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은 哲宗이 세상을 떠나고 高宗이 왕위를 이음으로써 군왕의 교체가 이루어지던 1863년 정월에 恩津의 한 사대부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과 때를 같이하여 개막된 고종시대의 전환기적 격동은 근대민족국가를 이룩하려는 목적의식의 활성화와 이를 안팎에서 제약하는 위기의 가속화가 동시에 드러나고 있었던 시대상황의 반영이었다. 만 18세의 나이로 文科에 합격하여 봉건적인 귀족관료로 입신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 있었던 그가 안일한 출세가도를 쫓지 않고 소수 정예의 개혁세력에 가담하여 일본 도야마(戶山) 육군소년학교에서 武人의 길을 닦았으며 갑신정변의 행동대장으로 활약했었던 사실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 때문에 서재필은 22세의 젊은 나이로 부모형제와 처자식을 死地에 남겨둔 채 망명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朴泳孝·徐光範과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이들과 헤어진 다음 철저하게 고국과 단절된 채 미국에서 적응하기 위하여 온갖 시련과 고초를 무릅써야만 했다. 그 결과 마침내 그는 미국사회에서 당당한 전문 직업인으로 인정받는 한 사람의 의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서재필에게 서둘러서 귀국하도록 끈질기게 설득한 사람은 두 번째의 망명으로 미국에 둘러 워싱톤에서 서재필을 다시 만나게 되었던 박영효이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고국의 정부는 이미 두 차례나 서재필의 귀국을 요청한 일이 있었고 그가 결과적으로는 두 번 다 거절했었지만,0462)한흥수,<송재 서재필의 첫 번째 귀국>(≪인간 송재 서재필≫, 송재문화재단, 1986), 15∼19쪽. 막상 박영효의 권고에는 귀국 결심을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서재필에 대한 고국 정부의 첫 번째 귀국요청은 1894년 갑오개혁 초기단계에서 내려진 일본측의 상황인식과 관련된다. 민씨정권을 몰아내고 대원군을 등장시킨 다음 군국기무처를 급설하고 내정개혁의 명분을 내세워 조선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시작한 일본측은 기존 정치세력의 반발을 상쇄시켜 주면서 그들이 내세운 개혁의 정당성을 밑받침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형성과 그 동조적 역할이 절실하였다. 이 때문에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살아남아 있던 개화당 요인들에 대한 귀국의 문이 10년만에 갑자기 열리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동경에 머물러 있던 박영효를 8월초에 서둘러서 귀국시키는 한편, 대원군의 요청을 일본 외무성이 수용하는 형식을 빌어 미국에 있던 서광범과 서재필의 귀국을 주선하도록 주미 일본공사에게 훈령하게 되었다. 서광범은 이러한 일본측의 조처에 즉각적으로 응하여 귀국했음에 반하여 서재필은 거절하였기 때문에 결국 이해 12월에 새로 출범한 연립내각에는 박영효(내무)와 서광범(법무)만이 입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갑오개혁의 진척에 따라 서재필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국내 정치적 여건은 한층 성숙되어 갔으며 이 때문에 서재필에 대한 두 번째의 귀국요청은 고국정부가 그를 관직에 임명하는 형식으로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그를 불러들여서 함께 일하기를 갈망했던 박영효와 서광범의 집념이 작용했던 것으로, 박영효가 이듬해(1895) 봄으로 접어들면서 세력확장에 활기를 띠고 있는 가운데 박정양 과도내각은 6월 2일 서재필을 외무협판에 임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서재필은 후일 “의학연구를 중지하고 싶지 않아 귀국 취임하기를 거절하였다”0463)徐載弼,<滯美五十年>(閔泰瑗,≪甲申政變과 金玉均≫, 國際文化協會, 1947), 90쪽.고 회고한 바 있듯이, 이때까지만 해도 각고 끝에 마련한 의사로서의 미국생활 설계를 쉽사리 포기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박영효가 갑자기 陰圖不軌의 혐의를 받고 국외로 탈출하여 두 번째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되면서 그 다음날(7월 9일)로 서재필의 외무협판직도 취임하지 않은 채 38일만에 의원면관되고 말았다.
서재필로서는 두 차례의 귀국요청이 당장은 관심 밖의 일이었을지라도 차츰 고국으로 향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때문에 그는 멀리하던 주미공사관에도 차츰 출입하게 되었고 유색인종에 대한 사회적 차별로 어려움을 겪는 그에게 공사관이 제공하는 편의도 부담없이 받아들이게 되었을 만큼0464)≪尹致昊日記≫5 (國史編纂委員會, 1975), 1897년 10월 8일.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럴 즈음에 그는 망명길에 뉴욕을 거쳐 워싱톤으로 찾아온 박영효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서재필은 9월 하순부터 한달 이상이나 박영효와 기거를 함께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새삼스럽게 고국의 현실을 절감하고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것은 “박영효에게서 본국 사정을 듣게 되자 나는 즉각적으로 국가를 위하여 큰 일을 하여 볼 좋은 기회가 닥쳐왔다고 깨달았다”는 그의 후일담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박씨는 내가 귀국하면 그 情形밑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였다”고 술회한 것을 보면 귀국 후에 전개할 활동에 관해서도 이것저것 박영효와 함께 구상하면서 귀국의 꿈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0465)박영효와의 재회에 관해서는 앞의 글 외에도 Channing Liem, Philip Jaisohn (The Philip Jaisohn Memorial Foundation, 1984), pp.123∼125를 참조. 이처럼 박영효와의 협의를 거친 후0466)≪尹致昊日記≫5, 1897년 10월 8일. 주미공사관을 통하여 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귀국수속을 밟기 시작한 것은 이해 11월초이며 미국을 출발한지 한 달 여만에 마침내 인천항을 거쳐 고국의 땅에 다시 발을 내딛게 된 것은 망명의 길을 떠난 지 11년 만인 1895년의 세모, 즉 이해 12월 25일이었다.0467)≪漢城新報≫, 1895년 12월 27일.
