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1. 열강의 이권쟁탈상
  • 3) 독일·영국의 이권쟁탈상
  • (1) 광산이권

(1) 광산이권

 한국이 독일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것은 1883년 11월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한국 광산에 대한 관심은 이미 한국이 개항하기 훨씬 전부터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Ernst Oppert)는 忠淸道 德山에서 대원군의 묘지를 파헤치고 금을 캐려다 발각된 일이 있었는데 그는 한국의 광물은 아시아 가운데 제1위라고 평가하였다. 오페르트는 유태계의 독일인으로서 일찍이 한국 연해에도 세 차례 探航을 거듭하여 한국의 지리 사정을 대강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0345)러시아大藏省 編, 日本農商務省 譯,≪韓國誌≫(1904), 45∼46쪽.
Ernst Oppert, 韓㳓劤 譯,≪韓國紀行≫(一潮閣, 1981), 122∼123쪽.
물론 그 사건이 독일정부와는 무관하게 개인적인 동기로 일어난 것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독일이 한국 광산에 관심을 갖게 된 시초가 아닌가 한다.

 그 후 1880년대 뮐렌도르프(Paul Georg von Mollendorff, 穆麟德)가 한국의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協辦으로 임명되면서 한국의 광산이권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 때에 독일인 지질학자 곳체(Carl Christian Gottsche, 居最)가 광산기술자를 대동하고 내한하여 한국 전역을 답사하고 광산의 매장량 상태를 조사하였다.0346)C. Gottsche, “Uber den Mineralreichtum von Korea”, Mitteilungen Geographische Gesellschaft, 1890, 1∼20쪽. 또한 독일 영사관에서는 독일인 광산기술자의 초빙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 후 1895년에 이르러 미국이 평안북도 운산금광 이권을 획득하게 되자 독일도 독자적인 이권 평등을 내세워 世昌洋行을 통해서 이권 교섭을 추진하였다.

 세창양행은 뮐렌도르프의 권유와 본사 함부르크로부터의 지원에 의해 1884년 한국 제물포에 창설된 무역상회였다. 특히 뮐렌도르프와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국에서 성장을 하고 있었는데, 1886년 1월 한국에 대해 차관제공을 하고 그 반대급부로서 세미운송권을 얻는 과정에서 급격히 사세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한국정부에 의한 최초의 세미운송윤선 정책이었으며 외국에게 처음으로 세미운송권을 양여했던 것이다. 이후 독일 希化船을 통한 세곡 운송은 한국 해운업계에 타격을 주었으며 이는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구호에도 일부 반영되고 있었다. 세창양행은 생산공장을 겸비한 주식회사가 아니라 일종의 무역대행업체로서 1880년대에는 화폐기기·인쇄기기를 수입하였고, 1890년대에는 무기류를, 그리고 1900년대에는 우피와 홍삼을 대량으로 수출하였다.0347)≪皇城新聞≫, 1900년 4월 3일자 雜報에 보면 官蔘(原尾蔘幷) 28,000여 근을 李容翊이 세창양행에게 103,000원에 매도하였다는 기사가 실리고 있다.
≪皇城新聞≫, 1900년 11월 19일자 雜報에 의하면 生牛 200頭를 세창양행이 太沽로 운송한다는 기사가 실리고 있다.
또한 미국 보든(Borden)社의 우유제품의 판매도 대리하였다.0348)≪大韓每日申報≫, 1904년 8월 1일, 광고 外.
李培鎔,<開港以後獨逸의 資本浸透와 世昌洋行>(≪梨花100주년기념논총≫, 이화여대, 1986).
특히 경제적 기능을 원활히 하기 위해 문화적 사업에도 관심을 지녔고 차관을 제공하면서 비싼 이식을 부과시켜 고리대 같은 성격으로 미숙한 한국 경제를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러한 세창양행을 앞세운 독일은 1897년 3월 鑛地를 정하기도 전에 한국정부와 광산 특허계약을 체결하였다. 독일은 처음에 평안도 殷山金鑛의 채굴권을 요청하였으나 한국정부에서는 당시 은산금광이 궁내부 소속 금광으로 이미 한국인에 의해 採金되고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한편 당시 한국의 국내 정세는 국왕의 아관파천으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이후에도 세창양행은 여러 차례에 걸쳐 평안도내에서의 채광을 금지하는 한국정부에 대해 항의하였다. 즉 미국에게만 평안도 운산금광 채굴권을 허여한 처사는 균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결국 독일은 은산금광을 포기하고 대신 강원도 금성의 堂峴金鑛 채굴권을 요구하였는데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당현 역시 궁내부 소속이니 다른 곳을 택할 것을 요구하자 주한 독일영사 클리인(F. Krien, 口麟)이 우리 외부대신서리 兪箕煥의 가슴을 밀치고 서류를 집어던지는 등 만행을 저질러 독립협회와 언론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0349)≪독립신문≫1898년 7월 2·4·5일. 한국내의 여론이 악화되자 클리인이 무례행위에 대한 사과문을 유기환에게 보냄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고 이와 동시에 강원도 금성군 당현금광 채굴권을 1898년 7월 18일 독일의 세창양행에게 정식으로 허여하였다.

