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1. 대한제국의<국제>및 군사제도
  • 3)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 (1) 군제개혁의 방향

(1) 군제개혁의 방향

 근대화 과정에서 군사력의 확충문제는 정권담당자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따라서 개항 이후 조선은 각종의 근대적 제도를 도입함과 더불어 지속적인 군사력 증강정책을 취해 왔으며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외형적으로 근대적 제반 제도를 도입·개편시켰다. 개혁 이후 군사제도 역시 이 시기 일반적 현상과 같이 근대적 형식과 내용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개혁되어 갔다. 한편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군사제도는 일본식에 대신하여 러시아식이 도입되어 이후 대한제국 초반까지 군사훈련과 제도는 러시아식으로 대체되었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 보았을 때 당시의 개혁은 일본과 러시아라는 외세의 간섭에 의해 진행되었던 것으로 그 근대성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앞으로의 개혁 방향은 중세사회 해체기 이래의 지향인 反봉건의 입장 견지와 한편으로는 자주적 입장의 근대화 추진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남기게 되었다. 그러한 면은 대한제국기에 이르면 국내외 정세변화에 따라 어느 정도 극복되어 가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대한제국기 군사제도 개편의 방향은 강력한 황제권 행사를 위해 정권을 수호하려는 것과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면서 자주적 근대 군제를 성립시키려는 두 가지 입장을 견지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대한제국정부는 군사력 강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당시 열강간의 세력균형이 지속될 동안 ‘강병’을 달성하지 않으면 다시 갑오년 때와 같은 외세의 침략을 허용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강력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은 황제권 강화를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080)이에 대해서는 도면회,<정치사적 측면에서 본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역사와 현실≫19, 한국역사연구회, 1996), 31∼37쪽 참조. 이때 황제권력의 물리력으로 작용하는 군사기구와 이의 정책적 운용은 당연히 개편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민의 의식 고양에 따라 중앙에서의 독립협회·만민공동회 등 민권운동과 英學黨·活貧黨을 비롯한 지방의 민중운동 확산은 기존 통치권을 위협하는 것이었기에 정부로서는 치안확보가 절대적이었다. 이에 따라 체제유지의 강력한 보루로서 군대의 육성은 매우 절실한 것이었으며, 1899년 이후 황실의 공권력 장악 및 강화작업과 결부되어 군의 위치도 상승해 나가고 있었다.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제의 절대권 확보와 관련하여 그 물리력으로 작용하는 강력한 군대 건설의 필요성은 황제뿐만 아니라 정부 및 지식인층에서도 제기되었다. 광무 원년(1897) 12월 군부협판 朱錫冕은 엄격한 군률 제정, 무관학교 설립, 지방 진위대의 증액 및 탁지부를 통한 1년 2차의 군부 경비 지급, 재능에 따른 인재발탁 등을 주장하였다.081)≪秘書院日記≫고종 13책, 光武 원년 11월 6일. 당시 독립협회에서도 기왕의 군사제도에 대한 비판과 자강을 위한 군사력 정비를 건의하였다.082)≪독립신문≫, 建陽 2년 2월 27일·6월 1일 및 光武 원년 9월 21일. 이러한 군사제도 개혁에 대한 필요와 군사력 강화의 요구는 황제권 강화를 바라는 황실의 입장과 결부되어 이후 광무년간의 군사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출범되자마자 곧바로 황제권이 강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부국강병의 목표는 지향점에 불과하였으며, 현실적으로 취약성을 면할 수 없었다. ‘강병’이라는 목표 달성의 관건을 쥐고 있는 군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갑오개혁 이후 약화되었던 군사기구를 자주적 입장에서 강화시키는 일이었다.

