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1. 독립의식의 계발
  • 2) 신문·잡지의 간행

2) 신문·잡지의 간행

 독립협회는 新聞과 會報를 통하여 민중계몽에 힘썼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은 1895년 12월 26일 귀국하였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은 박정양내각과 합작으로≪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독립신문≫은 독립협회 결성의 모체이고 그 사상적·정치적 입장의 대변지로서 협회의 정식적 기관지는 아니었지만 사실상의 기관지 역할을 하여 민중 계몽을 위해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서재필은 원래 신문을 간행할 목적으로 귀국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귀국한 지 20여 일이 지나 1896년 1월 19일경 실권이 없는 중추원 고문직을 수락하면서 김홍집내각의 협조 아래 신문을 간행키로 계획하였던 것이다.0845)李光麟,<서재필의「독립신문」간행에 대하여>(≪한국개화사상연구≫, 一潮閣, 1979), 167쪽. 그가 신문을 간행하게 된 동기는 그의 수기≪滯美五十年≫중에 “민중교육의 의미로 신문을 발간하여 정부가 하는 일을 民庶가 알게 하고 다른 나라들이 조선 때문에 무엇을 하고 있나를 일깨워 주는 일이나 하여 보겠다고 하였다”는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0846)민태원,≪갑신정변과 김옥균≫(국제문화협회, 1947) 중의 부록<회고갑신정변>.

 당시 김홍집내각도 그들의 개혁정책을 국민에게 알려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매체를 가질 필요성을 느꼈다.

 이같이 서재필과 김홍집내각의 구상이 일치하여 서재필과 내부대신 兪吉濬은 1896년 1월 19일경에 3월 1일부터 신문을 발행하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김홍집내각은 신문 창간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서재필에게 월 300원을 지급하면서 그를 10년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유길준은 서재필에게 정부예산에서 창간비용 4,400원의 지출승인서를 건네주었다. 그러나≪독립신문≫의 창간계획은 당시 내각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일본측의 방해공작으로 좌절될 위험에 빠졌다. 그런데 얼마 후 俄館播遷이 일어나 김홍집내각이 붕괴하고 일본의 내정간섭과 영향력이 배제됨으로써 사태는 급전되었다.

 아관파천 뒤 구성되었던 박정양내각도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박정양내각은 아관파천 후≪漢城新報≫0847)1895년 창간된≪한성신보≫는 일본인들이 서울에서 발간하던 신문이었다.의 왜곡보도와 한국정부에 대한 공격에 대항할 한국인의 신문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태였으므로 김홍집내각의 신문 창간사업을 계속시킬 필요가 있었다.0848)愼鏞廈, 앞의 책, 14쪽. 박정양내각은≪한성신보≫1896년 2월 18일자에 아관파천을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한 사건을 계기로 신문 창간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2월 21일 외부대신 이완용은 일본공사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에게 공한을 보내어 앞으로≪한성신보≫의 보도에 신중을 기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0849)≪駐韓日本公使館記錄≫4(國史編纂委員會, 1988),<外部往來 二>, 1896년 2월 21일, 照會 第7號 日人經營 新聞記事의 無禮 指彈과 以後 報道의 愼重 要求. 박정양내각은 자신들의 신문 발행계획을 잘 이해하고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적임자로서 서재필을 발탁하여 신문의 간행계획을 실현시키려 하였다.0850)韓哲昊, 앞의 책, 117∼119쪽.

 박정양내각은 김홍집내각과 서재필이 합의했던 사항들을 그대로 재승인하여 정부예산에서 신문 창간비용으로 3,000원과 서재필의 개인 생계비와 가옥임대를 위하여 1,400원을 지출하였다. 서재필은 이 자금으로 일본 오오사카(大阪)에서 인쇄기 등을 구입하여 정동에 있는 정부 소유의 건물을 신문사 사옥으로 빌려 독립신문사를 설립하였다.0851)이광린은 창간 초기의 인쇄는 배재학당내에 있던 감리교 선교부의 三文出版社(Trilingual Press)의 시설을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李光麟, 앞의 책, 173∼174쪽).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는 독립신문사를 서재필의 개인 소유로 등록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 이유는 박정양 등이 미국의 신문들은 정부의 허가를 받는 민간지였으며, 또한 일본 외무성의 지원을 받는≪한성신보≫도 민간지 형태를 취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0852)韓哲昊, 앞의 책, 120쪽.

