 동의해 줄 것.

 (≪尹致昊日記≫4, 1896년 6월 6일).

 이상에서 보듯이 민영환특사의 요청에는 고종의 신변보호, 친위대 양성문제, 군사교관 및 재정고문 파견, 차관제공, 전신선 가설건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도 민영환특사가 가장 집요하게 추구했던 것은 군사교관과 차관의 제공문제였다. 전자는 환궁에 대비하여 고종의 신변보호를 위한 친위대의 양성과 연관된 것이었고, 후자는 대일차관의 상환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민영환의 요청에 대해 이를 수용하기를 꺼렸다. 이미 러·일간에는 조선의 군사와 재정 등에 관해 상호 견제하는 내용을 골자로 비밀협정을 체결한 상태였다. 따라서 러시아로서는 구태여 이를 위배하면서까지 조선에서 독점적 지배를 기도할 처지도 아니었고, 그러한 의향도 당시로서는 없었다. 조선에 대해 적극적 지원을 해준다는 것은 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요컨대 조선의 다급한 입장과는 달리 러시아는 이 문제를 영국·청국·일본 등과의 관계를 우선한 동아시아정책의 차원에서 고려하였고, 조선과의 관계는 그 다음 차원에서 고려하였다. 자연히 러시아의 태도는 소극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차관제공에 대해서는 가장 소극적이었고, 일부나마 실효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군사교관의 파견문제였다. 당초 민영환은 200명의 군사교관의 제공을 희망하였지만, 영국·일본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러시아의 난색으로 그 수는 대폭 삭감되었다. 러시아로서는 영국·일본의 의혹을 피하면서 장래의 사태 변화에도 대비할 수 있는 가장 무리가 없는 방안으로서 택한 조치였다.

 이후 전과정은 대체로 고종의 환궁을 위한 작업으로 점철되어 갔다. 최초의 군사교관 파견에 관한 니콜라이 2세의 재가가 내려진 것은 1896년 8월초 였다. 그러나 군사교관을 파견하기 이전에 러시아는 조선의 군사·재정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위의 군사전문가로서 스트렐비츠키(Strelbitzky)대령을, 재정전문가로서는 전 북경공사관의 통역이자 상해의 露淸銀行長인 포코틸로프(Pokotilov)를 파견하였다.0159)Romanov, B. A. Russiya y Manchzhurii 1892∼1906(Leningrad:Enukidge Oriental Institute, 1928);Susan Wilvour Jones tr., Russia in Manchuria 1892∼1906(Ann Arbor, Michigan:J. W. Edwards, 1952), p.109. 앞서 러시아 외부대신 로바노프가 탁지부대신 위테(S. Iu. Witte)에게 탁지부관리를 조선에 파견하여 차관문제를 조사할 것을 의뢰한 바 있고, 군부대신 반노프스키(P. S. Vannovskii)에게는 궁궐 수비대의 조직과 군사고문 등에 관한 문제를 다룰 인물의 파견을 요청한 바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그의 귀결이었다.0160)Lensen, op.cit., p.652.

 이후 군사교관단의 파견 임무를 부여받은 군사전문가는 뿌챠타(Putiata)대령이었다. 그는 북경주재 러시아공사관의 무관을 지냈고 야마가타의 모스코바 방문시 러시아의 수행참모역을 한 바 있다. 뿌챠타는 현지에서 러시아 군사교관에 의한 조선군의 훈련과 조직 등에 관하여 형식상으로는 전권을 위임받은 셈이었다. 이들 교관단의 장교·하사관 모두가 조선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고용되었지만, 뿌챠타만은 조선정부에 고용된 것이 아니었다. 0161)Jordan to MacDoNald, No. 25, Seoul, March 10, 1897, F. O. 405-Ⅹ;그의 부임에 필요한 경비는 민영환이 지불했다(≪尹致昊日記≫4, 1896년 8월 4일∼7일).

 뿌챠타는 출발전 고종의 신변경비와 조선군의 훈련을 위해 필요한 러시아군의 파견을 정부에 요청하였다. 그가 파견을 요청한 군사의 수는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에서 규정하고 있던 조선내 주둔 일본군과 같은 수인 800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요청은 로바노프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보류되고 있었다. 로바노프는 군부대신 반노프스키나 뿌챠탸의 거듭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상황이 좀더 명료해진 뒤에야 군사교관의 파견이 가능하다는 입장하에 이를 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의 주장을 견제하던 로바노프가 갑자기 사망하자 군부의 입김이 작용할 여지가 확대되었다.

