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2. 독립협회의 조직과 운영
  • 1) 모금·계몽운동기의 조직과 운영
  • (2) 계몽활동·주간토론회와 정치교육체제

(2) 계몽활동·주간토론회와 정치교육체제

 이때까지도 독립협회는 고급·중견 관리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이들에 동조했던 일반민중들도 독립기념물 건립기금을 헌납하는 것만으로 회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민중의 그러한 참여가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거나 한가지로 집단적인 결속의식을 앞세운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 당시로서는 비록 소극적인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민족의 역사적 과업에 동참한다는 역사의식에 의하여 동기가 유발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에서 모색되는 민족공동체 의식에 바탕한 것이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참여동기는 독립협회가 주로 활용했던 두 가지의 대중적 感情移入의 매카니즘, 즉≪독립신문≫과≪大朝鮮獨立協會會報≫에 의하여 논리적 차원과 정서적 차원을 아우르는 방식으로 부여됨으로써 분산적이었던 개화의식층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가동적 인성을 대량으로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매달 15일과 말일에 1,000부씩 발행한 半月刊 잡지의≪會報≫가 사회적 영향력의 측면에서는 3,000부 발행의 隔日刊으로 시작하여 1898년 7월 1일부터는 日刊으로 넘어갔던≪독립신문≫을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별개의 경영구조하에 있었던≪독립신문≫에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잡지 형태의 대중매체를 발행하는 주체로 발돋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독립협회의 활동이 독립기념물 건립이라는 창립사업으로만 한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확장되어 나갈 것임을 예고한 것이었다. 실제로≪會報≫는 적자의 누적으로 18호까지만 발간되었지만, 지면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의 활동상에 관한 기사들과 독립협회가 추구하는 지향 가치, 즉 독립에 함축된 자주·자강의 목표 지향과 개명진보·국권자립·민권자주의 정책지향 그리고 유신·중흥의 개혁의지에 관한 논설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과학문명을 포함한 이론과학·응용과학·산업과학·사회과학을 망라하는 실상학문과 신학문의 지식체계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으며 민부국강의 산업개발과 군사기술 및 국제동향과 해외정보에 관한 자료들도 다양하게 소개되었다. 결국 이 모든 내용들은 독립협회가 창립사업과 병행하여 추구했던 교육적 내지는 계몽적 역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0578)韓興壽, 앞의 글(1973), 17∼55쪽 참조.

 당초부터 독립협회는 민족의 궁극적인 가치의 표상으로 ‘독립’의 개념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면서 그것을 상징 조작에 의하여 민중의 의식구조로 교화시키는 정치사회화의 기능 수행을 스스로의 설립 목적으로 확인시키고 있었던 사실에0579)安駉壽,<獨立協會序>(≪大朝鮮獨立協會會報≫1호, 1896년 11월 30일), 1∼5쪽.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문과 잡지를 매개로 했던 민중계몽 내지 교육적 기능과도 연결되는 것이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서재필과 윤치호가 주로 담당했던 공중 연설과,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핵심적 활동으로 부각되었던 ‘주간토론회’로 직결되었다고 보겠다. 이 때문에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제삼자에게 심어준 인상 즉 “독립협회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교육적 내지는 사회적 단체이며 정치에는 초연하다”0580)“The Independence Club,” The Korean Repository, Vol. Ⅳ, No. 11(November, 1897), p.437. 여기에 “…the club is essentially an educational and social institution and stands aloof from politics”라는 표현이 있다.는 사회적 통념의 안전지대에 자리잡고 집단적인 정치활동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될 정치교육으로서의 토론회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모금운동에 내재되어 있었던 민중계몽이라는 교육적 기능의 자연스러운 발전적인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고 이끌어 나갈 중심세력의 보강작업도 겸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독립협회의 토론회가 본궤도에 오른 것은 1897년 8월 29일부터이지만 모금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던 임원들 사이에서 새로운 활동방향이 모색되기 시작했던 것은 이해 5월 23일 독립관 현판식에 이어서 개최되었던 통상회부터라 할 수 있다. 왕태자의 睿筆로 내려준<獨立館>이란 3자를 현판으로 새겨 거는 경사를 겸했던 이날의 모임에서 고급관리 8명(李夏榮공사·李秉武참령·柳正秀국장·金重煥국장·白性基참장·金在豊경무사·閔泳綺협판·趙東潤참령)을 위원으로 증선한 데 이어서 “諸會員이 從今爲始야 每日曜日下午後三時에 本館으로 齋會야 暢舒도고 講談도 기로”결의0581)≪大朝鮮獨立協會會報≫13호(1897년 5월 31일), 會事記, 17쪽.하고 “문견과 학문에 유죠 말들을 강론”0582)≪독립신문≫, 1897년 5월 25일, 잡보.할 것임을 널리 주지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독립협회는 5월 30일부터 서재필·안경수·이완용·이윤용·이채연·권재형을 위시한 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매주 일요일마다 정기적으로 通常會를 열고 “內外國 有益 談論”0583)≪大朝鮮獨立協會會報≫14호(1897년 6월 15일), 會事記, 15쪽.을 벌이게 되었다. 이것이 때로는 자전거운동도 겸하는 극히 비정형적인 것이었지만 새로운 활동으로 넘어가기 위한 디딤돌의 구실을 하기에 요긴하였다.