林昌榮(Channing Liem)씨는 앞의 책(126∼127쪽)에서 서재필의 귀국일자를 1896년 1월 1일로 쓰고 있는데 이것은 金道泰,≪徐載弼博士自敍傳≫(首善社, 1948)의 착오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서재필의 귀국의사 표명에 찬동하여 그의 귀국절차를 지원하여 주었던 조선정부의 호의적 태도와는 달리, 당시 조선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일본측은 서재필의 갑작스러운 귀국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계의≪漢城新報≫가 서재필의 귀국을 처음 알리는 기사에서 박영효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은연중에 그의 귀국목적이 박영효의 구명운동에 있는 것처럼 보도하였는데, 같은 때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일인기자 나카무라 마나미(中村眞南)가 본국에 전송한 통신0468)中村眞南,<徐載弼氏の周旋>(≪韓山通信≫, 1896년 2월 3일 발신).에서도 박영효에 대한 억측을 거듭 부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외형상으로는 여전히 조선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면서도 내면적으로는 날이 갈수록 어려움이 더해지고 있었던 일본측의 한계상황을 반사적으로 들어내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초 일본측은 박영효가 그들의 ‘편리한 도구’0469)F. A. McKenzie, The Tragidy of Korea(Seoul:Reprinted by the Yonsei University Press, 1969), p.54.로서의 역할만을 맡아줄 것으로 기대하고 귀국시켰었는데, 급속하게 독자적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가면서 조선의 이익을 위해서는 반일정책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급기야는 그를 몰아내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측과 대립적인 역학관계를 조성해 온 구미파나 친러파 또는 민씨파들은 다른 외국 세력과의 제휴를 통하여 일본측에 대한 견제력을 계속해서 키워 나가고 있었다. 삼국간섭 이후의 국제적인 고립화와도 상관되는 이러한 한계상황을 비상수단으로 타개하기 위하여 일본측이 획책했던 것이 ‘민비시해사건’이었다. 이로 인해서 이완용·이윤용·이하영·이채연·민상호·현흥택 등은 미국공사관에 피신하게 되었고 이범진·이학균은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러시아공사들을 비롯한 구미인들과 일본인들의 반목이 표면화되면서 고종의 신변보호를 위한 미국 선교사들의 역할도 활발해지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발생한 것이 고종을 일본의 통제권 밖으로 벗어나게 하려다 실패한 ‘春生門사건’이었다. 일본측은 민비시해의 책임을 상쇄시키려는 방향에서 이 사건을 국제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서양인들, 특히 미국선교사들의 사건 관련설을 널리 퍼뜨렸다. 이 때문에 미국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의 반목은 한층 날카롭게 되었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피신해 다니는 구미파 인사들의 수는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윤치호가 그의 부친 尹雄烈의 이 사건 관련 때문에 정동 언더우드목사집에 피신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친일세력이 주축을 이루었던 당시의 김홍집내각은 오히려 이 사건의 배후관련자들에 대한 일본측의 처벌 요구에 지극히 미온적이었으며 새로 내부대신의 자리에 들어간 兪吉濬도 조심스럽게 피신인사들의 신변 보호를 강구해 주는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12월 중순경에는 이채연·이완용·민상호의 행동범위가 미국공사관 밖으로 연장되었고 일본측이 12월 22일에 면직시키도록 작용했던 윤치호를 내부 참서관으로 다시 기용하려는 유길준의 움직임까지 감지되자 일본측의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 지게 되었다. 이 때는 충청도에서 문석봉과 그를 지지하는 송근수·신응조의 거병이 기폭제가 되어 민중의 뿌리깊은 반일감정이 의병봉기로 분출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처럼 일본측이 어느 방향에서도 뾰족한 묘책을 찾아내기 어려운 한계상황으로 몰리고 있었을 때, 서재필은 그들의 신경을 자극하는 미국시민의 자격으로 귀국하여 미국인 집에서 숙소를 찾던 끝에 정동의 아펜젤러목사의 집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박영효가 나라 밖으로 쫓겨나간 뒤였다. 그리고 법부대신의 자리를 지키다가 민비시해사건(10월 8일)직후에 학부대신(10월 14일)으로 옮겨 앉았던 서광범도 종종 신변의 위협과 불안을 느껴온 데다가 건강마저 악화된 나머지 자청하여 주미공사로 임명받은0470)The Independent, September 4th, 1897.
