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3. 대한제국의 성립과 열국의 반응
  • 2) 열국의 승인

2) 열국의 승인

 국제법상 한 나라의 성립 자체는 선포로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므로 대한제국의 성립 여부는 사실상 다른 나라의 승인 여부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 자체는 나라의 체면을 높이자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었다. 그런 만큼 고종과 정부로서도 각국의 호의적 관심과 승인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 서울 주재 각국 대표에게 이를 알려 본국정부의 승인 여부를 회답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러므로 각국 정부도 어떠한 형태로든 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각국 대표의 솔직한 반응은 대체로 냉담하였다.043)각국의 반응 부분은 일·영·미·러·프·청·독 등 각국의 자료가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어 혼란스럽다. 이 중 미·청·영측의 기록은 대체로 일치하고, 일·러·프측 기록은 앞뒤 모순되는 부분이 적지 않아 주의를 요한다. 알렌(Horace N. Allen)의 보고에 의하면 이러하다.

일본측은 전에 이 조치를 주장하였지만, 근래에는 반대하여 온 것으로 안다. 러시아측은 전에 이에 반대하였지만, 이제 그 반대를 철회하였음이 틀림없다. 독일과 영국 대표는 이를 반기지 않고 있다(Allen to Sherman, No. 14, Seoul, Oct. 5, 1897, DUSMK).

 황제즉위식 참석 여부를 놓고 서울주재 각국 외교대표들간에 갑론을박이 있었던 것이나, 각국 정부가 이의 승인 여부를 놓고 즉각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다소간 뜸을 들인 것도 이같은 입장과 무관하지 않았다.044)Allen to Sherman, No. 18, Seoul, Oct. 14, 1897, DUSMK. 이러한 반응을 보인 원인은 대한제국 선포 자체가 각국으로서는 그다지 달가울 것이 없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국이 모든 주변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 싶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서구 각국의 외교관들은 대한제국의 선포를 ‘1루불의 가치만도 못하게 여긴다’거나 ‘동전 한닢만도 못하게 여긴다’고도 하였다. 주한일본공사의 보고에서는 고종의 황제즉위 추진과 왕비의 황후례에 따른 장례식 계획을 ‘浮華虛飾의 망상’이라고까지 하였다.045)≪駐韓日本公使館記錄≫7 ,<機密本省來信>(國史編纂委員會, 1989), 明治 30년 9월 27일, 機密第61號 王妃葬式延期ノ原因. 심지어 일본의 어느 신문에서는 대한제국의 선포에 대해 우롱하는 기사까지 실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과연 대한이 독립국이냐’는 것이었다.046)The Independent, 1897년 10월 21일.

 그러자≪독립신문≫에서는 그같은 일본 언론의 내용은 헐뜯기 좋아하는 글쟁이의 말이라고 반박하였다.

대한은 약소국이기는 하나 남의 속국이 아니다. 벨기에나 희랍·화란·터키나 마찬가지이다. 대한은 어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인민이 아직 열리지 않았을 뿐이다(The Independent, 1897년 10월 21일).

 그러나 이같은 비공식적 차원의 비방과는 별도로 각국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직·간접으로 승인하였다.

 먼저 일본은 신속히 ‘대한제국황제’를 지칭하면서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를 간접적으로 승인하는 의사를 표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한동안은 대외적 선전을 위해 고종의 황제즉위를 종용하기도 하였지만, 아관파천 이후 상황이 바뀌자 태도를 바꾸어 이를 반대하였다. 일본은 특히 고종의 환궁 이후 진행되는 황제즉위 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황제즉위건을 부화허식의 망상이라고 비방하였고, 일본외상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는 주한일본공사에게 조선의 황제즉위건 추진을 철회하도록 공작하게 한 일도 있다.047)Lowther to Salisbury, No. 125, Tokio, Oct. 1, 1897. F. O. 405-Part X. 주한영국영사 조단은 2년전(1895)에 일본의 고무에 의해 이같은 변화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일본이나 다른 나라 모두 이를 환영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보고하고 있다(Jordan to MacDonald, Inclosure 1 in No. 142, Seoul, Oct. 5, 1897, F. O. 405-Part X).

