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2. 독립협회 전후 일제의 이권강점
  • 2) 철도이권

2) 철도이권

 철도는 근대 자본주의가 생성해 낸 대표적인 교통수단으로, 대규모적인 상품유통과 국내 시장의 형성 수단으로서 산업 발달을 뒷받침한 가장 중요한 사회간접자본으로 주목되고 있었다. 따라서 후진지역에 있어서의 철도는 그 대부분이 제국주의 열강의 수중에 장악되어 부설·운행됨으로써 그들의 침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철도이권 가운데 가장 먼저 양여된 것은 미국의 모오스(J. R. Morse, 毛於時)가 1896년 3월 알렌(Horace N. Allen, 安連)의 도움을 받아 얻어낸 경인철도 부설권이었다. 모오스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얻은 뒤 친구인 미국인 타운샌드(W. D. Townsend, 陀雲仙)와 함께 韓國開發會社(Korea Development Co.)를 설립하고, 이듬해인 1897년 3월 인천 牛角里에서 기공식까지 거행하였다. 그리고 약 2개월 가까이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자금조달에 실패하여 더 이상의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경인철도 부설권이 미국측으로 넘어간 것을 뒤늦게 안 일본은 일본 공사를 통하여 외부대신 李完用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에게 양여한 것은<暫定合同條款>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항의하였다. 그러나 이완용은 이 해(1896) 1월 일본정부에 대하여 500만 원 차관을 제청할 때 그 중의 200만 원은 철도 부설비로 충당하겠다고 하였으나, 3·4개월이 지나도록 회답조차 없었으니 한국정부의 과실이기보다는 일본측이 이에 응할 의사가 없었다고 하여 항의를 묵살하였다.0385)윤병석, 위의 글, 126쪽.

 이러한 상황속에서 모오스가 자금난에 봉착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측은 1898년 4월 일본인 시부자와 에이치(澁澤榮一)를 대표로 하는 京仁鐵道引受組合을 내세워 계약을 맺고 前渡金 20만 불을 지불한 뒤 다음해 1월 완전히 매수해 버리고 말았다.

 이는 경인철도 부설 허가서의 내용을 완전히 묵살한 행위였는데, 왜냐하면 허가서의 제15조에 의하면 “본 철도회사 및 한국정부 사이에 措辨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면 양측에서 공평히 差定 임명하는 2명 내지 5명의 위원이 이를 결정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11조의 “본 철도가 완성된 후 15년이 경과했을 경우, 한국정부가 본 철도의 재산을 당시의 시가로 매수할 수 있다”는 규정을 위배하고 일방적으로 그 권리를 일본에게 팔아버린 것이었다. 또한 일본 역시 한국정부의 승인도 없이 자본력을 앞세워 불법으로 매수하였던 것이다.

 경인철도 부설권을 인수한 시부자와는 그전부터 한국의 금융업 등 제반 이권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였을 뿐 아니라 이미 경부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한 발기위원를 조직하여 한국정부에 교섭을 시도한 바 있었다. 그러던 차에 경인철도 부설권을 얻은 모오스가 자금 조달이 어렵다는 소식이 있자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아 그 권리를 인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부자와는 1899년 5월 경인철도합자회사를 설립하여 그 해 9월 한강 노량진에서 인천까지 개통시킬 수 있었다. 1900년 7월에는 난공사로 일컫던 한강의 가교까지 준공하여 경인간의 교통을 1시간으로 단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으로 경인철도의 이용은 매우 부진하였다. 경인철도회사는 승객 흡수에 고심한 나머지 광고문을 내붙여 적극적으로 선전을 하였지만 한국인의 거부감은 여전하였다.0386)이배용,<澁澤榮一과 對韓經濟侵略>(≪國史舘論叢≫6, 國史編纂委員會, 1989), 185∼221쪽.

 한편 일본은 경부철도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관심을 쏟고 있었는데 특히 경부철도는 산업자본 확립기에 있었던 일본이 한국의 지배권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국의 총력을 기울여 부설한 해외철도였다. 따라서 경부철도 부설권의 획득에서 완공에 이르는 과정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0387)鄭在貞,<경부철도의 부설에 나타난 일본의 한국침략 정책의 성격>(≪韓國史硏究≫44, 1984), 108쪽.