1897년 9월 4일자의 이 영문판에서는 “1895년 변란 후 김홍집내각안에서 그의 지위가 곤혹의 연속이었으며 때로는 생명이 위태롭기까지 했다. 그는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주미공사를 원했다. 그는 수년동안 폐질환으로 고생해왔다. 그는 지난해 정월에 미국을 향해서 서울을 떠났으며 현재의 이범진공사로 교체되었던 1896년 8월까지 미국주찰 특명전권공사로 있었다”라고 서광범이 자청해서 주미공사로 옮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官報≫, 1895년 8월 26일, 10월 26일 및 12월 12일, 호외. 후에는 번거로운 외부 접촉을 끊고 부임 준비에만 몰두하다가 12월 30일에 출국보고를 한 후에 새해 벽두에 임지로 향하여 등정에 올랐다.0471)≪官報≫1896년 1월 9일자 <彙報>에 의하면 음력 11월 15일 즉 양력 12월 30일 發程으로 되어있다. 그리고≪漢城新報≫, 1896년 1월 20일자에 의하면, 그는 1월 7일 오후 1시에 일본 神戶에 도착하여 오리엔탈호텔에 투숙한 후 火輪車 즉 자동차 편으로 동경으로 들어갔으며 다시 요꼬하마(橫浜)로 가서 선편을 기다려 부임할 예정으로 되어있었다. 따라서 그는 12월 12일에 공사로 임명받은 후 12월 30일에 정식으로 출국을 통보했으며 정초에 서울을 떠나 제물포로 가서 神戶행 여객선을 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그와 함께 의기투합하여 정부를 운영하려던 대표적인 두 인물중 한사람은 이미 국외로 쫓겨나 있었고 또 한사람은 곧바로 쫓겨나가게 되어 있었던 때에0472)서광범의 행적을 소개하는 한글판≪독립신문≫, 1897년 9월 4일자 1면 기사에 “불행히 팔월 변이 났으며 정부가 변혁이 되어 새 정부에 서씨가 있기가 위태하게 되었는지라. 그래서 서씨가 다시 쫓겨나 주미 공사로 다시 미국에 가 있다가…”라고 되어있다. 그는 홀연히 단신으로0473)林昌榮씨에 의하면 서재필은 부인 Muriel Jaisohn을 동반하고 귀국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물론 사실과 전혀 다르다(Channing Liem, ibid, pp.126∼127). 귀국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재필은 이러한 사정에 크게 구애받음이 없이 정동에 체류하면서 미국 선교사들과 구미 외교관들 또는 피신중이던 정동파 인사들과의 접촉을 펴나가는 한편, 김홍집내각의 요인들이나 정부의 중직을 계속 맡고 있었던 중도적인 개혁파(개명관료)들과도 긴밀하게 관계를 엮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가 귀국한지 2주째가 되는 1896년 정월 8일에 거행된 친위대 觀兵式에 초청되어 각부 대신들과 고등관들 그리고 각국 외교관들과 무관들이 배석한 御前에서 능숙한 통변의 솜씨를 발휘하였고 고종의 각별한 환심을 사게 되었다는 사실0474)≪漢城新報≫, 1896년 1월 10일 및 12일.에서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이때의 김홍집내각은 유길준을 중심으로 정동파와의 화해와 제휴의 길을 암중모색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구미 여러 나라들과 다변적인 협조관계를 구축함으로써 권력기반의 대외적 취약성을 극복하고 그들이 추진하는 개화의 자주적 기반을 굳히려고 했던 만큼 개화정책의 내용과 명분을 동시에 보강시켜 줄 수 있는 역할이 절실히 요망되었던 것이데, 그것을 당시로서는 구미사정에 가장 정통하였던 서재필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김홍집내각의 탐색은 피신중에 있는 정동파가 세력의 잠복에 불과하여 언제든지 재기할 가능성이 있음을 내다보고 구미인들의 동향에 불안을 감추지 못했던 일본측의 긴장이 역으로 반사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서재필의 귀국을 부담스럽게 여기면서도 직접적인 행동의 제약을 가할 수 없었던 일본측은 그를 현내각(김홍집내각)의 반대세력의 하나인 英語派(정동파)에 해당하는 미국파 또는 ‘미국인의 괴뢰’로 정형화시킴으로써0475)中村眞南,<米人の勢力及劃策>(≪韓山通信≫, 1896년 2월 3일). 파쟁적인 대립감정을 유발시키거나 은연중 압력을 의식하도록 작용하는 데 급급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김홍집내각과 일본측이 서재필의 귀국에 대하여 서로 어긋난 반응을 들어냈다는 것은 당시 서재필이 직면한 정치적 여건이 이중적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이것은 귀국 직후에 표출된 그의 동정과 활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긴요하다. 서재필이 김홍집내각의 입각 권유를 물리치면서도 즉 그들의 일원이 되는 것은 사양하면서도 때로는 그들의 요청과 지원을 받아가면서 독자적으로 활동을 펴나갈 수 있었던 이유를 미루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와 같은 이중적인 정치적 여건의 틈 사이를 최대한 비집고 들어가서 자신의 독자적인 활동의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나카무라의 통신기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즉 서재필의 귀국이 결코 본인의 신상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일본측 일반의 관측이었으나, 당시 예상 밖으로 그를 환영하는 분위기로 기울어져서 돌아온 지 얼마 만에 원로대신급의 월봉 3백원의 中樞院 고문관으로 임명될 정도로 서재필은 실로 행운의 寵兒가 되었다는 것이0476)中村眞南,<徐載弼氏の周旋>(≪韓山通信≫, 1896년 2월 3일 발신). 그 요지이다.