 이렇게 하여≪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호를 내어 1899년 12월 4일 폐간될 때까지 19세기말의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같이≪독립신문≫은 김홍집내각과 서재필의 합작으로 출발하여 아관파천 후 박정양내각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박정양내각과 서재필의 합작으로 간행되었다.

 ≪독립신문≫은 창간사의 서두에서 신문의 不偏不黨을 말하고 보도를 공정히 하여 민족을 위한 대변자의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정부의 시책을 대중에게 전달하며, 동시에 민의를 반영하여 국가 정치에도 도움이 되게 하겠다는 발간취지를 밝혔다.

 박정양내각은≪독립신문≫이 창간된 이후에도 여러 가지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테면 농상공부는≪독립신문≫의 발행을 공식적으로 허가해 줌으로써 관보와 동일한 제2종 우편물로 값싸게 우송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그리고 1896년 3월 11일에 서재필을 신문담당관서인 농상공부의 고문직을 겸하도록 배려하여 신문간행에 필요한 준비작업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학부에서는 각급 학교의 생도들에게 신문을 구독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내부에서는 각 지방 관청에 신문을 구입토록 명하였다. 그리고 궁내부도≪독립신문≫120부를 부내의 勅·奏·判官에게 구독시키고 그 대금을 매월 15일에 거두어 주라는 훈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신문은 가로 22cm, 세로 33cm의 타블로이드판 크기로 3段制를 채택하여 4면으로 발행하였다. 창간 당시 1면에는 광고(오늘날의 社告 형태의 알림)·논설을, 2면에는 관보·외국통신·잡보를, 3면에는 물가·우체시간표·제물포 윤선출발표·광고 등을 실었다. 그리고 4면에는 영문으로 논설을 비롯하여 국내의 정치활동 등을 소개하였다. 국문판의 모든 기사를 순한글로 펴내어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그 당시 순한글로 신문을 간행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영문판 The Independent는 사설(editorial), 국내 잡보(local items), 관보(government gazette), 최신 전보(latest telegrams), 국내외 뉴스 요약(digest of domestic and foreign news), 통신(communications), 의견 교환(exchanges) 등으로 구분하여 편집하였다.0853)愼鏞廈, 앞의 책, 27쪽.
―――,≪한국근대사회의 구조와 변동≫(일조각, 1994), 171쪽.

 ≪독립신문≫은 1896년 첫 해에는 주 3회, 둘째 해에는 격일간, 셋째 해에는 일간으로 간행되었다. 1897년 1월 1일부터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The Independent는 4면의 독립된 신문으로 간행되었다. 그러니까≪독립신문≫과 The Independent라는 두 개의 신문이 간행된 셈이다. 영문판과 국문판의 내용이 같은 것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아 다르다. 특히 논설의 경우가 그러하였는데 독자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0854)李光麟,<서재필의 사상>(≪개화기연구≫, 일조각, 1994), 103쪽. 한글판도 그러했지만, 영문판도 서재필이 논설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사를 직접 썼다.

 한글판은 1898년 7월 1일부터 일간으로 나왔으나 영문판≪독립신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1주에 3회(화·목·토) 간행되었다.

 ≪독립신문≫의 한글판과 함께 영문판이 발간되자 가장 좋아했던 사람들은 당시 한국에 있었던 외국인이었다. 그들은 한국에 거주하면서도 한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랐다. 그저 소문을 통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독립신문≫의 영문판 발간 소식을 듣자 즉각 환영의 뜻을 나타내었다.0855)李光麟, 위의 책, 104쪽.

 한편 영문판≪독립신문≫은 당시 조선에 관심을 가졌던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사정과 상황을 최대한으로 알리면서 조선의 참모습을 제대로 이해시키는 구실을 훌륭히 수행했다. 영문판≪독립신문≫은 조선을 외국에 알리는 중요한 창구이자 통로였다고 할 수 있다.0856)김유원,<근대언론의 전개>(≪새로 쓰는 한국언론사≫, 아침, 1993), 93쪽.