 당현금광의 채굴은 함브르크에 있는 메이어(E. Meyer & Co.)商社의 제물포 지점인 세창양행에서 대행하였는데, 채굴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현지민과 기존 광업권 처리문제, 토지 배상문제, 고용 임금문제 등으로 마찰을 겪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독일측의 태도는 항상 한국에 대한 주권 침해로 귀결되었다.

 독일은 당현금광에 대해 지대한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그 한 예로 1899년 하인리히(Heinrich)황태자가 내한하여 교통편도 좋지 않은 산간 벽촌인 당현금광을 방문하였으며, 그 때 서울에서 당현까지 전화선이 가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는 독일인 公使, 중국 상해의 총영사, 독일인 간호장교, 신문기자 등 한국을 방문한 독일인은 거의 당현금광을 거쳐갔다.0350)≪德案≫2, 문서번호 2068 獨親王 하인릿히公 來韓日程 및 迎接儀禮 條項.
≪독립신문≫, 1899년 6월 9일.
≪皇城新聞≫, 1899년 6월 9·15일.
그러나 독일이 기대하였던 것만큼 당현금광은 성적이 좋지 않아 채굴에 착수한 지 7년만인 1905년 폐광하고 다른 광산을 대신 요구하여 평안도 宣川鑛山이 다시 독일에게 넘어갔다.