여기서 잠시 시야를 넓혀서 서재필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자주지향적 개화운동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용이하였을 만한 객관적인 상황을 간추려 두고자 한다.0477)韓興壽,≪近代韓國民族主義硏究≫(연세대 출판부, 1977), 84∼87쪽.
첫째는 1870년대 이후 직간접으로 구미문화와의 폭넓은 접촉과 수용이 이루어짐으로써 사회 전반적으로 변화가 자극되었고 신문화로서의 개화풍조가 광범하게 파급되어 나갔다는 점이다. 사회일반의 생활주변에서의 견문과 체험이나 군주의 피상적인 개화 동조는 말 할 것도 없고, 자주=배타의 논리로 인해서 反개화에 흘렀던 척사계열에서도 採西의식의 긍정적 바탕위에 완만한 사상적 변용을 이루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斥倭洋 또는 逐滅倭洋을 부르짖던 동학 농민군세력까지도 침략야욕으로 출병한 일본을 제외하고는 다른 통상국가들에 대해서 우호적인 반응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일반민중이나 관인층에서도 배타위주의 자주보다는 개화 수용을 전제로 하는 자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초기에는 동학운동이나 척사운동처럼 자주적 배타에 호소하는 교리적 동원에 힘입어 민족의식을 일깨우게 되었지만 대규모의 제도개혁을 수반한 갑오개혁을 거쳐가면서 거기에 담겨진 개화정책 자체보다는 거기에 따르는 자주권의 희생에 더욱 날카롭게 저항하면서 개화하되 어디까지나 자주적으로 개화해야한다고 하는 자주적 개화에 대한 인식이 반사적으로 높아졌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지배권이 국제적으로 한계에 몰리게 되면서 정파들 사이의 세력싸움에서 비켜나 온 중간층 개명관료가 중심이 되어 외세간섭을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개화하려는 노선이 현실적으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서재필이 귀국 후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들어낸 곳은 경복궁 神武門밖에서 거행된 어전의 친위대 관병식이었으며, 그 다음은 다시 열 하루가 지난 정월 19일 오후 1시 옛 南別宮 터에서 열린 서재필 자신의 공개강연회였다. 그런데 서재필의 이 두 번째 등장을 보도한 정월 20일의≪漢城新報≫기사0478)≪漢城新報≫, 1896년 1월 20일, 잡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내용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데 주목하게 된다. 즉 첫째는 서재필이 우리 나라 최초의 공개연설을 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가 미국 귀화인이어서 월봉 300원의 중추원 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가 귀국 계획으로 우선 국·영문신문을 발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먼저 짚어 두려고 하는 것은 이 세 가지의 활동이 관병식 직후부터 거론되기 시작하여 정월 15일을 전후한 3, 4일 동안에 연쇄적으로 타결되었으리라는 사실이다. 강연회의 초대장을 보낸다는 내부대신 유길준의 공문이 외부대신앞으로 발송된 날자가 정월 15일이었던 것으로 보아서0479)兪吉濬全書編纂委員會,≪兪吉濬全書-정치·경제편-≫(일조각, 1971), 235쪽. 서재필과 유길준 사이에 공개강연회 개최에 관한 합의는 그 보다 단 며칠이라도 앞섰을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같은 정월 15일자의 영문≪尹致昊日記≫0480)≪尹致昊日記≫4, 1896년 1월 15일.에는 서재필이 일단은 정부의 고문 계약제의를 사절했던 것으로 되어있으므로 실제로 서재필의 중추원 고문 임용계약이 성립된 것은 빠르면 16일에, 그리고 늦어도 19일에는 매듭지어졌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국·영문신문 발간계획도 거의 같은 때에 한 묶음으로 합의되었을 것으로 어림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귀국한 서재필과 더불어 이 세 가지의 활동계획을 협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兪吉濬이었다. 그는 국가 치안의 총책임자로서 전해 12월 중순경 미국공사관에 피신중이던 이채연, 이완용, 민상호 등을 귀가하도록 주선해 주면서 그들의 신변 보호를 위한 관표를 발급해 주었으며 약 40여일 후인 이해 정월 하순에는 따로 은신중이던 윤치호와 현흥택에게도 같은 혜택을 베풀어 준 일이 있다. 물론 이러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피신생활이 완전히 끝나게 된 것은 아관파천 이후의 일이다. 시기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보아서 유길준이 피신중인 정동파의 신변보호에 나서고 있었던 때에, 서재필의 활동계획에도 관여했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협의되고 타결되는 과정에서 서재필의 독자적인 활동의 여지가 충분히 고려되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러한 판단은 정월 25일을 전후하여 서재필의 활동 윤곽이 보다 총체적으로 드러남으로써 더욱 분명해 진다. 거기에는 ‘建陽協會’의 결성추진이라던가 ‘석유직수입회사’의 설립계획과 같이 일본의 기득권적인 세력기반이나 이익기반에 도전하는 새로운 조직활동의 조짐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매주 일요일마다 열기로 계획하고 정월 19일(일요일)에 처음 개최한 서재필의 공개강연회는 곧바로 착수한 건양협회의 창립작업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의 豪商들을 규합하여 정월 26일에 정식으로 발족시킨 漢城商務會議所는 정부가 한달 전인 1895년 12월 25일자의 법률 제17호로 제정 공포(12월 27일)한<상무회의소 규례>0481)≪官報≫, 1895년 11월 12일.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의 공개강연회가 겸해서 열렸던 이 모임에서 서재필이 발의한 석유직수입회사 설립안을 가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가 귀국한지 이십 수일만에 외국인을 雇聘하는 규례에 좇아 월봉 300원에 10년 기한이라는 대단히 파격적인 계약조건으로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는 것은 공식적인 직책의 수행 자체와는 별도로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유의하게 된다. 