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1. 만민공동회의 활동
  • 6) 김덕구 만민장 시위와 만민공동회의 재개

6) 김덕구 만민장 시위와 만민공동회의 재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황제 친유 직후의 시위운동 해산기간을 활용하여 독립협회·만민공동회와 시민들의 공고한 연대를 다지기 위해서, 지난 11월 21일 황국협회와 맨주먹으로 투쟁하다가 죽은 신기료장수(구두 수선공) 金德九의 장례를 12월 1일(음력 10월 8일) 萬民葬으로 성대하게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가 김덕구의 만민장을 결정한 것은 김덕구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개혁운동을 지지하여 순국했으므로 그의 공적을 기리고, 그 위에 ①비록 신기료장수인 평민일지라도 애국과 충의를 위해 순국하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그를 ‘義士’로 추대하여 거국적으로 추모하며, ②독립협회·만민공동회와 일반 시민이 단결했음을 과시함으로써 수구세력·황국협회세력을 위압하고, ③시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여 신흥 애국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김덕구 만민장은 의식으로서만이 아니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운동의 일환으로 준비되고 진행된 것이었다.

 만민공동회 회원들은 1898년 12월 1일 오전 9시에 일반 시민과 함께 수만 명이 모여 김덕구의 초빈처인 숭례문(남대문) 밖 10리허에 있는 西署 雙龍井으로 가서 비단옷으로 개렴하고 입관한 다음, 장례식 장소인 숭례문 밖 蓮池로 향하여 운구를 시작하였다.1179)鄭 喬,≪大韓季年史≫上, 362쪽.

 김덕구 만민장은 쌍용정으로부터 연지까지의 운구에서부터 벌써 시위의 성격을 띠어갔다. 상여 앞에는 ‘大韓帝國義士 金公德九之柩’라고 대서한 명정을 높이 들고, 상여 뒤에는 김씨의 부인이 소교를 타고 뒤따랐으며, 다시 그 뒤로는 각 학교와 각 동리의 기호를 높이 세우고 시민들과 학도들이 뒤를 따랐다. 이미 이 시각부터 수많은 시민들과 청소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길을 메웠으며, 외국인들도 이 특이한 만민공동회 장례식을 보려고 거리로 나왔다. 일개 평민의 장례식을 보려고 수도 서울 장안의 대규모 시민들이 이렇게 모인 장관은 동양 각국 만고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덕구의 운구가 장례식 처소인 숭례문 밖 연지에 당도하자, 천막을 높이 치고 그 밑에 영구를 안치한 다음 오후 1시부터 路祭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먼저 영어학교 학생들이 명문장으로 된 제문을 지어 읽었다.1180)≪독립신문≫, 1898년 12월 3일, 잡보<로제축문>.

 다음에는 찬양회의 부인회원들이 또한 제물을 성대하게 준비하여 노제를 지내었다.1181)≪제국신문≫, 1898년 12월 3일, 잡보. 그 다음에는 私立興化學校 교사들이 제물을 성대하게 준비하고 제문을 지어 노제를 지내었다.1182)鄭 喬,≪大韓季年史≫上, 362∼363쪽. 그 다음에는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찬미가를 불러서 많은 시민들을 감동케 하였다. 노제를 다 지내고 停柩所에서 떠나 남단 앞 갈월리 山地로 향하는데, 상여 뒤에는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찬양회 부인들이 동행하여 광채가 더욱 찬란하였다.1183)The Independent, December 3, 1898, A Remarkable Funeral.

 이날 도로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김덕구 만민장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또한 남대문 밖 이문골에 사는 소년들이 子童義士會라는 어린이단체를 조직하여 김덕구 만민장에 참석해서 애국연설을 하여 장례식에 모인 만민공동회 회원들과 시민들 수만 명을 감동케 하였다.

