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는 경제면에 있어서 조선의 전통적인 농업 중심의 경제체제를 근대적인 상공업 중심의 경제체제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상업적 농업의 발달, 전국적인 장시의 발달과 공장제 수공업의 발생 등 자본주의의 맹아적 형태가 나타났다. 그러나 세도정치로 인한 정치적 혼란속에서 국가경제의 기간인 전정·군정·환곡의 삼정이 문란해져 농촌경제가 파괴되고 농민생활이 피폐해 갔다. 일찍이 실학자 柳馨遠·李瀷·丁若鏞 등은 경제문제의 해결책으로 농민의 균등한 토지소유를 이상으로 하는 均田制·限田制·閭田制 등의 토지개혁론을 구상하였으며, 실학자 중 徐有榘·李圭景 등 현실적 개혁론자들은 소작지의 균분에 의한 均等耕作論을 제기하였다.0766)金泳鎬,<實學思想의 勃興>(≪한국사≫ 14, 국사편찬위원회, 1975), 142∼143쪽.
개화인사들은 대체로 실학자 중 현실적 개혁론자들의 토지균등경작론에 의하여 그리고 조세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경제문제를 해결코자 하였다.0767)개화이론가 유길준은 실학자의 ‘均田之意’는 ‘仁政之本’이지만, 현실적으로 지주소유지의 박탈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토지의 균등분배는 농민의 요행심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소작제도의 개선과 세제의 개선을 통하여 농촌문제를 해결코자 하였다. 갑신정변 주도자들은 개혁요강 14조 중에 地租法의 개혁을 명문화하였고, 갑오개혁 추진자들도 홍범 14조 중에 “인민의 出稅는 모두 법령에 의해서 率을 정하고, 멋대로 명목을 붙이거나 함부로 징수하지 않는다”고 하여 조세제도의 개혁을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립협회도 관민협상에서 정부에 제시한 건의안 중 제1조에서 “法律所定以外 濫加名目之雜稅 一切革罷事”0768)鄭 喬,≪大韓季年史≫上, 262쪽.라 하였고, 관민공동회의 헌의 6조 중에 “전국 재정은 無論某稅하고 탁지부로 句管하되 他部와 私會社는 無得干涉할 것”0769)≪皇城新聞≫, 1898년 11월 1일,<독립협회 발간의 獻議六條>.을 규정하였다. 이것은 조세법률주의와 무명잡세의 금지 그리고 조세 관할기관의 일원화를 통하여 국가의 경제체제를 개선하여 민생을 보호하려는 조세제도 개혁론이었다.
독립협회는 조세제도 개혁론과 더불어 산업구조 개편론을 제기하였다. 조선 사회는 전통적으로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末業으로 천시하여 그 산업구조는 농업 일변도로 되어 있었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서양 각국이 발달된 제조업의 토대 위에서 생산된 제품을 판매하여 부강국이 되었음을 지적하고, 동방 각국도 서양의 방식을 모방하여 부강을 꾀해야 한다0770)≪大朝鮮獨立協會會報≫10, 1897년 4월 15일,<紡織機械說>.고 했듯이, 조선의 산업구조도 상업 특히 공업의 발전 위에서 개편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들은 공업에 기초한 상업 발전뿐만 아니라 농업 개량도 공업적인 방법을 적용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공업적 농업발전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0771)≪大朝鮮獨立協會會報≫7, 1897년 2월 28일,<東方各國이 西國工藝를 倣効하는 總說이라>. 이처럼 상공업을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산업발전을 조선 경제발전의 모델로 삼은 독립협회 회원들은, 조선의 산업별 인구 비율도 농업 편중에서 벗어나 적어도 농업 50%, 상공업 30%, 기타 관직과 지식인 직종 20% 정도의 근대적인 산업구조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0772)≪독립신문≫, 1897년 6월 1일, 논설.
독립협회는 공업 발전을 위하여 근대적 공장제공업론을 제기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증기기관과 기계를 이용하면, 노동력과 생산시간이 절감되며, 제품의 품질이 향상되고 가격이 저렴하게 되어, 수공에 의한 것보다 훨씬 이익이 있다고 하여, 조선도 서양 각국처럼 수공업을 공장제공업으로 전환할 것을 강조하였다.0773)≪大朝鮮獨立協會會報≫7, 1897년 2월 28일,<格致論>. 그들은 증기기관과 기계를 도입하여 방직공업·철공업·목재공업·제지공업·유리공업·피혁공업 등을 육성하려 하였는데, 그중 방직공업을 특히 중요시하였다. 그 이유는 방직공업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업종이었는데, 영국과 일본의 면직물이 국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기계제 방직공장을 건설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한편 영국의 산업혁명이 면방직공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조선도 영국식의 산업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0774)愼鏞廈, 앞의 책, 231쪽.
독립협회는 국가경제의 발전에 있어 공장제공업론과 더불어 국제무역 확대론을 제기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당시 조선에서 옷·기름·성냥·사기그릇 등 외제 생활필수품이 범람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고, 조선 인민들이 상품을 제조하고 상무에 힘쓰지 않으면 가난과 외국의 간섭을 면할 수 없다고 하여 상공업부국론을 폈다.0775)≪독립신문≫, 1897년 8월 7일, 논설. 그리고 그들은 국내에 공업을 일으켜 수입품을 대체하고, 견직물·마직물·한지·인삼·목재·해산물 등의 품목을 개발하여 수출을 증대함으로써 무역 역조를 시정해야 한다는 무역부국론을 폈다.0776)愼鏞廈, 앞의 책, 240쪽.
나아가 독립협회 회원들은 조선의 근대적 경제건설을 위하여 근대적 공장제공업론과 더불어 공업원료로서 금·은·동·철·석탄 등 지하자원을 개발하여 국부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는 광산개발론을 폈다.0777)≪독립신문≫, 1898년 1월 29일, 잡보 및 5월 31일, 잡보. 그리고 그들은 근대적인 회사와 은행의 설립,0778)尹致昊,≪尹致昊日記≫5, 1897년 12월 14·20일.
≪독립신문≫, 1898년 2월 17일, 논설. 도량형의 통일,0779)≪독립신문≫, 1896년 12월 10일, 논설 및 1898년 9월 16일,<승두척평>. 금은본위 화폐제도의 확립,0780)≪독립신문≫, 1897년 10월 30일, 잡보 및 1898년 7월 12일,<동전으로 은전 몰아낸다>. 과학기술의 연구와 교육,0781)≪大朝鮮獨立協會會報≫7, 1897년 2월 28일,<方各國이 西國工藝를 倣効하는 總說이라>. 근대적 교통시설의 마련0782)≪독립신문≫, 1896년 5월 9일·11월 7일, 논설 및 1897년 8월 31일, 논설.
≪大朝鮮獨立協會會報≫16, 1897년 7월 15일,<創鐵道路宜先使民人咸知利益說>. 등을 산업 발전에 있어 불가결의 요소라고 인식하였다.
이와 같은 독립협회의 경제발전론은 농업 위주의 전통적 봉건경제체제를 상공업이 주도하는 근대적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전환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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