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2. 독립협회의 조직과 운영
  • 2) 정치활동전개기의 조직과 운영
  • (3) 정치활동의 변동 추이와 국가의 대응

(3) 정치활동의 변동 추이와 국가의 대응

 독립협회가 정치활동을 전개하기에 유리했던 환경조건의 주요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1896년에 등장한 이래 직·간접으로 그 영향과 자극을 받고 많은 시민단체들과 언론매체들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시민단체이건 언론매체이건 간에 거의가 계몽운동의 색채를 강하게 들어내고 있었고 따라서 시민사회적 속성으로서는 제한적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독립협회의 정치활동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친화적이고 동조적인 배경을 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정치활동에 나설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준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初期 光武政權’으로 압축되는 국가의 背理的·矛盾的 운영구조에서 연유되었던 것임을 지나칠 수 없다. 광무정권이 고종을 정점으로 하여 다른 어느 때 보다도 국가의 자주성을 강조했고 거기에 걸맞는 형식적 조건에 집착했었던 사실은 俄館으로부터의 還御에 뒤이었던 획기적인 稱帝·建元의 시행이 잘 말해 준다. 그러나 광무 元年의 국정운영이 실제로는 이러한 외형적인 지향과는 역행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음은 앞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舊本新參’의 개혁을 구호처럼 외쳤고 따라서 근대문물의 외형적인 수용은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들어내기도 했지만 번번이 갑오경장의 근대적 제도개혁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국정운영의 실상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이와 같이 광무정권의 국정운영에서 빚어진 주관과 객관 또는 외형과 내용의 불일치에서 파생되는 배리와 모순은 독립협회가 정부를 비판하거나 규탄하고 나서는 동기가 되었다. 따라서 독립협회의 정치활동도 국가와의 상호대응이라는 동적인 역학관계 속에서 단계적인 이해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먼저 그 첫 단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국상소의 기본논리에 대한 이해를 앞세울 필요가 있다. 독립협회는 국가의 존재이유(raison d'étre)가 “스스로 서서 다른 나라에 의지하지 아니 하는 데 있음(自立而不依於他國)”을 들어, 외세의 내정 간섭과 자주권 침해를 물리쳐야 할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스스로 닦아서 政事와 法度를 온 나라에 행하는 데 있음(自修而行政法於一國)”을 들어, 옛법은 폐지하여 행하지 않고 새 법은 있으나 지키지 않으니 없는 것과 같은 무규범적 상황을 적극적으로 타개하여 나가야 할 당위성도 아울러 역설하였다. 결국 “안으로는 정해진 典章과 법도를 실천준행”하고 “밖으로는 타국에 의지함이 없게”하는 것, 즉 ‘自立’과 ‘自修’ 또는 ‘自主’와 ‘民權’의 실천적 과제를 국가 존립기반의 불가분의 두 軸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독립협회의 정치활동은 일차적으로 국정운영에서 부정적으로 드러난 이 두 측면의 문제들에 집중되었던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독립협회는 문제의식의 핵심적인 대상으로 부각되었던 정치적 현안에 대한 문제의 소재와 해결방향을 상소를 통하여 원론적으로 제기한 다음, 국정을 그르친 해당 정부기관에 문책성 공개질의서를 발송하여 조속한 시정과 대책수립을 촉구하고 나섰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가두연설과 민중대회(만민공동회) 또는 집단시위와 같은 대중동원방법을 병행하는 대정부 압박전략을 감행함으로써, 국정현안에 대한 민중의 집단적 감시와 통제의 효과를 제고시키게 되었다. 이처럼 독립협회는 자주와 기본인권의 영역에서 정부가 자행한 그릇된 국정수행에 사안별로 대응하여 비판과 감시와 견제의 압박전략을 구사했던 반면에, 국가는 조심스러운 경계와 포섭의 전략으로 거기에 대응하였기 때문에 정면충돌을 피하는 방향에서 해결책이 강구될 수 있었다. 그 결과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금지시키고, 한로은행의 문을 닫게 했으며, 러시아 재정고문과 군사교련관을 해고시켜서 돌려보내고, 목포·증남포의 러시아기지화를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피고인에 대한 부정재판 또는 범법자에 대한 압력의 수단으로 공직을 악용하여 부당하게 개인의 가산을 늑탈하려고 했던 고등재판소 재판장(이유인)과 경무사(신석희)의 불순한 시도를 막음으로써 개인의 재산권 보호에 앞장섰다. 또한 정 교도 같은 무고로 피신한 바 있었지만 이원긍·여규형·지석영·안기중 등을 경무청에 감금했다가 정당한 재판절차 없이 유배형을 내린 사건에 대하여 경무사와 법부대신을 상대로 벌였던 투쟁은 신체와 생명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의 일단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광무정권의 그릇된 국정운영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모순의 진원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은 안으로부터 침략외세와 결탁하여 대외적 굴종을 심화시키고 힘없는 민중의 기본권 침해를 능사로 삼았던 부패한 봉건적 집권관리들의 존재였다. 따라서 독립협회가 제2단계에서는 그 동안 추구해왔던 反侵略적 자주와 反封建적 진보(민권)의 방향성에 비추어 근대적 질서를 정착시키기 위한 전제로서 봉건관리에 대한 규탄을 새로운 투쟁방향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물론 이 단계에서도 외인부대의 傭兵과 구미열강에 대한 경제이권의 양도와 같은 문제들이 제기되었을 때나 毒茶進御사건을 계기로 이미 폐지되었던 連坐法과 孥戮法을 부활시켜 인권을 억압하는 도구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나타났을 때, 거기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의 방향에서 전진적으로 제기하게 되었던 것이 부패관리의 교체문제였다.