 러시아 본국 내부의 강·온파의 대립 및 그 결과로 나타나는 만주집중 정책으로의 방향선회와 대한제국 朝野의 사절론에 따른 1898년 3월 러시아 군사교관 및 재정고문 철수 이후에서야 비로소 주체적 입장의 군제개혁이 실시될 수 있었다. 황제는 그간 시행해 온 러시아식 군사교육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고 판단하고, 이제 러시아 사관이 철수하였으므로 ‘軍容을 더욱 壯하게 할 것’을 군부에 지시하였다.083)≪舊韓國官報≫, 光武 2년 3월 26일. 또한 전년 군부협판 주석면의 건의에 연이어 그해 4월 군부대신 이종건이 무관학교 설립을 청의하여 재가받았고, 같은 달 26일 군부로 하여금 군법기초위원장과 위원을 임명하여 군법제정을 담당케 하였다.084)≪軍部來文≫(奎17786) 3책, 光武 2년 6월 21일 6월에는 ‘陸海軍 親摠’에 관한 조칙을 내려 각국 대원수 예에 의거하여 황제는 대원수가 되어 친히 육·해군을 총관하고 황태자로 원수를 삼아 일체를 통솔케 하되 출정할 때가 아니고서는 비록 皇子·皇孫이라도 大將을 삼을 수 없도록 하여 황제 중심의 군사편제를 마련하였다.085)宋炳基 외 편,≪韓末近代法令資料集≫(이하≪法令資料集≫으로 줄임) Ⅱ, 光武 2년 6월 29일(國會圖書館, 1970), 377∼378쪽. 이에 따라 7월 2일 ‘陸軍增設과 海軍定制’에 관한 조칙을 내려 군부로 하여금 상비군 준비와, 육군 10개 대대 증설, 해군편제 방법 및 그 경비확충에 관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토록 하였다.086)러시아대장성편,≪韓國誌≫(1900;韓國精神文化硏究院역,≪國譯 韓國誌≫, 1984, 682쪽).
≪法令資料集≫Ⅱ, 光武 2년 7월 2일,378∼379쪽.
이는 그동안 명목상으로 유지되어 오던 군주의 군사통수권을 계통적으로 확립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또한 군사제도 개혁과 관련하여 그것을 주도할 지속적인 논의기구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1899년 1월부터는 군부의 최고위직인 副將과 參將을 거친 사람들이 매월 3차례 정기적으로 모여 군무와 군제개혁의 방향을 논의하였다.087)≪皇城新聞≫, 光武 3년 1월 27일. 그해 2월의 군부회의에서 제출된 사안은 ① 휴직 사관을 수용하고 다시 額外人을 임용치 아니할 것, ② 전에 정지하였던 무관학도를 현재 설치한 학교에 붙여 졸업 수용할 것, ③ 東學과 義匪(의병) 초토시 군공이 있는 사람을 수용할 것, ④ 군부내에 교육국을 설치하고 매주일에 1차씩 각 尉官의 기예를 시험할 것 등이었다.088)≪皇城新聞≫, 光武 3년 2월 23일. 특히 휴직사관의 재기용 문제는 갑오개혁 이전 인물의 등용이란 점에서 향후 정책방향의 선회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군부에서는 1902년까지 과거 統衛營·壯禦營 대관 등 갑오 이전 군인의 이력을 살피면서 추천을 받아 복직시키고 있었다.089)≪皇城新聞≫, 光武 3년 3월 4일·6년 7월 9일.

 이제 실질적으로 軍備를 어떻게 확충할 것인가의 문제점이 남게 되었다. 1899년부터 황실에서는 프랑스·러시아·독일·영국·일본 등으로부터 각종 총포와 탄약의 구입과 자체제작을 통해 군의 화력강화를 준비하고 있었다.090)이에 대해서는 조재곤,<대한제국기 군사정책과 군사기구의 운영>(≪역사와 현실≫19, 한국역사연구회, 1996), 112쪽,<표 1>참조.

 1898년 4월 무관학교, 1899년 6월 원수부 설치와 더불어 장교들도 근대적 학문을 익혀야 할 것도 요구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우수한 사관의 일본육사 유학을 추진하고 있었다. 1900년 이전부터 일본에 유학하는 사관학도는 상당수가 되었으며, 그해 6월 일본에 유학한 학생중 육군사관학교 졸업자는 3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귀국 후 중앙과 지방 군대의 중견장교로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군대의 증설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1900년 6월 평안북도와 함경남도에 총 4천여 명의 진위대대를 설치하였고, 7월에는 총 병력수 1만 7천여 명의 전국 진위대 편제를 갖출 수 있었다.091)정확한 수치라 할 수는 없지만 1897년 2월 현재 군부 병정의 수효가 4천여 명으로 추산(≪독립신문≫, 建陽 2년 2월 13일)되는 것과 대비할 때 상당한 증액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업은 우선적으로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내장원과 탁지부의 징세를 통한 황실과 정부의 지속적인 재정확충 정책에도 불구하고 군사비의 지출은 지나칠 정도로 과중하였다.≪官報≫각 연도 세입세출 예산표에 의해 1901년부터 이후 3년간 국가예산 중 군사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1년 정부 총예산은 802만 151元으로 이중 군부예산은 359만 4,911원이었다. 이는 전체예산의 44.8%였다. 1902년 총예산은 758만 5,811원이며 이중 군부예산은 278만 6,290원으로 36.7%, 1903년 1,076만 5,491원 중 412만 358원으로 38.1%로 3년 평균 39.8%를 차지하였다. 여기서 군부예산에 계산되지 않은 원수부와 호위대 예산이 도합 10만원 이상을 상회하고 있었던 사실을 볼 때 전체 예산 지출항목의 40% 이상을 군사비로 지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군부의 지출은 정부내의 단일 부서 중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900년부터 1903년의 4년간은 예산규모뿐만 아니라 대한제국기 군제 중에서도 병력수나 조직체계 등에 있어서 가장 증강된 상태에 있었던 기간이었다. 군사기구의 조직도 어느 정도 정돈된 모습을 보여준다. 황제도 1901년 8월 “군대의 편제가 성취되고 部伍가 정리되었다”고 고무적으로 인식하고 각 연대에 軍旗를 반급할 것을 지시하였다. 자체적인 대포생산도 준비되고 있었다. 10월 三淸洞 北一營에서 17연발총을 제조하였고 繼天紀元節에는 제조한 대포를 砲隊營에서 시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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