 한편 영국의 이권에 대한 관심은 1883년 11월 26일 조영조약을 체결한 뒤부터 본격화되었고, 특히 한국 광산에 대한 진출은 상해에 주재하고 있었던 영국인 商社 怡和洋行(Jardin Matheson & Co.)을 통해서 시작되었다.0351)조기준,<開港後의 國內經濟>(≪한국사≫16, 국사편찬위원회, 1973), 687∼688쪽. 당시 한국에 진출한 영국계 상업회사에는 怡和洋行 이외에 廣昌洋行(Bennet & Co.), 咸陵加洋行(Homle Ringer & Co.) 등이 있었다. 특히 이화양행의 上海 대리인 거빈스(J. H. Gubins, 高斌士)는 뮐렌도르프와 친분이 두터워 뮐렌도르프가 내한하기 이전부터 鑛務에 관한 교섭을 추진한 바가 있었다. 1882년말 중국 海關에 관계하던 뮐렌도르프가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協辦으로 부임할 때, 이화양행 소속의 영국인 광산기술자 버틀러(Buttler, 巴爾)가 동행하였다.0352)金允植,≪陰晴史≫, 고종 19년 10월 28일.
“(上略) 唐景星, 陳茂南, 王柏恭, 穆麟德, 巴爾, 同上船, (中略) 巴爾, 英國人, 管中國開平鑛務之人, 卽鑛師, 與唐觀察, 爲看鑛苗而求者也”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 영국인 버틀러도 唐景星과 함께 開平鑛務에 종사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마침 1883년 1월 뮐렌도르프가 광산개발 및 철도를 담보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왕의 전권대사로 상해에 파견되었을 때 이화양행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뮐렌도르프와 교섭하여 상해·제물포간의 정기항로 개척권 및 광권 이양을 타결시킬 수 있었다.0353)P. Mollendorff, 고병익 역,<穆麟德手記>(≪진단학보≫24, 1963), 160∼161쪽. 그리하여 이화양행이 인천에 출장소를 개설하면서 본격적인 광무작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1883년 7월 18일 영국의 이화양행은 뮐렌도르프와 계약을 맺어 이익의 10분의 3을 과세한다는 조건으로, 열강 중에서 최초로 한국에 근대식 채굴기계와 광산기술자를 파견하여 경기도 永平 萬世橋 砂金場에서의 채굴을 시도하였다.0354)≪英案≫1, 문서번호 111 萬世橋金鑛의 採掘不准에 對한 異議 및 代鑛准許要請.
≪統記≫, 고종 20년 10월 15·17·21일.
그리고 강원도 金化, 金城지역에까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884년 12월 이화양행이 제물포에서 철수하고 거문도 점거사건으로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였으나, 이화양행 관계자만이 아니라 주한 영국외교관들도 역시 광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1895년 7월 매장량이 풍부하기로 소문난 운산금광 채굴권이 미국으로 넘어가자 이에 자극받은 영국도 이권의 평등을 내세워 채굴권의 허여를 요구하였고 시기를 보아 독일의 세창양행이 1898년 4월 당현금광 채굴권을 획득하자 독일과 같은 경로를 밟아 광지를 정하지 않고 먼저 계약을 맺는 방법으로 계약을 체결하였다.0355)≪英案≫1, 문서번호 1391 英商採掘要請의 美人例均霑 및 平安道內 各鑛의 開採不准理由·문서번호 1394 英商의 世昌洋行例에 따른 採鑛合同의 呈覽 및 會訂要請事·문서번호 1399 英商 採鑛合同의 會商日時通告 및 世昌合同依據 不能言明事·문서번호 1400 同上件 合同의 世昌例期必依據 主張. 그리고 나서 독일이 한국정부의 허락을 받지 못해 포기했던 殷山金鑛에 주목하고 募軍商會(Morgan Company)라는 브리티쉬 신디케이트(British Syndicate)를 조직하고0356)≪英案≫2, 문서번호 1681 英公使와 同國會議員 摩賡 및 礦師 海意 等의 陛見要請事.
≪皇城新聞≫, 1899년 12월 6·8·19일.
≪平安南道來去案≫(奎 17988-3), 1899년 12월 15일 및 (奎 17988-4), 1900년 2월 26일의 殷山郡守 報告謄書.
한국정부에 집요하게 광산 채굴권 허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은산은 외국인에게 특허할 수 없는 광산임을 통고하였고, 이에 영국은 무단으로 채굴을 강행하였다.0357)≪英案≫2, 문서번호 1713 殷山礦採掘 强行示唆·문서번호 1717 殷山礦開採 强行日時의 豫告事.
≪皇城新聞≫, 1900년 1월 6일.
그리하여 채굴하고 있던 기존의 한국인 광부들과 무력 충돌을 야기시켰는데, 영국인들은 주로 일본인 광부들을 고용하여 저항하는 한국인 광부들에게 무자비하게 발포하였을 뿐 아니라 일방적으로 영국기를 걸고 방문을 내붙여 그들의 불법 침탈을 가중시켜 나아갔다.0358)≪平安南北道來去案≫(奎 17988-4), 1900년 2월 19일, 보고서 제1호. 무단 강점과 외교적인 공세를 통해 1900년 3월 영국은 은산금광 특허권을 윤허받고 있는데0359)≪英案≫2, 문서번호 1779 殷礦問題의 妥協案 同意事·문서번호 1780 殷磺開採允許事.
≪皇城新聞≫, 1900년 3월 19일.
≪宮內府案≫(奎 17801-7), 1900년 3월 19일, 照會 참조.
이 과정에서 활약이 컸던 모르간(Pritish Morgan, 摩賡)은 런던 주재 한국총영사로 임명되기도 했다.0360)≪英案≫2, 문서번호 1790 英國會議員 摩賡의 倫敦名譽總領事被命狀 傳達依賴.
≪皇城新聞≫ 1900년 3월 13일 및 1900년 4월 12일자에 보면, 모르간은 영국으로 돌아갈 때 韓人 方有榮을 런던에 유학시키기로 하고 대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이 큰 기대를 걸고 완벽한 시설을 갖추어 채굴에 임했던 은산금광의 産金高는 1905년부터 떨어지기 시작해 1906년 4월 완전히 작업을 중지하였다.