 하관 시간이 당도하자 예정대로 안장하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회원들이 정성껏 성대하게 준비한 제물을 차려 평토제를 지내었다. 평토제의 축문은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이 독립협회·만민공동회·시민들을 대표하여 지어 읽었다.1184)≪獨立新聞≫, 1898년 12월 5일, 잡보<평토제 축문>.

 고영근이 축문을 읽을 때 여기에 참석한 독립협회·만민공동회 회원들과 시민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만민들은 김씨의 묘 앞에다 ‘大韓帝國義士 金公德九之碑’라고 새긴 묘비를 세우고, 사무위원 5인을 선정하여 山役을 마치도록 위임한 후 돌아왔다.1185)≪독립신문≫, 1898년 12월 2일, 잡보<의사장례>.

 만민공동회의 김덕구 만민장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김덕구 만민장에 참가한 시민들은 애국심이 고양되고 단결·연대의식이 강화되어 독립협회·만민공동회 회원들이 되었다. 김덕구 만민장을 참관·구경한 시민들은 이 장엄한 장례식을 보고 애국심이 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지지세력이 되었다.

 또한 김덕구 만민장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공격하며 행패를 부리던 황국협회의 일부 회원들까지도 감동시켜, 그들로 하여금 민회(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편에 서게 만들었다.≪독립신문≫도 김덕구 만민장의 이러한 영향을 사례를 들면서 보도하였다.1186)≪독립신문≫, 1898년 12월 6일, 잡보<의리있는 부상>.

 실제로 김덕구 만민장 거행 후 황국협회 일반 회원들이 이를 보고 동요하여, 황국협회 임시회장 길영수와 황국협회 회원들 사이에 분규가 일어났으며, 황국협회 출신 중추원 의관들이 사임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1187)≪독립신문≫, 1898년 12월 6일, 잡보<의관사직>.

 독립협회는 김덕구 만민장의 성공 여세를 활용하여 황국협회를 무력화시키고 보부상들을 포섭하여 독립협회에 동조시키려고 하였다.

 전국 각지방으로부터는 김덕구 만민장의 소식을 듣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대한 성원과 의연금이 쇄도하여, 독립협회·만민공동회 회원들의 사기를 더욱 고양시켰다.

 그러나 수구파들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상승하는 기세를 누르고 수구파들을 진출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암약하였다.

 황제와 수구파들은 의정부 참정 박정양, 외부대신 민영환, 법부대신 한규설, 농상공부대신 권재형 등 개혁파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대신들을 12월 2일자로 해임하였다. 황제는 행정부를 재조직하면서 민영환을 참정으로, 박정양을 농상공부대신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수구파 대신으로서 군부대신에 심상훈, 탁지부대신에 민영기, 외부대신에 박제순, 학부대신에 김명규, 내부대신 서리에 李允用 등을 진출시켰다.1188)≪承政院日記≫, 광무 2년 음력 10월 21일, 詔.

 황제의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대한 친유 약속은 실행되지 않고, 도리어 수구파가 역습의 기회를 노리어 암약하고 있음이 뚜렷이 들어나기 시작하였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는 11월 26일의 황제 친유 이후 10일간의 기다림을 보니 황제가 약속한 국정개혁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보부상패들도 완전히 해산시키지 않았으며, 도리어 황제와 수구파가 내밀히 결합하여 만민공동회가 규탄해오던 민영기·심상훈·김명규·박제순·이윤용 등을 재중용한 것을 보고 매우 실망하게 되었다.

 만민공동회는 이것이 황제와 수구파의 본격적인 반격의 시작이라고 판단하고, 1898년 12월 6일 오후에 다시 종로에 모여 급진파의 주도하에 만민공동회를 재개하였다.1189)尹致昊,≪尹致昊日記≫5, 1898년 12월 27일.

 황제 친유로 인하여 11월 26일 일단 해산했다가, 만 10일후인 12월 6일 만민공동회가 재개되어 다시 직접 국정개혁운동을 계속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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