 그러나 일단 황제즉위가 실현되자 일본은 입장을 바꾸었다. 한국정부에서는 대한제국 선포 직후 민비를 명성황후로 추존하여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때 일본에서는 주한변리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를 특사로 임명하였다. 장례식에 참석한 가토는 조선의 대신들에게 냉대를 받았다. 명성황후시해사건과 그 이전 일본의 만행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그러자 가토는 천황의 조위국서를 전하였다. 국서에는 ‘대한국대황제폐하’, ‘대황후폐하’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다. 고종과 대신들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승인했다 하여 그에 대한 냉대를 누그러뜨렸다.048)≪高宗實錄≫권 36, 광무 원년 11월 22일.
黃玹,≪梅泉野錄≫, 220∼221쪽.
Allen to Sherman, No. 34, Seoul, Nov. 13, 1897, DUSMK.
일본의 대한제국 승인 소식은 즉시 한국의 신문에 실렸다. 일본은 누적된 한국민의 반일감정을 무마하고, 한국정부의 반감을 무마하려던 목적을 일부나마 이룬 셈이었다.049)Allen to Sherman, No. 34, Seoul, Nov. 13, 1897, DUSMK.
≪駐韓日本公使館記錄≫ 7 ,<本省往來信>, 明治 30년 10월 18일, 發第64號 大君主陛下ヘ謁見幷ニ稱號ニ關スル御祥文送附ノ件 및<機密本省往復>, 明治 30년 10월 28일, 機密第73號 王妃葬式期幷ニ參禮者ニ關スル意見書.

 다음으로 러시아·프랑스 양국은 일본측의 애매한 표현과 달리 대한제국 선포를 공식문서를 통해 명쾌하게 승인하고 축하하였다. 앞서 고종은 러시아의 국호 명명일에 즈음하여 이를 축하하는 전문을 러시아에 보냈고, 러시아황제(니콜라이 2세)는 ‘대한국대황제폐하’의 호의에 감사한다고 회답해 왔다(12. 19). 얼마 후 러시아황제는 다시 공문을 보내어 고종의 황제즉위를 축하하고 승인한다고 표명하여 한국 조정을 기쁘게 하였다.050)≪官報≫, 광무 원년 12월 30일.
≪舊韓國外交文書≫ ,<俄案>1(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1968)(이하≪俄案≫1의 형식으로 표기함), No. 953, 1897년 12월 31일, 士貝耶→趙秉式, 皇帝位號의 致賀.
Allen to Sherman, No. 54, Jan. 2, 1893, DUSMK.
鄭喬,≪大韓季年史≫上, 171쪽.
러시아공사와 보조를 맞추던 주한프랑스공사 플랑시(V. Collin de Plancy, 葛林德)도 고종의 황제즉위를 승인, 축하한다는 프랑스정부의 공문을 전하였다.051)≪法案≫ 1, No. 867, 1898년 3월 5일, 葛林德→閔種黙, 皇帝位號上請通告件에 대한 致賀回信.

 러시아로서는 대한제국 선포가 자국의 간섭을 벗어나자는 의미도 있다는 점에서는 물론 불만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선포는 러시아측에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러시아가 한국에서 우위를 확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한 것은 러시아가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기여했다는 선전효과도 있었고, 한국은 자주독립국이니 러시아 외에 더 이상 다른 외국은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뜻도 지닌다고 보았다. 아관파천 이전에 일본이 취했던 태도나 마찬가지로 ‘二重論理’를 가지고 있었다.052)Nelson, Op. cit, pp. 235∼240.
李玟源, 앞의 글(1985), 134∼135쪽.
당시 러시아의 군사고문과 재정고문 고빙문제로 한국조정을 뒤흔들어 놓고 있던 주한러시아공사 스페이에르(Alexis de Speyer)가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결정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 점에 이유가 있다.053)李玟源, 위의 글.

