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1. 대한제국의<국제>및 군사제도
  • 4) 중앙 및 지방군의 기능과 역할

4) 중앙 및 지방군의 기능과 역할

 대한제국기 주요 군대로는 중앙에는 侍衛隊·親衛隊가 있었고 지방에는 地方隊·鎭衛隊가 있었다. 이 시기 군사제도 개혁과 연관하여 중앙군과 지방군의 개편도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 특히 軍權강화의 움직임은 중앙과 지방 군사조직의 확대를 통해서 나타난다.

 황실이 있는 서울에는 궁중 숙위와 도성 경비를 위하여 친위대와 시위대가 개편 증강되었다. 이들 시위대와 친위대 군사에 대한 대우는 특별하였는데, 여타 정부 부서의 관리들에 대한 대우와는 달리 이들 중앙군에게는 수시로 월급을 인상하거나 특별수당을 지급하였으며 연체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한편 황제 주변과 행차시의 호위 문제는 扈衛隊가 담당하였다.

 이 시기 확충된 군사는 주로 지방의 치안에 치중하고 있었다. 군대편제와 예산운용의 대다수는 지방군의 활동에 투여되었다. 중앙군의 증원에 비례하여 지방군도 계속 증강되어 갔다. 처음 을미년간 지방군은 평양·전주에 진위대 1개 대대씩 있었을 뿐이었으나 이후 계속 증설되어 1897년에 가면 15개 지방대를 설치하였다. 1899년 1월경에는 진위대·지방대 편제가 개정되면서 지방군은 2개 진위대대 및 14개 지방대대로 편제되기에 이르렀다.

 대한제국기의 정치는 민권운동이 와해된 직후인 1899년에 들어서자마자 계엄통치적 상황으로 국면이 전환되고 있었다. 정부는 일련의 강경정국을 조성하였다. 이에 1월 15일에 몇 가지 특징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먼저 서울과 그 주변의 도적을 금압하는 방략을 마련하고 범법자는 ‘군율’로 결단하는 조칙을 내리고, 전년 말에 해체된 독립협회가 지회 등을 통하여 관과 정치를 의논하는 것을 일체 엄금토록 하였다. 그 탄압책으로 군부로 하여금 진위대·지방대에 훈령하여 금지시켰다. 또한 진위대·지방대 편제를 개정하여 이들로 하여금 지방의 각 요해처에서 ‘지방 진무와 변경 수비’에 전임할 것을 조목으로 규정하였다. 긴요한 구역에는 그 지역의 사정에 따라 각 지방대의 분견대를 적당히 나누어 둘 수 있게 하였다. 아직까지는 지방대 체제가 진위대보다 양적으로 우세하였다.

 지방대의 재정은 해당 지역 郡의 驛土·屯田 등을 군부·탁지부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 기획하도록 하였다. 한편 진위대의 관제와 경비는 중앙의 친위대의 예를 원용하였다. 당시 지방대 군관의 월급은 일반 관리와 같게 산정되었고 별다른 변동없이 대부분 중앙군과 거의 동일할 정도로 대우는 좋은 편에 속하였다.

 그러나 지방대는 진위대를 설치하기 이전의 과도적인 군사제도였다. 따라서 군제가 어느 정도 완비되어 가는 가운데 진위대 체제로 흡수되었다. 1900년 7월 원수부에서는 지방대의 호칭을 폐지하고 지방군은 모두 진위대로만 편성하였다. 이 시기 전국 진위대는 6개 연대로 편제되었는데 1년 총 예산지출은 216만원 정도로 추산된다. 이러한 예산 지출은 인원과 군사비의 측면에서 볼 때 군대의 축소가 이루어졌던 갑오·을미년간에 비해 상당히 증강된 것이었다.

 진위대의 주요 활동은 활빈당·‘동학여당’·民擾·화적·비도 등 지방의 소요나 민란의 철저한 진압, 범죄자 포착, 지역순찰 등에 있었다. 진위 각 대장은 주둔지 및 부근지에 비상한 사변이 있을 때는 파병 진압과, 국내 안녕질서를 위해 주도자와 참여자를 ‘초토·포착·진정·초멸’하는 일을 주요한 임무로 삼고 있었다.094)<鎭衛別則>(≪各司謄錄≫47,<訓謄冊>7, 경기도 보유편, 光武 9년 8월, 266∼268쪽).

