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3.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의 역사적 의의
  • 1)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의 실패 원인

1)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의 실패 원인

 19세기말 열강의 침략이 강화되어 가는 추세속에서 대한제국의 국정 전반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자주 부강한 立憲代議國家를 건설하여 자주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만들려던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은, 장기적으로는 한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역사적 의의가 큰 운동이 되었지만, 단기적으로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당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1272)姜萬吉,<大韓帝國의 性格>(≪創作과 批評≫ 48, 創作과批評社, 1978).
姜在彦,<獨立新聞·獨立協會·萬民共同會>(≪朝鮮史硏究會論文集≫9, 1972).
宋炳基,<光武改革硏究>(≪史學志≫ 10, 檀國大史學會, 1976).
愼鏞廈,<獨立協會의 社會思想>(≪韓國史硏究≫9, 1973).
―――,<獨立協會의 自主民權自强運動>(≪獨立協會의 民族運動硏究≫, 서울大 韓國文化硏究院, 1974).
―――,<光武改革論의 問題點>(≪創作과 批評≫ 49, 創作과批評社, 1978).
―――,<獨立協會의 議會主義思想과 議會設立運動>(≪李海英敎授追念論文集≫, 서울大 社會科學硏究所, 1985).
柳永烈,<獨立協會의 民權思想硏究>(≪史學硏究≫22, 1973).
千寬宇,<獨立協會의 國會開設運動>(≪韓國史의 再發見≫, 一潮閣, 1975).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의 실패 원인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특히 지적될 수 있다.

 첫째, 황제 및 수구파세력과 러시아 및 일본 등 외세의 야합에 의한 무력탄압을 들 수 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은 국정 전반의 대개혁을 추구했기 때문에 수구파세력과는 정치적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정치체제 개혁운동은 전제군주제를 立憲代議君主制로 개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제군주인 고종황제의 이해에는 일치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황제 고종은 전제군주권을 잃지 않기 위해 독립협회 개혁파보다는 친러 수구파에 의존하려 하였다. 그러나 개항 후 수많은 격변을 겪는 동안에 언제나 승세나 대세에 편승하는 것이 안전함을 터득한 고종은 입헌대의군주제로의 개혁이 대세가 되면 그것까지도 받아들일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 점은 황제 고종이 만민공동회의 강력한 운동에 부딪혀 그가 가장 싫어하는 박영효가 추천되었을 때에도 만민공동회를 무마하기 위해 박영효를 소환 기용해서 개혁정책 채택을 생각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1273)鄭 喬,≪大韓季年史≫上(國史編纂委員會, 1957), 392쪽. 따라서 당시 수구파를 압도할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던 독립협회·만민공동회로서는 수구파와 외세가 결탁하여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대항하지 않으면 승리하여 대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외세가 황제 및 수구파와 결탁하여 적대 행동을 한다면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러시아는 대한제국내에 뿌리가 약했고 이미 ‘아관파천’ 후에 수구파와 결탁하여 ‘친러 수구파’를 형성한 것을 독립협회가 압도했으므로 예견된 것이었지만, 새로이 일본세력이 수구파와 결탁하여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적대 행동을 한다면 이것은 힘겨운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독립협회가 궁극적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항할 독립세력이며 저항세력이라고 보고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여 이를 붕괴시키려고 기도하였다. 특히 만민공동회가 대두하여 독립협회가 큰 대중적 기반을 갖게 되자 일본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내심 매우 두려워해서 이들의 와해 기회를 노리었다.1274)朴殷植,≪韓國痛史≫(≪朴殷植全書≫上, 檀國大 東洋學硏究所, 1975), 182쪽. 일본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1898년 12월 초 일본에 휴가 중일 때≪The Japan Daily Mail≫紙가 가토의 주장을 보도했는데, 그는 “한국의 독립은 이름뿐이니, 서구열강이 간여하기 전에, 그리고 보부상과 독립파와 왕당파들이 서로 목을 자르는 것을 그치고 독립파에 의해 한국이 부강해지기 전에, 일본은 너무 늦기 전에 어떤 목적을 달성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1275)The Japan Daily Mail, December 6, 1898, Japan and Korea.
≪駐韓美國公使館報告≫(Communications to the Secretary of State from U.S. Represeutative in Korea:H. N. Allen), 문서번호 167, 1898년 12월 23일.

 일본 전권공사 가토는 이러한 입장에서 비밀훈령을 받고 서울에 귀임하자 1898년 12월 15일과 18일에 두 차례나 고종을 알현해서 군대 동원에 의한 만민공동회 탄압을 적극 권고한 것이었다.1276)≪駐韓日本公使館記錄≫8(國史編纂委員會, 1989),<機密本省往信>, 1898년 12월 10일, 機密 第54號 事變에 關한 一次謁見의 件 및 1898년 12월 13일, 機密 第56號 韓帝 謁見始末 및 敦化門 親臨의 件.
鄭 喬,≪大韓季年史≫上, 390쪽.
또한 일본 전권공사는 1898년 12월 하순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독립협회 일부 급진파에게는 황제가 가장 싫어하는 박영효를 소환 기용하도록 공작적인 차원에서 적극 권고하고, 고종에게는 군대 동원에 의한 무력 탄압을 적극 권고하여, 황제 및 수구파와 결탁해서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을 실패케 하는 데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1277)鄭 喬,≪大韓季年史≫上, 390·393쪽.