 따라서 독립협회는 ‘민의’에 따라 정부대신의 들어오고 나감을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던 7월 11일의 시폐상소를 계기로 고급관리의 탄핵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추가하게 되었다. 독립협회는 그간의 정부에 대한 민중통제의 경험을 살려, 그들에 대한 파괴공작을 펴다가 저항에 부딪쳤던 의정부참정 조병식과 보조화폐의 濫鑄로 물의를 일으킨 전환국장 이용익에 대한 문책을 제기하여 그들을 물러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때부터 독립협회에 대한 국가의 대응전략은 분열공작과 행동통제 작전으로 변화를 드러내고 있었다. 숨겨졌던 죄상이 폭로되면서 이용익에 대한 형사처벌론이 대두되자 평의회를 회유하고 이간시키는 분열공작이 자행되었으며 최정식의 과격발언이 ‘語逼至尊’으로 왜곡되면서 그것을 빌미로 독립협회의 성내집회를 원천 봉쇄하려는 전략이 시도되었다. 국가의 이와 같은 대응전략의 변화로, 형사재판을 통하여 이용익을 형사처벌하게 하려던 독립협회의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으며 독다진어사건과 관련하여 전개한 7대신에 대한 탄핵도 당초의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관리임면에 모아졌던 이와 같은 독립협회의 정치활동이 왕권을 위협하는 처사로 위험시하는 사고의 거부반응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정책수행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고 나섰던 제1단계에서 보다는 사실상 봉건적 집권세력의 개편을 시도했었던 제2단계에서의 정치활동이 진일보한 것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국가가 경계와 포섭의 전략으로 대응했던 제1단계에서는 정면충돌이 표면화되지 않았으나, 일방적으로 끌려가기를 거부하고 분열공작과 원천봉쇄작전을 감행했던 제2단계에서는 마주 압박전략을 펴는 대결국면으로 진입하는 것이 시간문제인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독립협회는 지금까지 추구했던 비제도적 통제의 한계와 함께 맞대결국면을 벗어나기 위한 방향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게되었다. 제3단계에서 드러난 시민적 참정구조의 제도화 모색이 그것이었다. 독립협회가 정치적 현안문제에 대한 정부와의 공동타결의 필요성을 앞세워 10월 15일에 개최했던 官民連席會議의 자리에서 연립내각구성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 그 첫 시도였다. 이것은 官民공동회의 ‘獻議六條’라는 국민발안 형식의 입법통제에 대한 합의유도와 군주의 재가로 이어졌으며, 더 나아가서는 議會형태로 중추원을 개편하여 독립협회 회원들이 민선의관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적극화되었다. 정당의 존재가 공인되지 않았던 정치제도 테두리 밖에서 기존의 중추원제도를 계승적으로 변용시키는 방향에서 유사의회제적 입헌군주제를 지향하였고 스스로 민선의관의 단독구성을 통하여 의회에 터잡는 근대정당으로서의 제도적 기반을 확보함으로써 입헌체제의 정착을 도모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것은 물론 독립협회가 국민 直選의 下院설립을 시기상조로 보면서 공론기관으로서의 자의식과 독점적인 국민대표의식을 앞세워 자기중심적으로 上院의 議會像을 구축한 것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런데도 보수적인 재야지도자측으로 부터의 부정적 반발을 감수해야만 할 상황이었다. 더욱이 집권세력의 교체를 요구했던 시폐상소 이후 최정식의 실언사건을 계기로 그 동안 큰 제한없이 누려왔던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수시로 위협받는 상황 밑에서 추진되었다. 말하자면 그간의 추세로 보았을 때 독립협회의 정치활동이 참정구조의 제도화 방향으로 다시 한 단계 질적인 전진을 이룩함에 따라서 국가의 압박전략은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한계상황이 더욱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을 때 역사적인 중추원 민선의관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이 최종단계에서 국가가 선택한 대응전략도 가장 극단적인 것이었다. 독립협회에 대한 정치활동 영역으로부터의 완전한 배제와 탄압의 전략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국가의 대응전략은 민선의관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던 11월 5일 이른 아침에 독립협회의 결사 자체가 지배권력에 의하여 부정당하는 사태로 표면화되었다. 이 때문에 그 동안 독립협회와 행동노선을 같이해 왔던 민중세력은 별개 조직의 만민공동회를 개설하고 독립협회가 누려 온 결사의 자유를 되찾아 주기 위한 투쟁에 나섰으며 군주는 이들의 거센 압력에 못 이겨 잠정적으로 비정치적인 활동에 국한한다는 조건하에서 독립협회의 復設을 허락했다. 그러나 군주가 끝내는 외세와 결탁한 봉건세력의 편에 서게 되었고 독립협회도 이를 극복할 만한 새로운 대응전략을 개발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독립협회가 정치활동의 개시와 더불어 법질서를 자기규율화시키는 제도적 장치의 보강을 통하여 급진적인 행동성향에 제동을 가하고 단체규율의 일탈행위에 대한 통제력 강화에 힘썼던 것은 조직을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데도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활동이 격화될수록 대중행동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짐으로써 독립협회의 단체규율과 대중행동에 대한 통제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조직의 안전한 유지를 위하여 설정한 합법적 투쟁방식은 조직의 존립을 근원적으로 위협하는 극한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자기논리와 행동원리를 새롭게 구축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韓興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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