 ≪독립신문≫의 발행부수는 창간호가 2천 부였다. 이 창간호 2천 부가 불티나게 팔려서 금방 3천 부로 늘리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다.0857)The Independent, 1896년 4월 9일, Local items 참조. 그런데≪서재필박사자서전≫에서 ≪독립신문≫의 창간호 발행부수가 3백 부였고, 그 후 5백 부로 늘어났다가 마침내 3천 부까지 됐다는 서재필의 회상은 부정확한 기억에서 비롯된 잘못으로 보인다(김유원, 위의 글, 108∼109쪽 참조). 한 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히었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실제 독자층은 발행부수보다 훨씬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창간호 2천 부의 발행이 가능했던 것은 이미≪한성순보≫·≪한성주보≫의 발행부수가 3천 부 정도였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신문독자는 확고하게 그 저변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판매는 정기 구독자에게는 배달제도와 우송제도를 병행하였다. 또한 서울에서는 가판제도도 실시하였다.

 ≪독립신문≫은 창간 때부터 1899년 12월 4일 폐간될 때까지 4단계를 거쳐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0858)愼鏞廈, 앞의 책(1994), 171∼173쪽.
―――, 앞의 책(1976), 40∼44쪽.

 제1기는 1896년 4월 7일 창간부터 그 해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립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의 신문 논조는 국민계몽을 주로 하였으므로 정부에 대해서도 매우 협조적이었다. 이 시기에 큰 문제로 대두되었던 의병을 회유하는 데도 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였다.

 서재필은≪독립신문≫의 창간 및 운영과정에서 박정양내각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독립신문≫을 통해 정동파내각을 적극 옹호·지지해주었다. 그리고≪독립신문≫은 아관파천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으며, 파천 이후 러시아의 대조선정책 및 러시아공사 베베르(Karl I. Waeber, 韋貝)에 대해서 우호적인 논평을 내렸다.

 ≪독립신문≫은 조선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외국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세력균형을 도모해야 된다는 중립외교론을 주장하면서, 아관파천 기간동안 현실적으로는 박정양내각을 후원해 주었던 미국과 러시아에 우호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반면 일본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미·러 양국에 의한 이권침탈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0859)그렇지만 적어도 아관파천 기간 중 미국과 러시아가 조선의 내정에 가능한 한 간섭을 자제하고 개혁지향적인 정동파내각에 대한 직간접적인 후원을 해주었던 사실에 비추어≪독립신문≫의 반일적이고 친미·친러적인 태도는 나름대로 정확한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에 기반을 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한철호, 앞의 책, 147∼149쪽 참조). 그런데≪독립신문≫의 친러적인 태도는 환궁을 전환점으로 하여 전과는 상반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최덕수,<독립협회의 정체론과 외교론 연구>,≪한국근대정치사연구≫, 사계절, 1985, 325∼327쪽).

 제2기는 1896년 7월 4일부터 1898년 5월 11일까지로 독립협회의 창립 이후부터 서재필이 출국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독립협회가 전개한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건립운동을 지원하고 독립협회 회원과 국민의 계몽에 주력하였다.

 ≪독립신문≫의 논조는 1897년 봄부터 러시아를 강하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897년 8월부터 러시아가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보내어 내정간섭을 자행하고 각종 이권을 침탈하자 이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이에 저항하였다.

 ≪독립신문≫이 열강세력의 한국 침탈을 폭로하고 정부 고위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자 러시아측과 친러파들은 서재필의 추방을 획책하게 되었다. 정부는 1897년 12월 13일자로 주한 미국공사 알렌(Horae N. Allen, 安連)에게 조회하여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임할 것을 통고하였다.0860)서재필은 1895년 말 귀국 전에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하였다. 정부가 서재필의 중추원 고문직을 해고하겠다고 통보한 것은 서재필의 활동을 제한하고 그가 한국에서 떠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서재필은 정부의 중추원 고문 해임통고에 대해 정부와 1896년 1월에 체결한 10년 기간 가운데 지금까지 받은 월봉 외에 남은 기간의 급료와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일시에 지급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서재필과 대한제국정부 사이의 교섭은 미국공사 알렌의 주선으로 1898년 4월 25일에 타결되었다. 정부가 서재필과 10년 기한으로 계약한 기간 가운데 남은 7년 10개월분의 봉급은 28,200원이었고 여기에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 600원을 합치면 28,800원이었다. 정부는 이 가운데≪독립신문≫을 창간할 당시 서재필에게 지급하였던 4,400원을 공제한 24,400원을 지급하여 서재필은 1898년 5월 14일 용산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거쳐 미국으로 떠났다.0861)鄭晋錫,≪한국언론사≫(나남, 1992), 162쪽.