 둘째,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지도자들의 지도력의 부족을 실패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들의 지도력의 빈곤은 가장 박력있는 선각적 개화파 인사들이 갑신정변 때 전멸하다시피 된 사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지도자들은 교육자적 자질이 더 많은 사람들이었으며, 상대적으로 나약했고, 또 갑신정변 때의 교훈에 집착하여 민중보다 앞서서 권력에 파고들거나 정권을 장악하려는 적극적 노력을 잘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만민공동회운동의 영향으로 11월 하순∼12월 중순까지에는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몇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흘려 보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이 고조되었을 때에는 민중이 앞장서고 지도자들이 이에 끌려 다니는 형편이었다.

 셋째, 독립협회·만민공동회내의 소수 과격파·급진파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 그 운동의 실패를 촉진하는 하나의 요인을 조성하였다.

 주로 1898년 11월부터의 만민공동회 투쟁과정에서 뚜렷하게 두각을 나타낸 과격파·급진파 청년들은 독립협회 지도자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자주 독자행동을 전개했으며, 마침내는 중추원에서 박영효를 천거하고 만민공동회에서 이를 추인받는 모험적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1278)The Independent, December 27, 1898, Molayo's Reports. 그러나 당시의 조건에서 박영효 천거는 너무 당돌하고 모험적 행동이었다. 결국 이것 때문에 만민공동회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가 크게 약화되고, 황제와 수구파에게 탄압당하는 구실을 제공하게 되었다.1279)尹致昊,≪尹致昊日記≫ 5(國史編纂委員會, 1975), 1898년 12월 29일. 특히 ‘박영효 천거’에는 박영효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독립협회·만민공동회 붕괴를 목적으로 한 일본측 공작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고려하면, 급진파들이 매우 경솔했음을 알 수 있다.1280)尹致昊, 위의 책, 1898년 12월 27일.

 뿐만 아니라 급진파들은 독립협회의 궁극적 목표였으나 당시 시기상조라고 판단되어 공식 논의를 삼가하게 되어있던 ‘共和制’를 너무 자주 논의함으로써 수구파들의 모함과 황제의 의혹을 사게 했으며, 황제 고종의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대한 탄압에 구실을 제공하였다. 일찍이 朴殷植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실패의 주요 원인의 하나를 너무 급진적인 곳에서 찾았다.1281)朴殷植,≪韓國痛史≫, 182∼183쪽. 또한 급진파의 일원이었던≪獨立協會沿歷略≫의 저자도 “너무 과격하던 余 등 13인으로 하여 우리 청년동지가 일반에게 많은 피해를 당하게 한 죄과를 지금와서 느끼는 바이다”1282)≪獨立協會沿歷略≫중의<獨立協會>.라고 하여 급진파의 잘못을 시인하였다.

 넷째, 운동을 ‘도시’ 중심으로 전개하고, 농민층 속으로 파고들려는 활동 부족이 실패의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는 주로 대도시에서 도시민들의 자발적 참가에 의존했을 뿐, 적극적으로 지방 민중 속으로 파고드는 노력이 부족하였다. 특히 지방에서 강대한 잠재적 세력을 갖고 있던 농민층을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참가시키고 농민층의 지지를 획득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였다. 이 사실은 독립협회가 지방지회를 조직하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지방지회를 조직하려 하지 않고 지방 도시에서 자발적으로 지회 조직의 청원이 있을 때라야 비교적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서 이를 허가한 사실이라든지, 인구가 3,000명 이상의 지방 ‘소도시’에만 이를 허가한 사실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1283)≪독립신문≫, 1898년 12월 15일, 잡보<본회답장·지회인가조례·지회세칙>참조. 이 때문에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은 서울과 지방의 소도시 중심이 되고, 주로 시민층과 도시지식인 중심의 운동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며, 농민층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지지하는 ‘지지층’이 되었을 뿐이지 적극적인 ‘참가층’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독립협회가 전국에 걸쳐서 적극성을 띠고 체계적으로 지방지회를 조직하기 시작한 것은 12월 13일부터인데, 이것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가 강제해산 당하기 12일 전이어서 너무 늦은 것이었다. 만일 독립협회가 적극적으로 1898년 봄이나 늦어도 여름에 지방지회 조직을 체계적으로 완료하고 강화하여 지방에서의 독립협회 참가층을 확대했더라면 사태의 양상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다.

 수구파들이 지방에서의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세력을 걱정하지 않고 서둘러 전국 지방의 보부상들과 수구세력을 서울로 일거에 불러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지방 농민층에 독립협회·만민공동회 세력을 양성해 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운동은 지나치게 도시에 편향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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