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의 정치활동을 열어 준 1898년 2월 20일의 통상회는 자못 비장하고도 결연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었다. 이날의 회의광경이 나라의 “병권과 젼곡권과 관인 츌쳑 권리를 다 외인의게 기심을 분탄히 넉혀…황샹폐하와 대한 쥬 독립 권리를 위야 목숨이라도 밧치겟노라고 셔 연으로 샹쇼기로 쟉뎡이 되엿…여긔 열명 사들은 모도 하과 동포 형뎨의게 심야 나라를 위야 쥭을 일이 잇서도 치를 도라 셔지 아니기로 쟉뎡들 엿시니…”0615)≪독립신문≫, 1898년 2월 22일, 잡보.라고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면, 현장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러시아의 수중으로 넘어간 국가의 군사권·재정권·관리임면권을 회복시킴으로써 ‘황권의 自主’와 ‘국권의 自立’을 실현할 수 있도록 목숨을 바쳐서라도 강국의 무례한 간섭을 막아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자필서명으로 盟書한 후 연명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러한 뜻을 담아서 이상재와 이건호가 작성한0616)鄭 喬,≪大韓季年史≫上, 175쪽. 이 言事疏(疏首 안경수)는 이병목을 寫疏위원으로, 이무영을 奉疏위원으로, 정교를 讀疏위원으로 삼아 전통적인 격식을 갖춘 가운데 다음날(2월 21일) 고종에게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25일에는 22일자로 된 批旨, 즉 “상소를 자세히 구실한 즉 지혜있는 말이니 말로만 하지 말고 그대로 행하라”라는0617)≪官報≫, 1898년 2월 25일, 中樞院一等議官安駉壽等言事疏 批旨省疏具悉 知言之言 要在行之而己(≪舊韓國官報≫6, 아세아문화사, 1973, 113쪽). 고종으로부터의 긍정적인 비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먼저 짚어두고자 하는 것은 이를 계기로 해서 독립협회의 주도세력과 지도체계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2월 20일의 통상회에서 국권수호를 위한 결사구국상소에 연명으로 자필서명한 회원들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끝내 서명에 동참하지 않은 회원들도 있었다.0618)≪독립신문≫, 1898년 2월 22일 잡보에 “올흔 신 노릇기를 두려워 야 이 셔를 아니 사도 혹 잇시나”라는 기사가 있다. 상징적으로 독립의 의기를 드높이기 위한 창립사업을 벌였을 때만 하더라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던 고급관리들중에서는≪독립신문≫이 러시아측의 전횡을 공격하고 독립협회가 관리의 도덕성을 문제삼게 되면서 경계의 태도를 보이게 되었는데, 그들이 결국은 이날의 통상회에서 연명상소에 동참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독립협회가 제3대 임원선출을 겸했던 통상회(2월 27일)에서는 러시아의 절영도 租借를 반대하는 운동을 구체화하게 되자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Alexis de Speyer, 士貝耶)는 이러한 독립협회를 가리켜 “가고 업업는 사이 거즛 졍치에 관계 되 챡 죠라 칭고 망녕되히 격동 을 지여 아라샤를 억이”0619)≪독립신문≫, 1898년 3월 12일, 잡보. 망동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면서 우리 정부를 추궁하였다. 이때부터 시세에 영합하여 창립사업에 앞장섰었던 고급관리들은 모습을 감추게 되었고 독립협회는 새로운 재야세력이 주도하는 변모를 겪게 되었다. 이점은 윤치호가 7월 19일 밤에 독립협회 회장서리의 자격으로 召命을 받고 입궐하여 上奏했던 다음과 같은 발언내용이 잘 말해주고 있다.