 로바노프가 사망한 것은 민영환특사가 귀환중이던 8월 31일, 사행이 로바노프를 작별한지 약 2주만이었다. 민영환과 동행했던 뿌챠타는 하바로프스크에 이르러 급한 일로 뒤에 남았다가, 뒤에 블라디보스톡에서 민영환 일행과 다시 합류하였다. 러시아가 13명의 군사교관을 출발시키기로 한 것은 민영환특사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바로 그 직후였다. 즉 민영환과 합류한 뿌챠타는 거기서 러시아 당국에 군사교관을 출발시킬 것을 요청하였고, 이후 그들은 군사교관들과 동행하게 되었던 것이다.0162)≪尹致昊日記≫4, 1896년 9월 4일.
Lensen, op.cit., p.652.
閔泳煥,<海天秋帆>(國史編纂委員會 編,≪閔忠正公遺稿≫, 探求堂, 1958), 121·129·132쪽.

 한편 군사교관의 출발에 앞서 러시아 외무차관 람스도르프(V. N. Lamsdorf)는 주일공사 스페이에르에게 러시아의 이러한 결정에 관해 일본외상에게 통보하도록 지시하였다.0163)Lensen, op.cit., p.652. 그러니까 로바노프가 사망한지 5일 뒤로서 러시아 군사교관의 파견에 관한 일종의 통보였다. 그 내용은 교관단의 역할이 환궁 이후 궁궐을 경비할 군사의 양성에 국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상을 놓고 볼 때 열국의 의혹을 우려한 러시아는 조선의 거듭된 요청 및 러시아 군부의 주장, 그리고 일본과의 베베르-고무라 각서,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의 내용을 세심하게 고려한 뒤 공식적으로 교관단을 파견한 셈이었다.

 결국 민영환특사가 러시아로부터 확보한 가시적 결과란 이처럼 뿌챠타 일행 13명의 군사교관 초빙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러시아·일본·영국 모두에게 중대한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조선군 훈련은 고종의 신변 보호와 직결됨은 물론 조선군의 조직문제와도 연결될 가능성이 농후하였기 때문이다. 고종의 신변 보호라면, 곧 군주의 신변 장악을 통해 조선의 정치력을 장악하는 것이고, 조선군의 조직이라면 그것은 장래 조선 전지역의 러시아 요새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수나마 군사교관의 파견은 조선의 정치·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할 손쉽고도 유용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자연히 이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일본이다. 뿌챠타 일행의 파견이 앞서 체결된 러·일간의 협정(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과 모순되는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충분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상기 의정서의 제2조, 즉 “일본·러시아 양국 정부는 조선의 재정 및 경제 상황이 허용하는 한 외원에 의하지 않고 내국의 질서를 유지하기에 족할 정도로 내국인으로 조직되는 군대 및 경찰을 창설하고 이를 유지하는 일을 조선에 일임하는 것으로 함”을 말한다.0164)外務省外交史料館 編,≪日本外交史辭典≫(大藏省印刷局, 1979)의<附錄>, 24쪽;≪日本外交文書≫29, 문서번호 478 山縣大使露國トノ議定書成立シタル旨報告ノ件, 817∼818쪽을 참조.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日·英·佛·露·韓文 모두 약간씩 다르다. 日本의 자료 공개과정에서 약간씩 달라진 흔적이 분명히 감지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李玟源, 앞의 책, 78∼87쪽을 참조. 그러나 앞서 람스도르프에 의한 러시아의 공식적 통보와 일본의 소극적인 반응을 놓고 볼 때, 뿌챠타 일행의 파견에 대해 일본이 별달리 쟁점화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고종의 환궁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는 러시아의 해명과 일본 역시 환궁에 필요한 궁궐 경비병의 양성이라면 문제삼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인 데서 잘 드러난다.0165)Jordan to MacDonald, No. 87, Seoul, Oct. 27, 1896, Inclosure in No. 71, Seoul, Mar. 19, 1897, F. O. 405-Ⅹ 등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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