 제3기는 1898년 5월 12일부터 1898년 12월 30일까지로 尹致昊가 주필이 된 이후부터 독립협회가 해산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자주민권 자강운동을 지원하고 독립협회의 주장을 대변하면서 민중을 지도 계몽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제4기는 1899년 1월 1일부터 1899년 12월 4일까지로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부터 신문이 폐간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윤치호가 서울을 떠나게 되자 주필은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맡다가 1899년 6월 1일부터는 엠벌리(H. Emberly)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독립신문≫의 내용과 표현방식은 온건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부 시책에 대한 비판보다는 국민의 교육과 계몽에 보다 주력하게 되었다.

 정부는≪독립신문≫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1899년 7월 18일 독립신문사의 사옥 반환을 요구하여 왔다. 정부가 노린 것은 사옥 반환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구실로 한≪독립신문≫의 매수였다. 외부대신이 1899년 11월 27일자로 독립신문사 사옥의 반환을 재촉하자 미국공사 알렌은 정부와 서재필 사이에서 독립신문사 매수에 대한 중개를 알선하였다. 그 결과 서재필의 동의를 얻어 알렌은 외부대신에게 12월 4일자의 회답 공한에서 독립신문사의 사옥과 함께 인쇄시설 일체를 1899년 12월 24일자로 정부에 일금 4천 원으로 양도하겠다고 회답하였다. 이리하여 독립신문사는 1899년 12월 4일에 마지막 호를 내고 문을 닫게 되었다.

 ≪독립신문≫은 정부와 개화파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다음과 같이 폭 넓은 계몽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첫째,≪독립신문≫은 ‘인민의 개명진보’를 위하여 지대한 계몽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둘째, 자주독립과 국가 이익의 수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셋째, 국민주권사상과 민주주의사상을 보급하고 민권을 신장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넷째, 한글전용을 실시하여 민족언어와 문자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다섯째, 당시 만연되어 있던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을 고발하였다. 여섯째,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창간되어 국민에게 신문의 사회적 역할과 그 중요성을 알게 하고 여론과 공론을 형성하여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방법을 확립하였으며, 한말 신문과 출판 문화의 발흥을 촉진하였다. 일곱째, 한국인들에게 세계 사정을 알게 하고 국제 정세의 변동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인식하게 하였으며, 세계 각국의 문물을 소개하여 한국인의 시야를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여덟째, 영문판 The Independent는 당시의 한국 사정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세계에 알리고 한국인의 의사와 주장을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홉째, 독립협회의 창립을 위한 사상적 준비작업을 하고, 독립협회의 창립 후에는 독립협회의 사상의 형성과 독립협회의 자주민권 자강운동의 전개에 공헌을 하였다. 열째, 1898년의 만민공동회의 운동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0862)愼鏞廈, 앞의 책(1976), 45∼54쪽.
鄭晋錫, 위의 책, 161쪽.

 이같이≪독립신문≫이 창간된 이래 19세기말의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수행한 계몽적 역할은 실로 지대하였다.

 독립협회 임원들은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립하는 사업을 벌이는 한편, 1896년 10월 19일에 이르러서는 기관지로서 회보를 발간키로 결의하였다.0863)≪大朝鮮獨立協會會報≫1,<독립협회윤고>. 그리하여≪大朝鮮獨立協會會報≫라는 제호로 1896년 11월 30일 창간호를 내었다. 이에 독립협회는 대중매체를 독자적으로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독립신문≫의 경우, 독립협회가 사실상의 기관지로 활용할 수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발행의 주체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와는 달리 회보의 경우는 독립협회가 직접 그 발행자로서 독립협회는 대중매체를 적극적으로 관리·장악할 수 있는 위치를 굳혔다.