…당쵸에 폐하셔 협회를 어엽비 보실 에 죠(在朝) 관인들이 구름 치 회에 참예 더니 그 후에 어느 공관에셔 죠화 안다 말을 듯고셔 츄풍에 낙엽 치 다 러져 가고 다 야(在野) 인민 회에 참예 게 되와 우흐로 죠졍에(의) 졍형과 셰가 인민의(에)게 밋지 못고 아로 야한 인민의 사졍이 졍부에 달치 못와 샹하가 격졀온즉…(≪독립신문≫, 1898년 7월 22일, 논설<회장폐현>).
이처럼 정치활동의 개시와 더불어 스스로를 ‘在野한 人民’임을 자처하면서 종전의 ‘在朝한 官人들’과는 차별화하여 인식했던 독립협회의 새로운 주도세력이 공식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은 2월 27일의 정기총회부터라 할 수 있다. 이날 뽑힌 제3대 총회선출 임원들은 다음과 같다.
고 문 서재필
회 장 이완용
부 회 장 윤치호
회 계 이상재, 윤효정
제 의 이건호, 정 교, 양홍묵
사법위원 安寧洙, 강화석, 홍긍섭, 양홍묵(서기) (3월 20일 별도선출)
경찰위원 5署 관내 거주지별로 각 5명씩 25명 (3월 26일 택정)
(≪독립신문≫, 1898년 3월 25일, 잡보).
초대와 제2대 회장이었던 안경수의 뒤를 이어서 초대 위원장이었고 제2대 부회장이었던 이완용이 제3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기존체제의 온전한 계승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이완용은 1897년 7월말에 외부대신에서 학부대신0620)≪官報≫, 1897년 7월 30일, 호외<敍任>.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9월1일에는 평안남도관찰사로 임명0621)≪官報≫, 1897년 9월 2일, 호외<敍任及辭令>.되었으나 한 달만에 辭遞0622)≪官報≫, 1897년 9월 16일,<宮廷錄事>및 1897년 9월 30일,<敍任及辭令>.된 후 비서원경의 한직을 보존하던 중 안경수의 뒤를 이어 독립협회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활동에 돌입한 독립협회의 변모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거리를 두어왔던 이완용은 3월 11일에 다시 전라남도 관찰사로 임명0623)≪官報≫, 1898년 3월 15일,<敍任及辭令>.받자 서둘러서 떠나고 말았기 때문에, 그후로는 부회장 윤치호가 실제로 회장직무를 도맡게 되었고 따라서 제3대로 접어든 직후부터 독립협회의 지도체계는 사실상 윤치호 중심으로 구축되어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5월 14일 서재필까지 정부에 의하여 국외로 추방당한 뒤로는 더욱 그러했다.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의 이와 같은 지휘사령탑의 변화는 6개월 후(8월 28일)에 새로 선출된 다음과 같은 제4대 임원구성에서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회 장 윤치호
부 회 장 이상재
서 기 박치훈, 한만용
회 계 이일상
사법위원 이채연, 남궁억, 정 교 (9월 4일 별도 선출)
평 의 원 이상재, 남궁억, 이건호, 정 교, 方漢德, 金斗鉉, 廉仲模, 金龜鉉, 劉 猛, 玄濟昶, 鄭恒謨, 洪正厚, 趙漢禹, 卞河進, 尹泰興, 羅壽淵, 林鎭洙 등 20명(≪獨立新聞≫, 1989년 8월 30일·9월 6일, 잡보 및 愼鏞廈,≪獨立協會硏究≫, 一潮閣, 1976, 98쪽).