첫째, 미국시민의 신분을 전제로 한 계약관계의 성립은 거기에 함축된 ‘비정치성’을 내세워 신변안전을 도모하면서 정부와는 최소한 공식적인 연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10년간의 장기계약을 체결함으로써 긴장과 격동을 거듭해온 권력관계의 와중에서 벗어나 안전거리를 지켜가면서 그가 구상하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정치적 목표를 장기적으로 포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원로대신에 준하는 사회적 위상과 고소득의 봉급수준을 확보함으로써 입각의 경우와는 달리 유동적인 정치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독자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중추원 고문에 취임함으로써 여러모로 유리한 입지를 마련하게 된 서재필은 곧바로 건양협회의 결성을 추진함과 동시에 한성상무회의소에서 석유직수입회사의 설립안을 가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이후로 한층 더 집요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경제침투를 자행해온 日商들은 상업활동의 주무대가 된 주요 도시와 특히 개항장을 단위로 하여 상무회의소를 결성·운영함으로써 그들 상호간의 연대 조직을 통하여 가일층 상권 확대를 도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서 조선상인들은 하루가 다르게 위협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결국 같은 결사형태의 방어적인 연대 조직을 통하여 조선상인들의 권익을 보호육성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한 대응조치로서 정부가 제정 공포하게 되었던 것이 상무회의소의 규례라 하겠다.
서재필은 이 규례에 근거하여 농상공부 대신을 역임한 金嘉鎭과 더불어 건양협회의 결성작업과 동시에 상무회의소의 설립을 추진했으며 서울의 호상들의 동조를 받아 회원수의 상한선인 40명 정원(동 규례 제6조)의 한성상무회의소를 정월 26일에 발족시키게 되었다. 법 제정 한달만에 최초로 한성상무회의소가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전신에 해당할 만한 비법제적 조직의 형태가 관행화되어 왔을 정도로 객관적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농상공부 대신 鄭秉夏를 비롯한 김홍집내각 요인들의 지원을 받을 만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일상들과 맞서서 상권을 일궈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시된 석유직수입회사의 설립계획이 보다 직접적인 동기로 작용할 수 있었음도 지나쳐 버릴 수 없다. 이것은 당일의 회의에서 회장 金止善과 부회장 李承業을 선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별회원의 자격으로 참석한 서재필과 김가진의 석유직수입회사 설립발의를 40명 회원의 만장일치로 가결시킨0482)≪漢城新報≫ (일어판), 1896년 1월 28일, 잡보<石油會社 起らんとす>.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당시 석유의 판매단위는 ‘匱’ 또는 ‘상자’(case)로 표시되었는데, 인천·부산·원산의 3항을 통하여 수입되는 석유총량은 20만 궤에 연 증가율 3%내외라는 것이 일본측의 추산0483)≪漢城新報≫, 1896년 1월 30일, 잡보<石油會社를 創起하련다>.이었다. 인천항을 통한 수입량을 7만 상자로 파악한 내용0484)The Independent, September 5th 1896, Editorial.과도 맞아떨어지는 수치이다. 그러나 淸商이 거래하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량을 일상들이 미국 스탠다드석유회사 일본지사로부터 수입하여 파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국내의 석유 수용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이윤은 결국 일상들의 차지가 되는 형편이었다. 상자 당 20전에 수입하여 72전에 팔고 있었으므로 제경비가 지나치게 많이 든다는 일상들의 푸념0485)≪漢城新報≫, 1896년 1월 30일.을 곧이곧대로 인정해 준다고 하더라도 수입가의 배 이상의 순익을 올리고 있었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이 때문에 “조선사람의 회사도 스탠다드석유회사의 일본지사에서 일상들과 똑같이 싼값으로 석유를 얼마든지 사올 수 있다. 따라서 거기서 나오는 이윤도 조선사회의 몫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0486)The Independent, September 5th, 1896, Editorial.는 것이 석유직수입회사 설립을 제의한 서재필의 주장의 요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석유의 독점적인 거래만으로 연간 5∼6만 원의 순익을 올리고 있었던 일상들로서는 서재필의 석유회사 설립계획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것을 서재필과 미국인들의 결탁의 결과라고 비난하는0487)中村眞南,<徐載弼氏の周旋>(≪韓山近信≫, 1896년 2월 3일 발신). 한편, “석유회사의 前途는 낭패함이 필연”0488)≪漢城新報≫, 1896년 1월 30일, 잡보<石油會社를 創起하련다>.이라느니 “실패에 歸함은 의심없는 바”0489)中村眞男,<徐氏計畫を中止す>(≪韓山近信≫, 1896년 2월 4일 발신).라는 단정을 앞세워 상무회의소의 석유회사 설립 계획의 중단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없는 사업’을 계속 고집하여 “한편으로는 재래 일본상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씨 자신의 실패의 비운을 자초하는 것은 이해를 분간할 수 있는 인간이 취할 일이 아니다”0490)위와 같음.라고 몰아 세우면서 서재필·김가진에 대한 공격과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측은 정월말 서재필의 정부측 후원자인 유길준의 퇴각을 기도하면서 서재필에 대한 추방공작을 펴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일본측의 움직임이 그간에 서재필이 추진해온 신문발간 계획과 상관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0491)李光麟,<徐載弼의「독립신문」刊行에 대하여>(≪震檀學報≫39, 1975. 4), 80∼81쪽.