 그 다음으로 영국의 경우는 공식적인 입장의 표명이 뚜렷하지 않았다. 다만 자국의 외교적 이해와 관련하여 다음해 3월 주한영국총영사 죠단(Jordan)의 직함을 공사로 승임시킨 것이 주목되는 일이었다. 그 동안 한국정부에서는 영국이 상주 외교대표급이 아닌 총영사를 파견한 데 대해 정규대표의 파견을 촉구한 바 있었다. 왜냐하면 러시아와 프랑스는 서울에 공사(Minister)급 외교관을 파견하고 있었고, 일본과 미국도 대리공사(Charge’s d’Affaires)급의 외교관을 파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정부는 영국정부가 한국을 낮게 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주한영국영사도 서울에서 타국 외교관에 비해 서열이 낮고 한국정부측에도 그렇게 비쳐져 자신의 업무수행이 적지 아니 지장을 받고 있었다. 가령 1897년 가을 러시아의 고위 세무관리 알렉시에프(Kir Alexeiev)가 서울에 온 이후 브라운의 해고문제로 논란이 되었을 때 조단은 다른 나라 외교관들처럼 외교대표의 자격으로 행동하는 데 불편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고종을 알현하는 것조차 러시아측의 방해를 받았다.

 그 외에도 조단으로서는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령 서울 주재 영국영사는 북경주재 영국공사를 거쳐 영국의 외무성에 업무를 보고하고 또한 북경의 영국공사를 통하여 본국의 훈령을 받았다. 결국 조단은 주한영국외교대표부의 격이 낮은 데 대한 한국정부의 경시와 외교업무 수행상의 불편 등을 이유로 공사로 승임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054)MacDonald to Salisbury, No. 78, Peking, Feb. 16, 1898, F. O. 405-Part XI. 이에 영국정부는 마침내 주한외교관을 영사급에서 공사급으로 승임시켜 주었고, 한국정부도 영국이 한국을 이전보다 중시한다고 여겨 만족해 하였다.055)≪英案≫1, No. 1333, 1898년 3월 9일, 朱邇典→閔種黙, 朱總領事의 公私陞任事.
Allen to Sherman, No. 84, Seoul, March 11, 1898, DUSMK.

 다음으로 미국의 반응을 보자. 미국은 고종의 황제즉위에 대한 열국의 반응과 동정을 즉시 보고하라 지시할 만큼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이 승인했다는 보고를 접한 후에도 사태를 관망하는 입장이었다.056)Sherman to Allen, No. 25, Washington, Nov. 30, 1897, Diplomatic Instructions from the Department of State to U.S. Ministers to Korea, 1883∼1905(National Archives M. F. Record Group No. 77:이하 DIDUSMK로 칭함). 이에 한국의 외부대신이 미국정부의 분명한 입장표명을 누차 촉구하자 알렌공사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알렌은 ‘우리 정부에서는 기꺼이 황제의 존호사용을 승인하였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고종에게 축하를 하도록 훈령을 내리지는 않았다’고 궁색한 답변을 반복하였다.057)Allen to Sherman, Nos. 34·50·54·56·72, Nov. 13, Dec. 23, 1897, Jan. 2, Feb. 12, 1898, DUSMK. 그러나 알렌의 말은 어디까지나 본국의 방침을 헤아려 스스로 한 표현에 지나지 않았고, 그때까지 당시 미국무부에서 그러한 지시를 내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후 대원군의 薨逝에 대하여 미국대통령이 보낸 조위전문에서 ‘대황제폐하’를 언급함에 이르러서야 미국정부의 간접적인 승인을 확인하였다.058)Allen to Sherman, No. 72, Seoul, Feb. 12, 1898, DUSMK. 그후 미국정부는 입장표명을 거듭 요청한 알렌의 보고를 접한 뒤 1898년 3월 29일자의 훈령에서 공식축하의 뜻을 한국정부에 전하도록 알렌에게 지시하였다.059)≪美案≫2, No. 1696, 1898년 12월 26일, 安連→閔種黙, 大院君薨逝에 대한 美大統領弔電傳達의 件.
Sherman to Allen, No. 25, Washington, March 29, 1898, DIDUSMK.
알렌의 직함은 1900년에 가서 약간의 수정을 보게 된다. 즉 ‘大美欽命駐箚朝鮮便宜行事大臣兼總領事 安連’에서 ‘大美欽命駐箚漢城便宜行事大臣兼總領事 安連’으로 변경된 것이다. 韓國이라는 국호 대신 漢城으로 슬쩍 대치한 것이 흥미롭다.060)≪美案≫3, No. 2226, 1900년 10월 3일, 安連→朴齊純, 美人스웨러路照申請.

 독일의 경우는 황제즉위건에 대해 직접적인 승인의 행위나 축하의 의사표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주한외교대표의 직함 중 조선을 계속해서 고집했던 미국과 달리 이를 한국으로 고쳐 씀에 따라 간접적인 승인의 의사를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한국정부와도 별다른 마찰은 보이지 않았다.