독립협회가 정치활동에만 주력하기 위하여 이미 8월 14일에는 토론회를 중단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기 때문에, 2주 후에 열린 이날의 총회에서도 그 동안 토론회 준비작업을 맡아왔던 임원직(제의)을 회칙에서 없애게 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만큼 독립협회는 조직을 관리하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로 총회선출 임원을 한정시켰음을 알 수 있거니와 정치활동에 발맞추어 조직구조의 기틀을 정비하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은 윤치호 중심의 리더쉽이 자리잡기 시작한 3월 10일경을 전후한 때로 파악된다. 정치활동에 따르는 “요긴한 사무를 의논하여 결정”0624)≪독립신문≫, 1898년 3월 3일, 잡보.하기 위하여 3월 3일 오후 1시에는 임시회를 개최하고 기본적인 운영방향을 정리했다. 그런가 하면, 3월 7일에는 회원들의 결속과 정체성(identity)을 다지기 위하여 會標를 만들기로 결정함에 따라서 은으로 만든 둥근모양의 회표 한가운데는 국기를 상징하는 태극을 파란(琺瑯)으로 넣고 그 주위에는 한글로 ‘독립협회 츙군국(忠君愛國)’ 이라는 여덟 자를 새겨 넣어서 옷에 달고 다니도록 하였다.0625)≪독립신문≫, 1898년 3월 15일, 잡보.
鄭 喬,≪大韓季年史≫上, 181쪽.
한편, 3월 13일에는 정치활동의 다각화에 대비하여 회원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운영의 실효를 거두기 위하여 본래의 규칙 이외에 별도로 부칙 33조를 마련하여 배포하기로 결정0626)≪독립신문≫, 1898년 3월 15일, 잡보.하고 3월 20일에 이를 확정함에 따라, 3월 하순에는 원규칙과 부칙을 합하여 한 권의 책으로 1000부를 만들어 회원들에게 나누어주기도0627)≪독립신문≫, 1898년 3월 29일, 잡보. 하였다. 정치활동에 상응하는 이와 같은 조직의 정비과정에서 모금·계몽운동기와는 다른 조직과 운영상의 몇 가지 특징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첫째로, 정치활동을 개시하면서 제반경비를 자율적으로 충당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月會費制를 강화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창립사업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을 때에는 그들의 취지에 찬동하여 보조금을 납입한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회원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모금운동 절정기에는 회원이 7천 여명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특히 위세와 부를 누리면서 고액의 보조금을 헌납했던 고급관인들의 상당수가 정치활동 개시와 때를 같이하여 행동노선을 달리하게 되자, 과거처럼 ‘보조금을 냈기 때문에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회원이기 때문에 회비를 당연히 내야 한다는’ 방식으로 인식의 전환을 꾀하게 되었다. 그것이 “독립문 역비 부죡죠 보죠금”과는 별도로, 매달 기한을 넘기지 않고 월회비를 내서 “회즁 경비를 군쇽 것 업시 쓰게 쟉뎡들이 되엿다”0628)≪독립신문≫, 1898년 3월 29일, 잡보.는 이른바 月捐金제도의 관철이었다. 3월 27일의 통상회에서는 회원들에게 월말까지 월회비를 납부하도록 독려하되, 시한을 한 주일이나 넘겨도 계속 미납하는 경우에는 除名하여 회원명부에서 삭제하기로 결의0629)≪독립신문≫, 1898년 4월 2일, 잡보.할 정도로, 회비납부를 회원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사항의 하나로 설정했던 것이다. 이 당시의 독립협회는 그만큼 외부의 지원없이 자율적으로 경비를 조달하는 일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따라서 재정자립에 대한 자의식도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회원들의 회비납부의무에 터잡았던 이러한 월연금제도가 지속되었음을 확인해 줄 만한 기록0630)≪독립신문≫, 1898년 8월 30일, 잡보<협회문젹>.을 눈여겨볼 수 있다.