 당시 일본은 경인철도 부설권이 미국인에게, 경의철도 부설권이 프랑스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 경부철도 부설권도 제3국에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시부자와 등 150명의 자본가들이 정부의 후원을 얻어 경부철도주식회사 창립을 서두르는 한편 한국정부에 대하여 철도부설의 특허를 청원하였다. 그러나 한국내에는 반일 감정이 높았고 또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러 있었던 때이므로 일본의 청원을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1898년 2월에 이르러 러시아가 경부철도 부설권을 얻으려는 움직임을 나타내자 일본은 당황하여 한국정부에 항의하였다. 그 후 4월에 제3차 러일협상인 로젠·西 협정이 체결되어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상업과 공업 진출을 러시아가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즉 러·일간에 滿韓交換政策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일본은 자국의 위치가 유리해지자 다시 경부철도 부설권 획득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해 5월 시부자와가 직접 내한하여 교섭을 벌였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총리대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종황제를 알현하는 등 적극적인 外援運動을 하였다. 그 결과 동년 9월 8일 한·일 양국의 공동경영을 전제로 한<京釜鐵道合同條約>이 체결되었다.0388)朝鮮鐵道史編纂委員會,≪朝鮮鐵道史≫1(朝鮮總督府 鐵道局, 1937), 52∼56쪽. 그 내용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되었는데, 즉 제3조에 “철도노선의 부지, 정거장·창고·공작장 등에 충당할 용지는 한국정부가 이를 제공한다”라고 되어 있고, 제5조에 “철도에 필요한 기계와 물건 중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것은 관세를 면제하고 철도용 地稅와 그 밖의 각종 철도 소관의 이익에도 徵稅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으며, 제15조에 “철도회사는 어떤 경우에라도 한·일 양국의 정부나 국민 외에는 그 株券을 양도하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경부철도합동조약>에 의해 경부철도의 부설권이 발기위원회에 주어지기는 하였으나 실제로 공사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당시 일본의 국·내외적 조건은 방대한 자본이 소요되는 해외철도의 건설을 추진할 만한 입장에 놓여 있지 못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1899년 1월 시부자와를 위시한 발기위원들은 처음부터 한국철도의 지배에 적극적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수상에게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설립을 위한 특별 보조를 요청하였다. 결국 그 해 9월 정부의 특별 보조 명령이 내려져 그것을 토대로 1901년 6월 시부자와를 取締役社長으로 하는 京釜鐵道株式會社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0389)≪東京經濟雜誌≫ 1901년 7월호, 40쪽.

 경부철도주식회사의 간부들은 전국 각지를 누비면서 위로는 天皇家로부터 아래로는 시골의 村長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계층을 주주로 모집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일본 국민이 경부철도주식회사를 통해 한국 침략을 위하여 총집결하였음을 증명해 주는 것인 동시에 경부철도는 일본에게 있어서 단순한 해외철도의 부설이 아니라 일본의 국가 권력과 政商資本家의 주도하에 일본의 일반 민중이 망라하여 결집한 국가적 사업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0390)鄭在貞, 앞의 글, 109쪽. 이러한 지원을 배경으로 1902년 8월 착공하여 만 3년 뒤인 1905년 5월에 15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철도를 준공하였다.0391)박만규,<한말 일제의 철도부설지배와 한국인동향>(≪韓國史論≫8, 서울大, 1982).

 러·일전쟁 중에 한국인의 피와 땀을 착취하여 건설된 경부철도는 전쟁이 끝나자 통감부 경부철도관리국에 이관되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주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일본은 처음부터 철도부지에 대한 한국정부의 제공 약속을 이용하여 부지의 광점 의도를 갖고 있었다.0392)박만규, 위의 글, 251∼259쪽. 철도의 운영에 필요한 토지는 물론 주요 정거장을 중심으로 그들의 세력 근거지의 형성을 기도하였다. 즉 철도부설을 통해 한국 침략의 군사적 거점으로 뿐 아니라 일본인의 상업 진출과 농업 이민 문제를 결부시켜 식민지화의 전초작업을 다져나갔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일본은 정거장 부지로서 20만 평 이상을 요구하였다.0393)朝鮮鐵道史編纂委員會, 앞의 책, 662쪽. 일본의 일급 정거장인 東京驛·上野驛 등이 3만 평 미만임과 비교할 때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단정적으로 증명해 주는 처사였다. 심지어 경의선 군용철도의 경우는 정거장 부지와 함께 군용지로서 300만 평 이상을 요구하였다.

 물론 한국정부와 현지 주민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일방적으로 강제수용을 자행하였다. 이렇게 일본군에 의해 점탈된 토지는 일본 민간인들에 불하되어 그들의 거류지로 새로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 살던 한국인들은 시가의 10분의 1 혹은 20분의 1에 불과한 형식적인 보상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 일시에 생활기반을 잃고 말았다.

 한편 철도의 부설에는 각종의 자재 및 막대한 노동력이 소요되었다. 노동력의 징발에 있어서도 저임금 정책으로 일관하였음은 물론 러·일전쟁시 경부선·경의선의 속성 공사로 엄청난 수효의 인력 동원이 필요하게 되자 강제징발을 강행하였다. 철도 부역뿐만 아니라 군수용품 수송, 군용 목적을 위한 도로 건설에 동원되어 농촌사회를 극도로 피폐화시켰다. 심지어는 戰場이 이동되면서 만주지역까지 한국인 인부가 강제 투입되었다.0394)≪大韓每日申報≫, 1904년 8월 14·16일.

 막상 철도가 부설된 후 이용 과정에서 한국인 승객에 대한 대우도 노골적으로 차별정책이 드러났다. 한국인 승객을 화물 취급하였을 뿐 아니라 철도 운임도 일본인 승객이 주로 이용하는 장거리 1, 2등을 우대하고 한국인 승객이 이용하는 단거리 3등 여객 운임을 항상 인상 조정하여 철도에서 한국인 승객을 구축하려 하였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철도이권 침탈로 자국내의 불황을 극복하고 자본과 기술을 축적함으로써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한국민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하여 제국주의 침략을 선도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여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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