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1. 독립의식의 계발
  • 1) 독립기념물의 건립

1) 독립기념물의 건립

 독립협회가 창립된 1896년 7월 2일부터 독립협회의 구국운동선언 이전인 1898년 2월 20일까지의 시기에 독립협회는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 등 독립기념물 건립을 통하여 국민 대중에게 독립의지와 애국정신을 고취하였고, 신문·잡지·강연회·토론회 등을 통하여 국민 대중을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사상으로 계몽하였다.

 徐載弼은 1895년 12월 26일 귀국하자 얼마 후, 우리 나라가 노예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완전히 자주독립국이 되었다는 상징으로 迎恩門0827)영은문은 慕華館 앞에 세웠던 一脚門으로 1895년 2월에 김홍집내각에 의해 이미 철거되었다.이 서 있던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립할 것을 구상하여 이를 정부와 뜻있는 인사들에게 제의하였다. 이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가임을 외국사람뿐만 아니라 조선사람 자신들조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였으므로 상징적인 기념물을 만들어 주지시키려는 것이었다. 독립문 건립의 제의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독립공원을 조성하자는 서재필의 제안을 수용한 다음 이 사업을 적극적·공개적으로 추진할 목적으로 고종의 재가를 받아 냈다.

 독립문과 독립공원 건립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1896년 6월 20일 경부터 시작되었다. 새로 독립문을 세운다는 일은 단순히 전통적인 청에 대한 의존 관념을 청산하자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때의 독립문 건립의 추진자들은 다만 중국의 영향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일본·러시아 및 그 밖의 모든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독립문을 세우려 하였다.0828)愼鏞廈,≪獨立協會硏究≫(일조각, 1976), 251쪽.
The Independent, 1896년 6월 20일, Editorial.

 한편 독립문의 건립, 독립공원의 조성 등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내외의 압력에 직면한 정부측의 상징 조작적 의미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외압과 내부로부터 분출되는 요구에 직면한 정부측 대책의 한 형태로 상징물의 조성을 통한 자주독립 의식의 환기를 위해 독립협회의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 등의 독립기념물 조성을 후원하였다.0829)李玟源,<대한제국의 개혁과 그 실태 -정부와 독립협회의 황권인식과 관련하여->(≪한국민족운동사연구≫9, 이문사, 1994), 6쪽.
―――,<대한제국의 성립과 광무개혁-독립협회에 대한 연구성과와 과제->(≪한국사론≫25, 국사편찬위원회, 1995), 282쪽.

 독립문 건설의 취지는 다음과 같았다.

그 문 이름은 독립문이라 하고 새로 문을 그 자리에다 세우는 뜻은 세계 만국에 조선이 자주 독립국이란 표를 보이자는 뜻이요⋯남의 나라에서는 승전을 한다든지 국가에 큰 경사가 있다든지 하면 그 자리에 높은 문을 짓는다든지 비를 세우는 풍속이라. 그 문과 그 비를 보고 인민이 자기 나라의 권리와 명예와 영광과 위엄을 생각하고 더 튼튼히 길러 후생들이 이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자는 뜻이요 또 외국 사람들에게 그 나라 인민의 애국하는 마음을 보이자는 표라(≪독립신문≫, 1896년 6월 20일, 논설).

 독립문 건립의 추진자들은 이 민족적 사업을 이루기 위해 협회를 창립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창립초부터 1897년 8월 토론회가 개최되기 전까지의 시기에는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건립사업과 독립문 건립 모금운동이 독립협회 활동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 기간에는 독립협회의 조직도 창립초의 고급관료의 주도하에 있었다.

 독립협회의 창립 총회에서는 전문 21개조 된<독립협회 규칙>을 제정하여 공포하고, 임원을 선출하였다. 독립협회는 그 창립의 목적이 독립문·독립공원의 건립이었으므로<독립협회 규칙>제2조에 “독립협회에서는 獨立門과 獨立公園을 건설하는 사무를 管掌할 事”라고 하여 그 목적을 명시하였다.0830)≪大朝鮮獨立協會會報≫ 1, 1896년 11월 30일,<독립협회규칙>.

 독립협회는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건립을 백성들의 성금으로 추진하였다. 독립협회는 창립 즉시<獨立協會輪告>를 채택하여 독립문 등의 건립 사업에의 적극적 참여를 호소하였다.0831)≪大朝鮮獨立協會會報≫1, 1896년 11월 30일,<독립협회윤고>.≪독립신문≫은 7월 4일자 논설을 통해 독립협회의 창립목적을 널리 선전하여 국민의 동참을 호소하였으며, 기부자 명단을 신문에 게재함으로써 협회의 사업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발기 위원들은 창립과 동시에 전국민 앞에 솔선수범하기 위해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 건립기금으로 510원의 보조금을 거두어 헌납하였다. 초기에는 협회 임원진과 일부 현직관료들의 보조금이 주류를 이루었다.