둘째로,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치활동의 구체적인 방향설정과 과업수행에 대비한 안건을 심의·조정하고 그것을 전체회의에 상정하는 중간 매개적 역할0631)≪독립신문≫, 1898년 8월 1일, 잡보<졍부에 편지>.을 20명 정원의 評議會제도를 통해서 추구했다. 독립협회가 창립사업을 전개하던 초창기에는 독립기념물 건조사업 내지는 모금활동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정치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인물들을 계속 충원해 나가다 보니까 당초 20명 내외로 되어 있었던 위원의 수가 더욱 늘어났으며 간사원들을 위원으로 폐합시킨 이후에도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1898년초에는 그 위원의 수가 무려 68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심의·의결기관으로서의 중추적 역할의 수행보다는 모금성과에 역점이 두어져 있었던 데다 정치활동이후에는 독립협회와는 정치적 거취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정치활동의 전개와 더불어 내부적으로 중간매개적 기능을 수행할 제도적 장치가 절실하게 요청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신할 장치로 채택했던 것이 평의회제도라 하겠다.
이처럼 중간매개조직으로서의 평의회의 역할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20명으로 한정되어 인물확인도 어렵지 않았던 평의원들에 대한 정부 및 이해당사자들 측으로부터의 회유와 이간 공작도 집요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이 무렵 평의회의 세부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자료는 별로 없지만, 평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활동에 깊이 관여했던 鄭 喬의 기록은 그러한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는 가늠하게 해 준다. 정치적 난맥의 원인이 부패관리의 등용에 있음을 시인했던 6월 26일의 詔勅에 고무되어, 독립협회가 7월 3일과 11일에 時弊上疏를 올리고 물의를 일으켰던 몇몇 정부대신들과 고급관리들에 대한 탄핵과 처벌요구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때마침 회원들의 의견서를 수합하여 국정쇄신책을 논의했던 평의회가 합의를 도출하여 의안을 회중에 상정하기까지 필요이상으로 시간을 끌게 되었던 이면에는 그러한 공작의 개입이 작용했던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0632)鄭 喬,≪大韓季年史≫上, 212∼213·220쪽. 그러나 사안이 복잡하게 얽혀서 돌아가게 되면 결국 그것을 평의회에 위임하여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의원 20명중 거의 전원이 총대위원의 중책을 여러 차례씩 맡았었을 뿐만 아니라, 10월 24일 중추원 관제의 개정작업을 착수하게 되었을 때도 회중은 그 일을 평의회에 떠맡겼을0633)鄭 喬,≪大韓季年史≫上, 272쪽. 정도로, 중간매개장치로서의 평의회의 비중은 큰 것이었다. 이어서 이러한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재확인시켜 줄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중추원의 민선의관 선거를 이용하여 공화정치를 획책한다는 모함을 걸어서 독립협회 지도급인사 20명에 대한 체포령이 11월 5일 이른 새벽에 내려진 것이 것이다. 그 중에서 17명이 체포되었고 3명은 도피했는데, 체포된 17명중에서 이상재·남궁억·정 교·이건호·방한덕·김두현·윤하영·염중모·김구현·유 맹·현제창·정항모·홍정후·변하진·조한우 등 15명0634)鄭 喬,≪大韓季年史≫上, 289∼90쪽.이 바로 평의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독립협회는 결과적으로 9개월이라는 짧은 동안에 집중적으로 다각적인 정치활동을 매우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주효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제도적 장치가 사안별로 책임을 분담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했던 이른바 총대표 또는 총대리의 의미를 함축한 總代委員制였다. 물론 정치활동 이전에도 독립협회가 독립문 정초식이나 개국기원절 경축회와 같은 대규모의 행사를 기획한 일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독립협회의 공식적인 임원직과는 별도로 총대위원이라는 직함0635)독립문 청초식의 경우, 국문초청장에 총대위원 이완용·권재형·이채연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초청자를 대표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임은 The Independent, November 17th 1896, Local Items에서 ‘The Committee on Invitation’이라 표현되었고 실제로 발송되었던 영문초청장에는 ‘Invitation Committee’라고 적혀 있었음에서 알 수 있다.으로 초청장을 보낸 전례가 있었다. 그리고 정치활동을 개시하면서부터는 사안별로 역할을 폭넓게 기능적으로 분담하여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상례화되었다. 첫 번째 상소때에는 製疏위원·寫疏위원·奉疏위원·讀疏위원을 두었고, 회표를 만들기로 했을 때는 會標製造위원을, 정부에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작성하게 되었을 때는 起草위원을, 개국기원절 경축회를 개최하게 되었을 때는 笏記위원·接賓위원·査察위원을, 군주에게 올린 상소의 비답을 받들게 되었을 때는 奉批위원을, 비답을 받고도 거듭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다시 상소를 준비하게 되었을 때는 選語위원을 두는 등 기능에 따라서 수시로 역할을 분담시키고 일을 처리하게 했던 것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의 기능적 역할분담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가 정치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소로서 역시 그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총대위원제였던 것이다.