 그렇지만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진위대는 많은 경비를 필요로 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시기 궁내부 내장원과 탁지부의 징세를 통한 황실과 정부의 지속적인 세입확충 정책에도 불구하고 군사비 지출은 지나칠 정도로 과중한 것으로 정부의 예산회의에서도 논란이 되는 것이었다. 예산부족으로 1902년 단계에 가면 진위대 병정의 반수를 감액하고 시위·친위대는 매일 반씩 출근하여 식비를 삭감함으로써 총예산 부족액을 보충하자고 탁지부에서 정부회의에 제의하여 이 문제가 논의되기도 하였다.095)≪皇城新聞≫, 光武 6년 1월 31일. 한편 같은 신문 논설에 의하면 이 기간 군사의 현황과 군사비 지출규모를 자세히 알 수 있다. 신문에서 말하는 당시의 군사 수는 시위·진위 6천, 지방대 7천 6백, 평양병 3천, 원수부 9백, 계 17,560명이다. 1902년 군사비는 359만 3,911원으로 군사비가 정부 예산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군사가 단지 土匪탄압·賊徒방어에 있을 뿐, 우수한 병기사용의 미숙성으로 수만금의 거액을 소비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減兵은 국고를 절감하는 좋은 방법일 뿐만 아니라 殖産生財의 원천이라 하면서 신문에서는 減軍案으로 서울 守衛 약 1천 명, 지방 주둔 1천 명, 마적방어 1천 명의 총 3천 명이면 족하고 그 나머지는 영업분야에 돌릴 것을 주장하였다(≪皇城新聞≫, 光武 6년 2월 3일 및 2월 4일, 논설). 그러나 군대감축과 식비삭감 등의 문제에 대해 원수부 군무국총장 李鍾健이 의정대신 尹容善에게 조회하여 그 부당성을 논하면서 강력히 반발함으로써 결국 타결을 보지 못하였다(≪元帥府來文≫6, 奎17783, 光武 6년 2월 18일). 이처럼 경제적 문제와 결부되어서도 많은 문제가 파생하고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대·진위대 군사의 월권행위나 이권개입도 심각한 문제였다.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진위대의 활동은 주로 국내 치안문제에 있었다. 한 나라의 군사력 편성은 국방체제 강화가 가장 큰 임무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대한제국기 군사제도는 그 예산 투입의 규모에 비례하여 정작 힘을 쏟아야 될 국방문제에는 주력하고 있지 않았다. 서북과 동북의 국경치안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군사의 확충은 황실수비와 지방치안 등 주로 내부적인 문제에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당시 군사의 임무는 중앙군은 황실수비와 도성순찰이었으며, 진위대는 지방진무였다. 한편 별도로 변경수비 조항을 두어 북쪽의 국경수비에 일부 충당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국경 일대의 義和團을 비롯한 淸匪 방어도 힘들 정도였고 간도 유민과 청국 주민들과의 분쟁을 조정하는 등 지엽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불과하였다. 따라서 어느 한 제국주의 국가가 침입해 온다면 또 다른 국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이를 방어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정도로 취약하였다.

 1904년 1월 러일전쟁이 전개되자 대한제국은 그 와중에 휩싸이게 되었다. 또한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이후 식민지화 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함에 따라 군사력 강화를 통한 자주적 국방을 이룩하여 대한제국이 세계 여러 나라에 명실상부한 ‘제국’으로서의 존재와 그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문제는 영원한 미해결 과제로 남게 되었다.

 이 시기 군사제도의 운용은 국토방위라는 국방적 측면보다는 경찰력의 범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096)≪國譯 韓國誌≫, 707쪽. 군대는 경찰을 대행하고 있었고, 그 임무도 확연히 분류되는 것이 아니었다. 군대는 중앙의 민권운동과 지방의 민중운동 등의 정치적 불안을 막는, 즉 치안확보를 위한 국가권력의 폭력장치로서 경찰의 임무를 대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 아닌 경찰’같은 존재였다.

 결국 대한제국기 군대의 성격은 국방을 위한 강병, 또는 민족세력에 의한 국가관 교육체계라기보다는 황제권을 보위하고 내부치안을 담당했던 기구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대한제국의 군사정책은 근대화 사회에서 요구되는 군사력의 기초를 설정하는 역사적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였고, 군사기구의 운용 역시 막대한 노력과 예산을 투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趙宰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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