 보조금 모집의 획기적인 전기는 왕실이 왕태자의 명의로 7월 20일경 1천 원을 하사하면서 마련되었다. 이는 고종 자신이 스스로 재가해 준 독립문 건립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더욱이 왕실이 거액의 보조금을 납부했다는 사실은 일반 국민과 외국인, 그리고 현직관료들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內部는 지방국장 金重煥의 명의로 公札을 각도 관찰사에게 보내어, 각 지방의 관찰사 이하 각 지방관들로 하여금 보조금 모집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0832)韓哲昊,≪1880∼90년대 친미개화파의 개혁활동 연구 -정동파를 중심으로-≫(翰林大 博士學位論文, 1996), 131∼132쪽.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 건립을 위한 독립협회의 창립사업은 각계 각층으로부터 즉각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다. 그것은 자주독립에 대한 민중의 열망이 팽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조금을 모으는 데 있어서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얻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은,≪독립신문≫과≪大朝鮮獨立協會會報≫등 정기간행물을 통한 선전적인 효과도 간과할 수 없다.0833)韓興壽,<獨立協會의 政治集團化過程>(≪사회과학논집≫3, 延世大, 1970) 참조.

 독립협회는 헌금표에 독립협회에의 가입의사를 표시하면 회원으로 입회시켰다. 그 결과 보조금 헌납자는 거의 전원이 독립협회 회원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입회를 완전히 개방하여 누구든지 임의로 가입 신청만 내면 입회허가를 해주었으므로 회원수는 급속히 증가되었다.

 독립협회는 보조금 모집과 동시에 독립문·독립공원의 건립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회의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개최되었으며, 그 장소는 漢城府 觀平閣을 주로 이용하였다. 1896년 7월 19일에는 독립문의 설계가 의논되었으며, 8월 1일의 정기회의에서는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의 건설 순서와 기한 등이 논의되어 독립문부터 기공하기로 합의를 보았다.0834)≪漢城新報≫, 1896년 7월 24일·8월 3일,<獨立協會委員會>.

 그리하여 8월 31일에 독립협회 회장 安駉壽, 군부대신 李允用, 협판 閔泳綺, 협회 위원인 농상협판 李采淵, 법부협판 權在衡과 모든 간사원들은 모화관에 나가서 독립문을 세울 터와 독립공원을 만들 땅 등을 보고 독립문 건립 등에 소요되는 예산안과 추진계획을 마련하였다.0835)≪獨立新聞≫, 1896년 9월 3일, 잡보. 이를 토대로 9월 6일 독립협회의 회장 안경수는 고문 서재필과 총비용 3,825원에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계약을 맺었다.0836)鄭 喬,≪大韓季年史≫上(국사편찬위원회, 1971), 146쪽.

 11월 9일에는 독립협회 회원들이 한성부에 모여서 독립문 定礎式을 11월 21일 오후 2시 30분에 갖기로 결정하여,0837)鄭 喬,≪大韓季年史≫上, 151쪽. 14일에 總代委員 李完用·이채연·권재형의 명의로 청첩장을 사회 각계 각층에 발송하였다.0838)金永羲,≪佐翁尹致昊先生略傳≫(基督敎朝鮮監理會總理院, 1934), 124쪽. 그리고 11월 21일 토요일 오후 2시 30분에 성대한 독립문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이 날의 정초식에는 무려 5∼6천 명의 내외 귀빈이 참석하였으며, 독립협회 회원들 뿐 아니라, 정부의 각부 대신들, 각 학교 학도들, 각국의 공사·영사와 외국인들도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독립문이 완공된 것은 정초한 지 만 1년 후인 1897년 11월이었다. 독립문 준공식 석상에서 서재필은 “우리는 이제부터 옛날 종노릇하던 표적을 없애 버리고 정말 실질적 독립을 소원한다는 표로 이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니, 우리 국민 일반은 이 점을 잘 생각하고 우리 나라 독립·자주를 위하여 더욱 분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0839)金道泰,≪徐載弼博士自敍傳≫(을유문화사, 1972), 235쪽.