별도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재·정 교·조한우 3인0636)≪독립신문≫, 1898년 3월 1일, 잡보.
鄭 喬,≪大韓季年史≫上, 176∼78쪽.은 정치활동의 개시와 더불어 최초로 독립협회의 총대위원이 되었던 사람들로 꼽힌다. 이들은 절영도를 러시아의 석탄고로 조차해 주기로 했던 외부대신서리 민종묵에게 책임추궁의 뜻을 담은 공개질의서를 보내기 위해서 2월 27일 회중에서 총대위원으로 택정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3월 6일에는 이 문제의 선례가 되었던 절영도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던 일본석탄고의 철거를 외부대신에게 요구하기 위하여 윤치호·박치훈·최정식 3인이 총대위원으로 선정되었고, 韓露은행의 廢置를 탁지부대신에게 요구하기 위하여 홍긍섭·박승조·정 교 3인이 기초위원 겸 총대위원으로, 또한 의정부의 각부대신들에게 보다 근본적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제기하기 위하여 윤기진·박제빈·이병목 3인은 기초위원으로, 그리고 이무영·이건호·김락집은 총대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0637)≪독립신문≫, 1898년 3월 10일, 논설<대한독립협회>. 이처럼 때에 따라서는 일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총대위원과 그 밖의 역할을 분담시켜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을 추진해 나가기도 했지만, 의정부로부터 독립협회의 뜻에 전폭적으로 동조하는 답신을 받고 이에 대한 경하의 뜻을 담은 서신을 보내기 위하여 윤치호·정 교·이건호·오진영·김정현 5인0638)≪독립신문≫, 1898년 3월 17일, 잡보.을 총대위원으로 뽑았던 것처럼 단 한번의 편지작성을 위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영접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전별하기 위해서 각각 총대위원을 뽑아서 인천으로 보낸 일도 있었다.
독립협회의 총대위원은 사안별로 3인 1조로 구성되는 경우가 가장 빈번하였으나 그들의 역할이 언제나 한결같았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따라서 수시로 책임을 맡은 그들의 임기응변적인 역할분담은 독립협회가 지속적으로 정치활동을 추진해 나가는 데 중요한 활력소가 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정치할동이 계속되는 동안 주요 사안별로 총대위원과 그 밖의 위원을 구성했던 회수만도 120여 회에 달했고 연인원은 400여 명으로 어림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총대위원의 책임을 맡았던 사람은 100여 명이었으며 3회 이상 활약한 인원도 40여 명이나 되었다. 특히 김구현·김두현·남궁억·변하진·유 맹·윤치호·윤하영·이건호·이상재·이승만·정 교·정항모·최정덕·홍정후와 같이 6회 이상이나 총대위원으로 선임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조직의 중추적인 지휘권을 맡고 있었던 윤치호와 이상재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주목하게 된다. 그만큼 독립협회의 정치활동은 지휘계통의 통합과 아울러 수평적인 역할분담의 자율화라는 민주적인 조직운영의 묘를 통하여 활성화될 수 있었다고 보겠다.