愼鏞廈,<「독립신문」의 창간과 그 계몽적 역할>(≪獨立協會硏究≫, 일조각, 1976), 23쪽.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서재필의 활동 윤곽을 보다 총체적으로 파악해 본다면 일본측의 서재필 추방공작이 일차적으로 밝혀진 신문발간 계획뿐만 아니라 건양협회의 결성 추진, 한성상무회의소의 발족, 석유직수입회사의 발기 등 2차적으로 밝혀진 활동방향과 행동성향으로 인해서 더욱 직접적으로 자극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서재필은 이러한 일본측의 압력을 부담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석유회사 설립계획 뿐만 아니라 신문발간 계획과 건양협회 결성계획도 모두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짐짓 내비치기까지 하였다.0492)中村眞男,<徐氏計畫を中止す>(≪韓山近信≫, 1896년 2월 4일 발신).
이것은 그 동안 서재필을 도와서 건양협회를 결성하고 석유직수입회사를 설립하는 일에 앞장서 왔던 김가진이 구속되는 사태가 2월 2일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김가진은 민비시해사건 직전인 전해 10월 4일자로 농상공부대신에서 해임되었다가0493)≪官報≫, 1895년 8월 17일, 호외. 다시 10월 15일에 주일공사로 임명받은 바 있다.0494)≪官報≫, 1895년 8월 29일,<敍任及辭令>. 그러나 일본의 대한정책에 불만을 품고 계속 부임을 미루어 오던 김가진은 서재필과 의기투합하여 건양협회와 석유직수입회사의 일이 궤도에 오르는 것을 기다려 정월 31일 사직소를 올리고 2월 1일 공사직을 사임하였는데,0495)≪官報≫, 1896년 2월 4일,<宮廷錄事와 敍任及辭令>. 그 다음날 갑자기 경무청에 구속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漢城新報≫는 “일하에 석유회사 일로 발기인이 되어 계획중에 있다는 김가진씨는 무슨 일로 그러하는지 모르나 경무청으로 구인되어…시방 예심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고,0496)≪漢城新報≫, 1896년 2월 5일. 나카무라기자는 “김가진·서재필 2인의 제휴가 이루어져 석유회사·건양협회 등이 발기되었으나 김씨는 돌연 경무청에 구인되는 신세가 되었다”고 본국에 타전함으로써,0497)中村眞男,<金嘉鎭氏の拘引>(≪韓山近信≫, 1896년 2월 4일 발신). 건양협회와 석유회사 일을 계기로 서재필과 김가진이 제휴하게 된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게다가 그것이 김가진에 대한 일본측의 응징과 보복이었음을 내비친 것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처럼 일본측은 김가진의 구속이 석유회사 뿐 아니라 건양협회와 신문발간 등 서재필의 일련의 계획을 모두 중지시키는 데 주효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선배 박영효씨의 실패는 서씨를 위하여 가장 적절한 훈계”0498)中村眞南,<徐氏計畫を中止す>(≪韓山近信≫, 1896년 2월 4일 발신).라고 한 것처럼, 박영효를 몰아낸 음모의 손길을 서재필에게도 뻗칠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미국시민의 신분으로 활동하는 서재필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피하여 김가진을 구속하는 간접적인 방향에서 해법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김가진의 구속이 석유회사의 설립을 저지시키려는 일본측의 의도에는 상당히 주효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서재필의 설득으로 자본을 투자하기로 동의했던 商賈들은 김가진 구속사건이 발생하자 모두 뒤로 물러서고 말았기 때문이다. 결국 석유직수입회사의 설립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 사실에 관하여, 서재필은 7개월 후의 한 글에서 “조선사람들이 자기 자본에 대한 위험을 두려워한다는 사실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 그들은 서로에게 믿음을 갖지 않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이 없다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무역의 가장 큰 적이다”0499)The Independent, September 5th 1896. Editorial.라고 설파한 데서 알 수 있다.