 끝으로 청국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청국은 대한제국 선포에 대해 솔직하게 거부반응을 보였다. 청국은 고종의 황제즉위를 ‘妄自尊大’라고 비난하면서 청일전쟁의 패배보다 더욱 모욕적인 일로 여겼다.061)≪淸季中日韓關係史料≫8, No. 3412, 5009쪽 및 No. 3439, 5050쪽. 청국정부는 청일전쟁 당시 원세개가 서둘러 귀국하면서 실질적인 영사업무는 주한영국영사 힐리어(Walter C. Hillier)와 조단 등에게 맡겨져 있었다. 1897년 2월초 唐紹儀가 總商董(총영사격)으로 비공식적으로 서울에 와서 근무하고 있었다. 한국과 청국의 양 국민 사이에는 현실적으로 홍삼이나 비단 등 각종 물품의 무역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국은 청일전쟁 이래 방기된 무역업무에 대해 별도의 상무조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었다.062)李求鎔,<朝鮮에서의 唐紹儀의 活動과 그 役割>(≪藍史鄭在覺博士古稀記念 東洋史學論叢≫, 高麗苑, 1984).

 그러나 새로이 조약을 맺는다는 것은 대한제국정부의 황제를 인정하지 않고는 조약의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이 문제를 놓고 청국조정에서는 의론이 분분하였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국상인의 보호를 위해 관계를 재조정하자는 이홍장 등 대신측과 감히 황제즉위를 하다니 ‘괘씸하고 불쾌하다’는 공친왕 등 황실측 주장이 팽팽하게 교차되었다. 한동안 황실측의 주장이 우세하여 진전이 없었으나, 공친왕이 사망하자 이홍장의 주장이 수용되어 마침내 대한제국 황제와 대청제국 황제의 명의로 韓淸通商條約이 체결되었다(1899).063)權錫奉,<淸日戰爭 以後의 韓淸關係의 硏究(1894∼1899)>(≪淸日戰爭을 前後한 韓國과 列强≫,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李求鎔, 앞의 글.

 이것은 한중관계사상 처음으로 한국과 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근대적 조약이며, 전통적인 책봉체제의 유산을 양국이 공식적으로 청산하고 새출발을 한 점에 획기적 의미가 있다.

 이상과 같은 고종의 황제즉위와 대한제국 선포과정에 몇 가지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가차원 이전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자는 고종의 개인적인 욕망이 그러한 조치에 내재해 있었고, 의식상으로도 전통적인 중화사상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문제점이 보인다. 또한 변화하는 시대와는 걸맞지 않게 이후 정부에 의한 개혁정책이 복고적으로 선회한 면이 있음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황제즉위식과 각종 의례의 변화에 따른 경비의 지출도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다.

 비록 이러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대한제국 선포가 갖는 역사적 의의는 그 나름대로 존재한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대한제국의 선포는 우리 나라가 전근대 중국 중심의 책봉체제로부터 탈피했음을 최종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란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비록 서구 열강에게는 현실적 구속력이 없는 조치였지만, 적어도 한국과 대등한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던 청국, 그리고 소중화의 관념에 젖어 있던 일부의 유생과 다수의 일반에게는 그 자체가 적지 않은 충격과 자극이었다. 전래의 화이관이나 소중화의식이 19세기까지도 엄존하고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그것은 나라의 권리에 대한 인식의 획기적 전환이었다.

 둘째, 대한제국 선포는 국권이 외세에 잠식되어 가는 고립무원의 절망적 상황에서 안으로는 군주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밖으로는 일본·러시아·구미국가 등 모두의 간섭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뜻을 내외에 선언한 점에서 현실적 의미가 있다. 동학농민군의 구호였던 ‘斥倭洋倡義’, 의병의 구호였던 ‘斥邪衛正’, 독립협회의 국권수호운동이나≪독립신문≫·독립문의 명칭에 담겨있던 ‘自主獨立’의 표어와 넓은 맥락에서는 같았다. 외압에 대한 대응의 방식은 각 집단이 상이했지만, 국가의 자주독립을 열망한 점은 조야 모두가 같았던 것이다.

<李玟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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