넷째로, 독립협회는 회원들의 위법행위를 엄격하게 단속하고 규율을 세우게 함으로써 정치활동에 대한 부당한 간섭과 개입의 빌미를 사전에 막고 외부의 불순한 침투와 방해공작을 차단하기 위한 자율적 통제장치로서 司法委員制와 警察委員制를 채택하였다. 독립협회는 3월 13일의 통상회 결의에 따라 3월 20일 통상회에서 부칙 33조를 심의·확정했으며 그 해당조항에 의거하여 안영수·강화석·홍긍섭 3인을 사법위원으로, 양홍묵을 서기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거주지별로 5署 관내에 각기 5명씩 경찰위원을 배정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다음 통상회에서 이를 望定하기로 결정을 보았던 것이다.0639)≪독립신문≫, 1898년 3월 22일, 잡보. 여기에 적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사법위원은 “슈다 회원 즁에 혹 슈신을 잘못 야 죄과에 범여 졈 회즁을 흐릴가 염녀야…회원 즁에 범과 이를 증벌기” 위한 제도였으며 경찰위원은 회원들을 거주지별로 조직화하고 규율화하기 위한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9월 하순부터는 3주간에 걸쳐서 회원들의 신상명세서를 성명-본관-연령과 거주지 署-坊-洞-統-戶로 나누어 작성·제출하게0640)≪독립신문≫, 1898년 9월 29일부터 10월 7일까지 7회에 걸쳐서 게재한 광고내용 참조. 한 것도 회원들에 대한 효과적인 관리와 규율화를 도모하기 위한 노력의 일단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곧바로 발생한 하나의 사건은 이러한 독립협회의 자율적 통제장치를 신속하게 가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사이 정치활동에 열심이었던 정교가 그를 경무청에서 체포하려는 기미를 알고 도피하자, 독립협회는 3월 26일 특별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앞당겨 택정된 경찰위원들로 하여금 그의 소재를 파악하게 한 다음, 그의 죄가 있고 없음을 정당하게 가리기 위한 재판을 사법위원들이 법사에 요청하도록 결의하였기 때문이다.0641)≪독립신문≫, 1898년 3월 29일 잡보. 독립협회가 김병원·김재풍·김중환·김홍륙·민종묵·신기선·심상훈·심순택·안경수·윤용선·윤효정·이유인·이인우·이완용·이충구 등에 대한 黜會와 탄핵을 결행하였고 조병갑의 입회를 거부(9월 11일 통상회)했으며 사법위원들을 원고로 삼아 이용익·신기선·이인우에 대한 처벌주장을 겸하여 형사재판을 청구했던 사실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자율적 통제와 규율화를 보강하기 위하여 사찰위원제 또한 겸해서 활용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밖에도 보는 이에 따라서는 지회문제를 짚어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독립협회는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조직을 결성하고 지회설립을 알려왔을 때 소극적으로 동의하는 경우(공주·평양)도 없지는 않았으나, 8월 하순 대구에서 지회설립 인가를 요청해 왔을 때만 하더라도 폐단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불허 방침0642)≪독립신문≫, 1898년 8월 27일, 잡보.을 고수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각 지방으로부터의 인가요구는 줄기차게 계속되었기 때문에 결국 9월20일에는 대구에,0643)≪독립신문≫, 1898년 9월 23일, 잡보<협회 확쟝>. 그리고 이어서 선천·의주에 차례로 인가해 주었고, 10월 11일에는 강계·북청·목포에도 인가해 주게 되었다.0644)≪독립신문≫, 1898년 10월 12일, 잡보<지회인가>. 이 때까지 모두 8개의 지회를 인가한 셈이 되었다. 이처럼 지회설립에 수동적이었던 독립협회가 적극적인 자세로 바뀌어서 지회인가조례와 지회세칙을 본격적으로 마련하기 시작했던 것은 강제로 해산당했다가 일시적으로 회생의 길이 열렸었던 12월 초순경의 일이었다. 따라서 지회가 정치활동기의 독립협회의 조직과 운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직접적인 연결고리로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