 이러한 조짐은 임원 구성에서도 나타나서, 7월 3일에 있었던 고급관리 3명(沈相薰 탁지부대신, 韓圭卨 법부대신, 李寅祐 법부협판)의 위원 증선0584)≪大朝鮮獨立協會會報≫16호(1897년 7월 15일), 會事記, 11쪽.에 이어, 7월 18일의 통상회에서는 독립기념물 건립공사의 실무를 담당했던 幹事員이란 직제를 위원으로 폐합·통칭하되 필요에 따라 직무를 분장시키기로 결정0585)≪독립신문≫, 1897년 7월 22일, 잡보.하고 정계 고위층 인물 7명(朴定陽·趙秉稷·李載純·閔種黙·高永喜·金珏鉉·李忠求)과 함께 중견관리 및 신진인사 14명(金裕定·申載永·조병교·朴世煥·趙性協·李應翼·오영환·李仁榮·金明濬·윤진석·魚允迪·朴熙鎭·韓鎭昌·金奎熙)0586)≪독립신문≫, 1897년 7월 22일, 잡보 및 1898년 2월 1일, 잡보.을 위원으로 증선하였다. 그리고 8월 29일로 예정된 정기총회 대비책을 협의하였던 8월 8일의 통상회에서는 5월 23일 이후로 꾸준하게 탐색하면서 실험을 거쳐왔던 새로운 활동방향을 확실하게 굳혀서 정기적으로 週間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결정을 보게 되었다. 날자는 알 수 없으나 이해 연말을 전후하여 관리출신(김익진·鄭喬·李秉穆) 이외에도 배재학당에서 근대교육을 받고 협성회에서 토론회를 이끌어 왔던 신예의 청년들(周商鎬=時經·梁弘黙·이준일)을 새롭게 위원으로 영입함으로써0587)≪독립신문≫, 1898년 2월 1일, 잡보. 창립사업에 집중되었던 기존의 구조와 운영의 틀에 변화의 기운을 불어넣게 되었던 것이다.

 창립한 지 14개월 여만에 처음 열리게 되었던 8월 29일의 총회에서는 일부 회칙 개정도 있었는데, 임원의 임기를 6개월로 정했을 뿐 아니라 위원 이외의 임원의 직책을 명시하는 변화를 담고 있었다. 이미 앞에서 밝힌바 있듯이, 이 때까지 위원은 62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당일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새로운 임원 선출0588)The Independent, August 31 1897, Local Items. 이 때의 ‘司籍’(librarian)이 鄭 喬의 기록(≪大韓季年史≫上, 183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언제 ‘提議’로 바뀌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토론회가 본격화되면서 그렇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정교가 윤치호와 이상재 대신 또는 추가로 서기의 직을 맡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관해서도 그 전후관계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1898년 2월 28일의 총회에서 서기 鄭 喬가 임기완료로 바뀌게 되었다는 기록은≪독립신문≫, 1898년 3월 5일, 잡보에서도 발견된다.이 있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수 있는 것은 민영환을 수행하여 러시아에 갔다가 프랑스에 들러서 프랑스어 연수를 마치고 상해의 가족들과 함께 6월 16일에 귀국한 尹致昊가 공식적으로 독립협회의 핵심인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서재필·윤치호·이상재를 독립협회의 3거두로 꼽았던 문일평의 관점0589)文一平,<獨立協會와 民權思想>(≪湖岩全集≫第一卷:政治外交篇, 朝鮮日報 出版部, 1939), 208∼210쪽.에서 본다면, 윤치호와 이상재를 전진배치한 이 총회가 그러한 틀로 바뀌는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회 장 안경수 부회장 이완용 서 기 尹致昊, 李商在 (鄭 喬) 회 계 權在衡, 李根永 사 적 李采淵, 이계필, 이종하(후일 ‘제의’로 변경)