 협회는 회보의 정기간행을 통하여 독립협회의 ‘愛國愛民之旨’와 ‘有質有文之義’을 표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0864)韓興壽,<大朝鮮獨立協會會報 解題>(≪大朝鮮獨立協會會報≫1, 아세아문화사, 1978), ⅵ∼ⅶ쪽. 즉 독립협회는 자주독립으로 표방되는 근대적인 민족주의와 과학문명 및 진보의 관념을 동력화하여 한국사회의 근대화를 추진시킬 수 있도록 그것을 대중매체를 통하여 사회 일반에게 보급·확산시키려는 데 회보발간의 목적이 있었다고 하겠다.0865)韓興壽,<독립협회 회보의 내용분석>(≪사회과학논집≫6, 延世大, 1973), 21쪽.

 회보는 표지를 포함해서 지면이 13여 장 내외밖에 안 되는 소책자였다. 출판은 독립신문사에서 담당하였으며 매달 15일과 말일에 두 차례 발간되었다. 한 권에 10錢씩 하는 매호의 발행부수는 약 1,000부였다. 회보에는 계몽 논설, 회원 기고, 세계 중요 사건 요약, 각국 사정, 독립협회 소식 등의 내용을 두루 실었다.

 ≪대조선독립협회회보≫는 4·6판과 국판의 중간크기인 반월간 잡지로서, 우리 나라 최초의 정기 간행 잡지이다. 이보다 앞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잡지로는 1895년에 渡日한 관비유학생들의≪親睦會會報≫를 들 수는 있다. 국판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1896년 2월 15일에 창간호가 나오고 1898년 4월 9일의 제6호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는데 체제뿐만 아니라 창간시기도≪대조선독립협회회보≫보다 앞섰지만 국외인 일본에서 그것도 부정기적으로 발행되었기 때문에 최초의 정기간행 잡지의 위치는≪대조선독립협회회보≫가 차지하게 된다.

 ≪대조선독립협회회보≫가 몇 호까지 발행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지금까지 18호까지는 발견되었다. 1897년 11월에 무리해서라도 제19호를 발간하지 않았다면 회보는 통권 18호로 그치고 말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회보가 만 1년을 넘기지 못하고 20호 미만으로 그친 것은 적자가 누적된 데다 독립문의 완공을 앞두고 미지급된 건축비의 지급이 선결문제로 대두되어 극도의 재정적 핍박을 받게 된 점과 1897년 8월말부터 독립협회의 토론회가 시작되면서 독립협회의 성격이 달라진 점과 관계가 있었다.0866)韓興壽, 앞의 글(1978), ⅶ∼ⅸ쪽.
주진오,<독립협회운동>(≪한국사≫11, 한길사, 1995), 232∼233쪽.

 한국 정기간행 잡지의 효시라는 사실과 관련하여≪대조선독립협회회보≫는

 몇 가지의 특징을 갖는다.

 첫째, 독립협회가 잡지의 발간주체로 등장했던 만큼 자연스럽게 회보라는 명칭이 사용되긴 했지만, 고정된 의미의 회원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국민대중을 포용하는 적극성을 띠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잡지의 구독자로서만이 아니라 기고자로서도 폭넓게 참여하도록 유도함으로써 회원들과 전국 동포가 함께 만드는 잡지상을 부각시키기에 힘썼다. 회보라는 이름의 기관지이면서도 소속 회원들에 국한되는 내용보다는 국민적 이익에 관심을 더 기울여 개화기잡지의 성격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둘째, 대중적 취향의 당연한 귀결로서 계몽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회보의 문자사용에 있어서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타협과 조화를 시도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회보는 이상지향형의 한글에 더하여 현실적응형의 국·한문혼용체와 전통적인 재래답습형의 한문전용체를 병용하였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호를 거듭할수록 이상지향형에서 현실적응형으로, 현실적응형에서 재래답습형으로 기울어진 면이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주의의 현실적 遊離를 절감하고 전통문화의 바탕 위에서 근대적인 지식과 사상을 수용·매개하려는, 사회적 현실의 조화로도 이해된다.0867)韓興壽, 위의 글, ⅸ∼ⅹ쪽.

 이와 같이≪독립신문≫과≪대조선독립협회회보≫는 민중을 근대지식과 민족의식으로 계몽하여 독립협회의 민중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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