이처럼 일본측의 위협에 민감한 반응을 들어낸 상인자본가들의 향배에 전적으로 좌우될 수밖에 없었던 석유직수입회사 설립문제와는 차별화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서재필 스스로가 떠맡았던 공개강연과 건양협회의 결성추진이었다고 하겠다. 정월 19일(일요일)에 처음 선을 보인 이래 매주 일요일마다 열기로 했던 서재필의 공개강연회가 건양협회의 창립작업과도 내면적으로 깊이 상관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홀로 연설회를 열어도 청중이 장내를 가득 메운다. 그러면서도 씨는 정계에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사회개량, 풍속교정을 자기의 임무라고 선언하고 그러한 목적하에 건양협회라는 것을 만들려고 한다”는 나카무라의 기록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서재필은 김가진이 구속된 후에도 건양협회의 결성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갔던 것이다.
서재필의 공개강연은 당초의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아관파천이 일어날 때까지 모두 네 번 열렸을 것이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한성상무회의소의 첫날 모임에서 석유직수입회사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정월 26일의 두 번째 강연이 있은 뒤로는 그에 대한 일본측의 위협이 노골화되었고0500)≪尹致昊日記≫4, 1896년 1월 28일. 세 번째의 강연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던 2월 2일에는 김가진이 구속되는 돌발사태가 일어났으므로 실증자료의 밑받침 없이 그 실현 여부를 속단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서재필은 석유직수입회사 설립은 물론 신문발간이나 건양협회 결성 계획까지도 모두 백지화시키겠다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까지 건양협회의 발기모임을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2월 8일에 비공개적으로 가졌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2월 9일로 예정되었던 공개강연도 실제로 열렸었는지의 여부를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처럼 서재필의 공개강연이 두 번째 이후로는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첫선을 보인 때부터 그것이 사회에 던져준 충격은 대단히 크고 신선했던 것이 사실이다. 3∼4백 명의 청중이 장내를 가득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룬 데다가 이 자리를 주선하는 데 앞장섰던 내부대신 유길준과 함께 김가진·鄭秉夏 같은 전·현직 농상공부대신도 동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吾가 서씨 연설에 가서 세상에 不見·不聞하던 교설을 복문하옵고…불각하지 않을 수 없어 晝夜不忘하옵고”0501)≪漢城新報≫, 1896년 3월 15일,<奇書>.라고 방청자가 되뇌일 정도로 강연을 통해서 얻어진 집단적 각성의 효과가 놀라우리 만큼 컸음을 짐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연설 필시에 국기를 향하여 방청인에게 拜獻하라 하니 여러 관민이 일시에 박수하고 국기에 배헌하야”라고 한 것처럼, 애국심에 호소하는 의식의 극적인 효과를 통하여 청중의 감동을 한층 고조시켜주었음을 알 수 있다.
서재필의 강연이 때로는 “經綸의 도를 衆說한” 것으로, 때로는 “중민의 頑迷를 근심한” 것으로0502)≪漢城新報≫, 1896년 3월 25일,<徐顧問論>.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재필 자신은 국가의 자주적 자세확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국가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갈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의 역할과 존재의식을 일깨우고 그 세력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0503)≪漢城新報≫, 1896년 1월 24일, 잡보. 데 역점을 두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때문에 그는 일본공사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가 질시하는 표적이 되었다.0504)金道泰,≪徐載弼博士自敍傳≫(을유문화사, 1972), 229쪽. 서재필이 공개강연과 건양협회의 목적을 완곡하게 ‘사회개량과 풍속교정’으로 밝힌 이유를 짐작할 만 하다. 이러한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그가 독립신문의 강령으로 표방하였던 “조선사람들을 위한 조선과 깨끗한 정치”(Korea for Koreans and Clean Politics)를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문화의 조성에 뜻이 있었다고 보겠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의 또 다른 실천적 표현의 하나가 바로 건양협회라는 사회결사의 결성작업이었던 것이다.
건양협회는 김홍집내각이 1896년을 맞아 국가의 신기원을 이룩한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대외적 자주의 표상인 建元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建陽이라는 연호에서 그 이름을 따 온 것임은 잘 아는 일이다. 그런데 서재필의 행동을 주시해온 일본측에 의해서 건양협회의 결성계획이 미리부터 포착되어 있었던 만큼, 그 결성작업은 되도록 은밀하게 추진해 나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에 와 있던 헐버트가 독립협회의 전신으로서 ‘다소 내밀한 조직체(a more or less secret organization)’가 있었음을 지적한0505)Homer B. Hulbert, The Passing of Korea(Seoul:Reprinted by the Yonsei University Press, 1969), p.150. 바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것이 철저한 비밀조직은 아니었겠지만 후일의 독립협회처럼 완전히 개방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이해가 가능하다. 내부 결성단계에서는 서재필의 취지에 동조한 전·현직 개명관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폐쇄적 성격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관파천과 같은 미처 예상못했던 정치적 격동으로 인해서 끝내 공개적 결성의 단계로 뛰어오르지 못하고 말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밀한 조직체로 머물고 말았던 것이다. 여하튼, 건양협회의 결성 추진은 그 동안 사회적 지지가 미약했던 개혁정책의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개명관료들의 자주지향적 의욕이 서재필의 귀국직후 활동방향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그만큼 유길준의 협조도 크게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상인조합 형태의 이익집단이나 외국인들과의 연대관계에 터잡은 준정치적 사교단체가 이미 있어왔다는 사실은 서재필에 의한 새로운 결사의 추진에 좋은 선례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후자의 예로서, 구미인들을 배경으로 하는 ‘貞洞俱樂部’와 일본인들을 배경으로 하는 ‘朝鮮協會’가 이미 일년전(1895)에 조직되어 나름대로 활동해온 사실을 들 수 있다.0506)中村眞南,<米人の勢力及劃策>(≪韓山通信≫, 1896년 2월 3일).