 독립협회가 정치교육체제로의 돌입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기나 하는 것처럼,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의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이라는 논제로 첫 출발을 장식했던 독립협회 주간토론회의 목적이 “회원들에게 공중연설(public speaking)을 훈련시키고 會議(public meetings) 의사진행 방법을 실습시키는 데”0590)The Independent, August 31 1897, Local Items. 있었음을 주목하게 된다. 당초에 서재필은 그의 목요강좌에 참여했던 배재학당 학도들을 모아서 1896년 11월 30일에 協成會라는 이름의 토론회(Debating Society) 동아리를 만들게 하고 “엄격하게 議會通用規則을 시행하는”0591)The Independent, December 3 1896, Editorial. 이른바 模擬國會와 같은 성격의 활동을 지도해 왔다. 그런데 협성회에서 진행되었던 “의회원 규칙과 연설하는 공부는 규칙을 엄히 지키고 속에 있는 말을 두려움없이 하며 일 의논할 때에 제제 창창하야 혼잡한 일이 없고 꼭 중의를 쫓아 대소사무를 결정”0592)≪독립신문≫, 1896년 12월 3일, 논설.하는 실험단계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한 그는 그것을 9개월만에 독립협회에 본격적으로 적용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提議’를 맡은 임원이 미리 검토하여 마련한 토론 주제에 따라 찬성(右便)과 반대(左便)의 양편으로 나누어 각기 대표발언자(正演議)와 찬조발언자(佐演議)가 주장을 펴게 하고 방청회원중에서도 어느 한편에 대한 지지 발언 또는 반대 발언을 하게 한 다음에 다시 양편 대표발언자의 종결 토론을 거쳐서 회중의 다수결로 衆意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토론회의 진행방법이었다.

 독립협회의 이러한 토론회를 참관한 게일(Gale)목사는 그것을 ‘yes and no meetings’으로 표현하면서 거기에 함축되어있는 ‘贊成者 多數’(the ayes have it)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싹트고 그것이 마침내는 여러 방향으로 확산되었음0593)James S. Gale, The Vanguard:a Tale of Korea(New York:Fleming H. Levell Co., 1904), p.224.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서재필의 회고에 의하면, 처음에는 공중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했던 많은 회원들도 오래지 않아서 효과적인 연설을 하게 되었을0594)F. A.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Reprinted by Yonsei University Press, 1969), p.68. 맥캔지는 이 책의 제4장(IV. THE INDEPENDENCE CLUB, p.60∼78)을 집필하면서 그 중의 일부는 서재필에게 부탁하여 보내준 원고를 그대로 실었다. 여기서는 그러한 서재필의 증언 부분을 참고하였다. 정도로 토론회의 회수가 거듭될 수록 공중연설에 익숙해져서 자기 의사를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의 주장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다수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만큼 독립협회의 토론회는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소리없는 의식혁명의 봉화가 되었으니 자연히 실천행동이 따르게 되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5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포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는 것이 의리상에 대단히 불가”하다는 논제로 격론을 벌였던 11월 1일의 토론회 결과로 100명 이상의 奴婢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음을 당시의 영문계간지≪한국휘보≫가 증언으로 남겼던 사실0595)“The Independence Club,” The Korean Repository, Vol. Ⅳ, No. 11(November 1897), pp.437∼38.은 그 표본적인 사례로 꼽을 만 하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독립협회가 토론회를 통하여 是와 非를 명확하게 가려서 그들의 집단 의지로 수렵시키고자 했던 주제들 대부분은 궁극적으로 국가시책에 의하여 해법이 마련되어야만 할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정책적 결단을 촉구하는 실천 행동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갑오개혁에서 채택되었던 근대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한 토대의 구축에 주안점이 주어져 있었던 독립협회의 토론회 주제들은 산업개발을 포함한 국가부강책, 국가의 자주권 확보와 안전보장책, 도로·위생·안전 관리를 포함한 보건사회정책, 다양한 근대식 교육과 인권·문화정책을 두루 아우르는 쟁점들에 집중되어 있었음0596)韓興壽,<獨立協會의 政治集團化過程>(≪社會科學論集≫3, 延世大, 1970), 32∼34쪽.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정책과제들은 토론과정에서 찬반의 시비를 가리는 동안에 개혁추구의 방향으로 의견을 수렴함으로써 집단적인 동조의식과 결속력을 강화시키게 되었지만 거기에 쉽사리 동조할 수 없는 봉건관리들의 거부반응과 이탈을 자극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리하여 이전까지는 서로 친화적이었던 정부와 독립협회의 관계가 경계·감시와 비판·공격의 관계로 틀을 지어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 내부에서도 ‘급진’과 ‘온건’으로 세력이 갈리면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다는 尹孝定의 참여 관찰기록0597)尹孝定,≪風雲韓末秘史≫(鷲山書林, 1946), 184∼87쪽.도 남아있다. 1897년 10월초에 몇몇 봉건관리들이 러시아를 업고≪독립신문≫을 停刊시키려는 공작을 획책0598)≪독립신문≫, 1897년 10월 7일, 논설 참조.하다가 마침내는 서재필 추방공작으로 넘어가게 되었지만, 독립협회가 이러한 공작에 대응하여 내부결속을 강화하게 된 것도 개혁지향적인 신진세력의 진출을 촉진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모로 보거나 민중과의 거리가 더 가까워지게 되었던 이들은 자유로운 찬반토론을 거쳐서 다수의사로 결정되는 ‘중의’야 말로 전체의사로서 간주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정책으로 반영되어야 하고 정부를 통제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강화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의 위기상황 극복이라는 명제로 이어지게 되었던 그러한 대중의식의 집단적인 발현은 정부에 대한 衆意의 통제를 당연시하는 실천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1897년말에서 1898년초에 이르는 사이에, 신문의 민중계몽적 역할의 중요성과 보급의 필요성, 항구적 국태민안을 위한 관민간의 일심애국의 긴요성, 선악·이해·장단을 알면서도 준행할 줄 모르는 지배층의 추악성, 외세에 영합·굴종하여 생명을 부지하려는 노예적 삶의 죄악성 등에 대한 토의가 날카롭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양심세력이라면 항용 가질 수 있는 문제의식의 표출로 보아 넘기기 쉽지만 실은 그것들이 당시의 기만적인 국정운영과 긴밀하게 상관되었던 것이다.