 이와 별도로 1903년 4월 영국인 피어스(A. L. Pearse)가 황해도 遂安金鑛의 채굴권을 신청하여 1905년 11월 특허권을 획득하였다.0361)≪遂安金鑛特許命令書≫(奎 23392·23393). 이것은 咸陵可회사를 통해 추진되었는데 정부의 반대로 일시 중지되었다가, 러·일전쟁 후 일본·미국과 합동으로 각국 공동의 자본을 투자해 설립한 코리안 신디케이트(Korean Syndicate)를 통해 얻어내고 있었다. 코리안 신디케이트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국에서 각국의 이권교섭 절차가 끝나고 광산기술자들이 좋은 광산을 선택하자마자 이들 여러 광산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하나의 인터내셔널 컴퍼니(International Company)를 만드는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코리안 신디케이트에 참여한 각국의 이권단체들은 인터내셔널 컴퍼니에서 그들의 출자한 비율에 따라 이득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불필요한 열강간의 경쟁을 줄이고 작업의 획일성과 경제성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0362)≪日本外交文書≫39-2, 문서번호 966 「コリヤン·シンヂケート」ニ關スル機密文書送進ノ件.
Korean Syndicate 및 Korean Mining Syndicate Agent, Horace N. Allen Papers.

 즉 1905년대에 이르러서는 열강의 한국 광산에 대한 투자방식의 양상이 전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독일의 당현광산이나 영국의 은산금광이 막대한 시설과 자본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실패로 끝나자 열강은 단독자본으로 채광에 임할 때의 위험부담에 매우 신중을 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 각 열강이 자본을 모아서 합자회사를 설립하여 공동으로 경영한다던가 서로간의 이익에 따라서 특허권을 양도하기도 하고 특허받은 광산을 서로 교환하기도 하였다. 소위 뒷거래가 이루어진 것인데 광산업 투자에 대한 위험 부담을 줄여보자는 계책이었다.

 이외에도 영국은 평안북도 龜城金鑛 채굴권을 일본의 도움으로 얻어내고 미국과 더불어 사탕산업 개발 특허권을 얻기도 하였다. 또 철도이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1898년 영국공사 조오단(J. N. Jordan, 朱爾典)은 호남선 부설권을 요청한 일도 있었다.0363)≪英案≫1, 문서번호 1382 英商社 湖南線敷設權 請願의 請議要請事·문서번호 1392 湖南鐵道敷設 請願의 謝絶. 물론 한국정부에서는 시기상조임을 내세워 거절하였지만 이렇듯 영국은 모든 이권부문에 노력을 경주하였던 것이다. 영국은 초기에는 청에 의존하고 후에는 일본과 결탁하면서 이권교섭을 추진하여 이권침탈을 도모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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