 그 동안 각계 각층의 국민들은 1897년 8월까지 14개월간 5,897원 19전 2리의 보조금을 헌납하였다.0840)≪大朝鮮獨立協會會報≫1호에서 17호까지 수록된 금액을 집계한 것이다(韓興壽, 앞의 글, 28∼29쪽). 독립협회는 이 헌금을 독립문 건립뿐만 아니라, 독립공원과 독립관 건립에도 사용하였으므로 비용이 부족하여, 독립문 완공 후에 다시 국민들의 보조금을 받아서 이를 완결지었다.

 이렇게 하여 건립된 독립문은 19세기말 독립협회의 자주민권 자강운동의 한 기념물로 그 시대의 국가의 독립과 평등을 위한 상징이었으며 이 시대의 실질적인 독립을 희구하는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독립문은 서재필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형으로 하여 축소해서 기본 구상을 하고 독일공사관에 근무하는 스위스인 기사에 의해 설계되었다.0841)金道泰, 앞의 책, 234쪽 참조.≪韓國彙報≫(Korean Repository) 1898년 8월호에 의하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Sabatin)이 설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독립문 건립을 직접 담당한 서재필이 자서전에서 “다른 책에서 사바틴이 설계를 하였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단정하기에 여기서는 서재필의 말에 따른다. 건축은 한국인 기사 沈宜碩이 담당하였다. 심의석은 당시 유명한 건축기사로서 독립협회의 발기인이 되어 간사원에도 선출되었다. 石工은 한국인 고급기술자들이 담당하고, 役事는 주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였다.0842)愼鏞廈, 앞의 책, 255쪽.

 독립문은 높이가 14.28m, 너비 11.48m로 한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축조되었다. 독립문 내부 왼쪽에는 지붕 위로 올라가는 돌층계가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독립문의 남쪽 현판석에는 국문으로 ‘독립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고, 독립문의 북쪽 현판석에는 한자로 ‘獨立門’이라고 새겨 넣었다. 그리고 독립문이라는 글씨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서재필은 독립문·독립공원과 함께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이라 이름하고 독립협회의 집회장소로 사용키로 하였다. 모화관은 문자 그대로 ‘中華를 숭상’하기 위한 건물로서 명·청 양대 동안 저들의 사신이 오게 되면 이 집에서 下馬宴이라 하여 최초의 환영연을 베풀고, 다시 그들이 출국할 때에는 上馬宴이라 하여 송별연을 극진히 베풀어주던 영빈관으로 사용하여 오던 事大의 상징적 건물이었다. 그런데 갑오경장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아 방치되어 있었다.

 독립관 개수에도 역시 막대한 경비가 들어 약 2천 원이 소요되었으며, 1897년 5월 23일 그 개수작업이 완료되었다. 독립관 개수가 완공되자 독립협회는 황태자가 국문으로 친서한 독립관의 현판식을 거행하고,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회원들이 독립관에 모여서 강연회를 갖기로 하였다.0843)愼鏞廈, 위의 책, 252∼261쪽 참조.

 한편 독립공원도 건설되었다. 독립문과 독립관 일대는 공터였으므로 이 지역에 나무를 심어 공원으로 꾸며서 독립문과 독립관을 보존하고자 하였다. 1896년 7월 4일≪독립신문≫논설에 “조선 인민이 양생을 하려면 맑은 공기를 마셔야 할 터이요, 경치 좋고 정한 데서 운동도 하여야 할지라. 모화관에 새로 독립문을 짓고 그 안을 공원지로 꾸며 천추만세에 자주독립한 공원지라고 전할 뜻이라”하여 독립공원 건립의 취지를 전하였다. 원래 독립공원은 운동을 위한 운동장과 시민의 산보와 휴식을 위한 휴식처, 그리고 강연을 듣는 강연장소 등 셋으로 나누어 만들려는 포괄적인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설하고 남은 기금이 부족하여 원래의 계획대로는 진행되지 못하고 우선 휴게소만이 건설되었으나,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공원이 건립되었다.0844)愼鏞廈, 위의 책, 259쪽. 독립공원은 독립문·독립관과 함께 대한제국시기 자주독립운동의 상징적 기념물이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과 같은 독립기념물의 건립을 국민 각계 각층의 성금으로 이룸으로써, 자주독립의식을 국민들에게 고취시키고 각성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 독립기념물 건립사업을 통해 애국적인 민중들을 회원으로 입회시켜 독립협회를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기념물을 건립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자주독립의 중요성과 독립의지를 일깨워 주었고 대외적으로 한국인의 자주독립을 공포하고 과시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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