 한편에서는,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이 환어한 직후 봉건관료들사이에 경쟁적으로 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던 稱帝建元 문제가 매듭지어지면서 1897년 8월에는 光武 연호 사용, 10월에는 임금의 皇帝 즉위와 大韓 국호의 帝國이 선포되는 등 외견상으로 국위가 눈부시게 격상되는 형식이 갖추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러일간의 한반도분할 밀약설이 유포되면서 거기에 위험을 느낀 고종이 영국에 가 있던 민영환을 통하여 비밀리에 프랑스측에 파병을 요청하려고 시도했는가 하면,0599)韓興壽,<駐佛公使館 設置過程>(韓國政治外交史學會 편,≪韓佛外交史≫, 평민사, 1986), 57∼61쪽에서 다룬 “閔泳煥의 중도 도피와 공사관 설치의 지연” 참조. 신임 러시아공사 스페이에르(Alexis de Speyer)의 정부에 대한 압력이 날로 거세졌고, 외세와 결탁한 봉건관료들은 국가의 이권을 열강에 넘겨주려는 기미가 드러나는 등, 국가의 위기가 긴박한 정치현실로 인식되고 있었다.≪독립신문≫에 대한 정간공작도 그러한 정치상황에 대한 비판과 러시아공사에 대한 공격의 논조가 빌미가 되었던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독립협회의 토론회 역시 계몽적인 정치 훈련에만 자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가적 위기의 심각성을 확인하고 여론을 환기시키는 가운데 긴급한 정치현안을 타개하기 위한 ‘백성의 의논’을 마련하는 장소로서의 경험을 축적해 나가면서 집단적인 정치활동의 산실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20일 예정되어 있었던 토론회를 뒤로 미룬 채0600)≪독립신문≫, 1898년 2월 26일, 잡보에 “토론하려고 모였다가 상소하려는 일을 의논하는 까닭에 미처 여가가 없기로 그날에 못하였은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국가의 위기극복을 위한 구국선언과 상소를 결의하고 나섬으로써 자연스럽게 정치활동 내지는 대정부투쟁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계몽운동단체로서의 위상과 정체성을 되도록 견지하기 위하여 7월 중순까지만 하더라도 계몽적 정치훈련의 성격을 지닌 토론회를 병행하려고 노력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7월 하순부터 독립협회가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기 이전까지는 정치활동에만 주력했기 때문에 토론회는 더 이상 개최할 수 없었다. 다시금 명맥을 이어보려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12월 3일에 토론회를 개최한 바 있었지만 그것이 마지막 토론회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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