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1. 대한제국의<국제>및 군사제도
  • 2)<대한국국제>의 내용과 역사적 성격
  • (2)<대한국국제>의 역사적 성격

(2)<대한국국제>의 역사적 성격

 <대한국국제>는 대황제가 친히 정한 국가 기본법이라는 의미에서 국제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制’는 황제의 명령 즉, 황제의 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천자나 일본의 천황이 專用하던 용어로 과거 조선왕조 개창 이래 사용해왔던 왕의 명령인 ‘敎’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대한제국 고유의 헌법 명칭으로 군주주권의 전제정치 국가라는 역사성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국제’라고 명명한 것은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는 법률을 제정할 의회가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헌법’이라 하지 않고 ‘국제’라는 용어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대한국국제> 가운데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서구의 국제법인≪公法會通≫073)≪公法會通≫은 독일의 법학자 브른츨리(Johannes C. Bluntschli, 步倫)의 책을 1880년 중국에서 漢譯한 것인 데, 우리 나라에서는 건양 원년(1896) 5월 학부 편집국을 통해 중국판을 재출간하여 민간에 배포하였다.을 참고하여 제3·6·7·8·9조항에 ‘公法에 謂한 바’라고 단서를 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즉 만국공통의 법률에 기반하여 대한제국의 법률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요컨대 대한제국이 국제공법에 의지하면서 세계 만방에 황제국가로서의 독립성과 위상을 과시하려 했던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는 서양적 민주주의와 법사상을 독특한 동양적 권위주의와 국가주의로 각색하여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074)崔鍾庫,≪韓國의 西洋法受容史≫(博英社, 1983), 417·427∼428쪽.

 고종의 이러한 입장은<국제>의 제정에 참여한 사람들, 특히 외국인 고문관들의 법사상과도 일치하는 것이며, 이들은 국제의 제정에 서양의 절대주의 사상을 끌어들여 황제권을 수호하려는 고종에게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다. 이미 대한제국 성립 직후인 1898년 4월 법부 고문관 르젠드르는 윤치호와의 대담시 정부측 입장을 대변하여 ‘가장 개명된 자들이 중심이 된’ 자문위원회의 설치를 제시하였다. 그는 그렇지만 현재 대한제국이 처해 있는 상황으로 볼 때 ‘완전한 대의정부’는 적합치 않으며 현실은 마치 30년 전 명치유신 당시의 일본과 유사하니 명치정부처럼 절대주의 정책을 추진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075)≪尹致昊日記≫5, 1898년 4월 14일, 151쪽. 한편 그는 대한제국이 강력한 정부를 가지지 못하면 프랑스혁명과 같은 민중혁명을 초래할 것이라 경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결부시켜<대한국국제>와 갑오개혁시의<洪範14條>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갑오개혁시에는 법률칙령안, 세입세출의 예산 및 결산, 내외 國債에 관한 사항, 국제조약 등 나라의 중요한 안건은 반드시 내각회의를 거치도록 하였다. 이는<홍범14조>제3조의 ‘대군주는 正殿에 나아가 일을 보되 政事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裁決한다’는 규정으로 명문화하였다. 대체로 14조의 내용은 군주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권의 확립과 내각제도의 수립, 민·형법제도의 개혁과 인민의 생명과 재산보전 등 민주주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와 정부조직의 大憲이 아니기 때문에 헌법이나 준헌법으로 볼 수 없고 일종의 大政綱이라 할 수 있다.076)신용하,<19세기 한국의 근대국가 형성 문제와 입헌공화국 수립 운동>(≪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1, 문학과지성사, 1986), 56쪽.

 <홍범14조>는 비록 일본이라는 변수가 개입되었다는 문제가 있지만 우리 나라 근대법 확립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었고 향후 인권의 신장과 소유의 불균형 해소 등에 있어 매우 진일보한 발전 전망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갑오개혁 이후 근 5년이 지난<대한국국제>가 반포될 무렵은 근대적 법사상에 대한 인식이 보다 심화되는 시기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대한국국제>에는 국민의 권리에 관한 규정이 없으므로 근대적 의미의 법률체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077)<대한국국제>에서는<홍범14조>의 제13조에서도 제시한 ‘인민의 생명과 재산보전’을 보장할 수 있는 護産權이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다. 결국 이는 황제의 권리만 강조한 것이지 백성을 보호할 의무는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민권의 면에서 큰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국제>의 모든 조항이 황제의 대권사항에만 한정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열강의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외세의 간섭을 차단하고 열강과 마찬가지로 황제권 강화를 통하여 국권을 신장시키려는 대한제국 정치담당자층의 의지를 반영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황제권 강화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었다.<대한국국제>의 각 조문은 황제의 무한한 권리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국제>의 제3조에서의 ‘무한하온 군권’은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절대군주제적 정치체제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또한 제2조의 ‘전제정치’나 제4조의 ‘대황제의 향유하옵신 군권’ 및 ‘그 하고 안하고를 물론이고 臣民의 도리를 失한 자’라 함은 매우 막연한 조항이지만 황제의 통치권에 제한을 가하는 일체의 민권운동을 봉쇄할 정치적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제6조의 ‘대황제가 법률을 제정’한다는 규정도 황제가 입법권을 가지고 의회의 설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며, 오직 황제권만이 무한하며 신성불가침의 절대적인 것이라는 입장이었다.078)일찍이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헌법에도 ‘신성불가침’의 조항이 있었고, 의회의 규정을 제외한다면 당시 러시아나 일본은 아직 이와 유사한 상태에 있었다.

 즉 황제가 유지하고자 하는 법과 질서는 황제권 수호와 절대화에 필요한 법과 질서였다. 따라서 민중의 동의는 당연히 배제되는 것이었다. 기존 권력층은 자신들의 방식을 고수하거나 개화인사들의 지향인 입헌군주제 등과 같이 새롭게 대두되는 정치질서에 대해 매우 냉담하거나 다분히 자기방어적인 법률적 행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대한국국제>와 같은 법제적 규정은 황제 주도의 근대주권국가 형태를 마련하려는 여러 국가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으로 우리 나라에만 국한된 특수한 것은 아니었다.079)이에 대해서는 金泰雄,<大韓帝國期의 法規 校正과 國制制定>(≪韓國近現代의 民族問題와 新國家建設≫, 金容燮敎授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3, 지식산업사, 1997) 206∼207쪽 참조.

 요컨대 대한제국은 이러한 상태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고, 황제권 수호와 절대화에 필요한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공법’이라는 만국 공통의 법률로 외피를 쓴 법률체계로 표현한 것이 바로<대한국국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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