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1. 대한제국의 성립 배경
  • 2) 조선의 위기와 정부의 대응

2) 조선의 위기와 정부의 대응

 시노모세키조약에서 청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이 부인된 것 자체는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외적 조건이었다. 그러나 청국의 구속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조선이 명실상부하게 자주독립국이 되었다면 구태여 그같은 조치를 취한다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를 추진한 배경에는 별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본과 러시아의 압제, 그리고 고종의 거듭된 신변위기로 인해 형성된 조야의 국권과 군권의 확립에 대한 절실한 열망이었다.

 청일전쟁의 결과는 조선이 청국의 간섭을 벗어나게 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을 더 위기에 빠뜨리는 심각한 문제가 목전에 다가왔다. 조선을 지배하려는 일본의 목표 때문이었다. 전쟁 초기부터 고종이나 대원군, 대신들 모두는 서울을 장악한 일본군의 인질로 전락하였다. 혹여 조선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집단과 인물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보복이 가해졌다.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초토화 작전이었고,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1895. 10. 8)의 만행이다.010)朴宗根著·朴英宰譯,≪淸日戰爭과 朝鮮≫(一潮閣, 1988).
李玟源,<閔妃弑害의 背景과 構圖>(崔文衡外,≪明成皇后弑害事件≫, 民音社, 1992).

 얼마 후 조선은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에 의해 가까스로 위기를 피하였지만 이후로도 어려움은 지속되었다.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일간에 세력균형이 유지되는 가운데 조선의 국권은 일본과 러시아 양국에 의해 급속히 실추되어 갔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하여 한국에 관해 3차에 걸쳐 체결된 러·일간의 협정(베베르-小村覺書, 로바노프-山縣議定書, 로젠-西協定)이 무엇보다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러·일 양국간에는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이 형성되어 대외적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이들 협정의 조문에 보이듯 고종의 신변보장 문제나 정부대신들의 인사문제, 나아가 군사와 재정권 등이 모두 양국의 견제 하에 표류하고 있었던 것이다.011)李玟源,≪俄館播遷 前後의 韓露關係 1895∼1898≫(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4).

 이렇게 일본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가하는 압제는 고종과 정부측이 안고 있던 가장 큰 부담이었다. 그 외에도 산발적으로 야기되고 있던 국내 각 집단의 반정부·반개화운동 등도 정부측에는 큰 부담이었다. 일례로 유생과 농민층은 외압 하에 있던 정부대신이나 지방에 파견된 관료들을 외세의 앞잡이로 보고 적대행동을 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반면 정부는 이들을 ‘폭도’로 보았고, 때로는 외압에 의해서 군사와 경찰을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였다. 외압에 대해 공동대처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국의 군민들끼리 출혈을 보이던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적절한 대응을 하기란 기대난망이었다. 군사·재정적 기반은 무너져 가는 데다 관료조직은 와해되어,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국제정세가 어떻게 움직여지는지 한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안팎의 압력에 직면하면서 고종과 정부는 ‘以夷制夷’식의 다변외교와 이권양여를 통한 외원모색, ‘상징(물)의 조성’을 통한 자주독립 의식의 환기, 언론 및 집회의 지원을 통한 국권의식 고취와 배외운동 등으로 대책을 수립해 갔다. 여기에는 관료와 재야의 신지식인, 도시민 등 고종과 정부의 입장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던 집단의 호응이 따랐다.012)李玟源, 앞의 글(1994).

 그러나 외교적 대응은 기회균등을 요구하는 각국의 압력에 의해서 기대했던 성과는커녕 손실만 커 갔다. 각국 모두가 막강한 무력과 경제력, 정보력을 바탕으로 내정개입을 해 오는 상황에서, 군사력과 경제력이 거의 뒷받침되지 않은 채 ‘도덕적 차원’의 외교만으로 소기의 성과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밖으로 고립무원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본 것이 있었다.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 등을 건립하거나≪독립신문≫과 독립협회 등을 통해 세계의 흐름과 정세를 알리고, 국권의 자주와 나라의 독립에 대한 관료와 일반의 의식을 환기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 국권의식의 고취에 중요한 목적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아관파천 수개월 뒤에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한 고종의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오늘 국왕이 서대문 밖 영은문 터에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정했다는 사실을 경하한다.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구주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The Independent, 1896년 6월 20일, 논설).

 요컨대 독립문은 청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룬 것을 상징하는 기념물일 뿐만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 등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자는 의미의 기념물이었다.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도 넓게 보면 이들과 맥락이 같다.013)Vipan Chandra, Imperialism, Resistance, and Reform in late Nineteenth Century Korea:Enlightment and the Independence Club,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1988, pp.15∼16. 청일전쟁 이후 청국세력의 철수, 그 이후 한반도 주변에 조성되어간 러·일간의 세력균형과 러·일 공동의 조선에 대한 압제, 그리고 국권의 자주에 대한 관민의 인식의 확대는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의 중요한 내외적 배경이었다. 고종과 정부측으로서는 청일전쟁·아관파천·환궁을 거치면서 청국·일본·러시아의 일방적 구속을 벗어나 잠시 운신의 폭이 넓어진 상황에서 택한 조치였다.

 거듭 강조하지만, 거기에는 몇 가지 목적이 함께 있었다. 첫째는 중국에 대한 사대종속 관념을 탈피하자는 것, 둘째는 청일전쟁 이후 더욱 실추된 군주의 권위와 권력을 회복시키자는 것, 셋째는 일본과 러시아 등 모든 외국의 간섭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갈망이 그것이다. 환언하면 국가적 위기에 대응하여 군주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추락한 나라의 자존심도 복구하고 무너져 가는 국가체제도 강화하자는 것이었다.014)李玟源, 앞의 글(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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