조선협회는 박영효가 일본측과 제휴관계에 있었을 때 그의 주도로 1895년 6월 23일에 결성되었다. 그런데 나카무라에 의하면, 이에 자극되어 탄생한 정동구락부는 사사건건 조선협회와 충돌을 빚어왔다고 한다. 어찌했던 박영효의 망명과 민비시해사건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도 이 두 단체는 서재필의 귀국후까지도 계속 맹맥을 이어왔다.
그런데 이 두 단체는 모두 조선의 유지들을 한편의 구성원으로 포함했으면서도 각기 국미 또는 일본이라는 대외세력이 주 배경을 이루었기 때문에 조선사람들의 능동적인 역할은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건양협회는 바로 이 두 결사체가 보여준 조선에서의 단체 결성의 긍정적 기존성을 살리면서도 거기에 담겨진 외세의존적 제약성을 극복함으로써 조선의 자존을 살리면서 조선사람들 만으로 사회결사를 조직할 수 있는 발전적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앞길이 순탄할 수만은 없었던 것은 이 일을 앞장서 추진해 오던 김가진의 구속사태가 벌어진 가운데 당초의 계획보다 하루 앞당긴 2월 8일에 그 내부 결성을 서두르게 된 데서 알 수 있다.
桂洞 織造局에서 비공개적으로 열리게 되었던 이날의 발기위원 모임에는 모두 47명이 참석하여 임원을 선출한 것으로 되어있다. 雲養 金允植을 부회장으로 선출하고 다른 참석자들을 평의원이나 간사원으로 삼았다는 기록0507)金允植,≪續陰晴史≫上(探究堂, 1960), 391쪽.은 남아있으나, 회장으로 누가 선출되었는지를 확인할 만한 자료는 아직 없다.0508)그간의 사정으로 미루어, 김가진이나 서재필이 회장으로 선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서재필은 고문으로 물러나 있었던 독립협회 창립 때와 마찬가지로 이때도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평의원과 간사원 중심의 임원구성은 내부결성에 동참한 인사들 전원을 임원으로 충원함으로써 이들 각자에 대한 역할 부여를 통하여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기강연을 주도하는 일 이외에도 각기 평의원과 간사원의 역할분담을 통하여 서재필이 표방한 ‘사회개량과 풍속교정’에 필요한 일들을 시의적절하게 펴나갈 조직의 기초를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월 하순부터 진행되어 온 건양협회의 이러한 결성작업이 정동구락부에 대한 대항적 조직체로서 조선협회를 활용하려고 시도했었던 일본측으로서는 또 하나의 위협이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서재필이 귀국하자마자 피신중에 있는 정동파 인사들과 긴밀한 접촉을 펴왔기 때문에 일본측은 그렇지 않아도 신경을 곤두세워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터에 서재필은 조선협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었던 김윤식0509)金允植,≪續陰晴史≫上, 368쪽.을 비롯해서 일본측이 그들에 대한 의존세력 또는 연대세력으로 꼽고 있었던 개명관료들을 그들의 영향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이며 자주지향적인 하나의 사회결사체를 중심으로 결집할 수 있도록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주는 역할을 떠맡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2주간의 준비를 거쳐 2월 23일(일요일)의 정기강연회 석상에서 공개적으로 정식 발족할 예정이었던0510)金允植,≪續陰晴史≫上, 391쪽. 건양협회는 2월 11일에 일어난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공개결성의 기회를 무한정 미루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내면적으로 자주적 기틀을 암중모색하고 있었던 김홍집체제에 뿌리를 내려가면서 모든 계획을 추진해 온 서재필로서는 아관파천이 던져준 충격과 시련이 자못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일시적이긴 했지만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해 있기도 했다.0511)≪漢城新報≫, 1896년 2월 14일, 잡보. 그런가 하면 친러파로 새로 득세한 李範晋 법부대신의 규탄대상이 되어 신문발간 계획을 밀고 나갈 가망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0512)金道泰, 앞의 책, 243∼44쪽. 이 때문에 그는 미국으로 되돌아 갈 결심마저 내비치게 될0513)≪漢城新報≫, 1896년 3월 13일, 잡보<徐載弼氏> 및 3월 25일, 논설<徐顧問論>. 정도였다. 이러한 좌절속에서 그가 공개강연을 정기적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으며 또한 내부결성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건양협회도 정식으로 출범시킬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