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2. 광무양전·지계사업
  • 1) 양전사업의 추진 배경과 목적

1) 양전사업의 추진 배경과 목적

 19세기 후반 조선사회에는 조선 후기 이래 진전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개항 이후 미곡무역의 활성화로 인하여 토지의 상품화가 촉진되었으며, 토지소유를 둘러싼 계층간의 분해가 심화되었다. 이 시기 지주제의 발전과 농민층의 몰락현상은 기본적으로 봉건적 토지소유제도의 비합리·불평등에 기인한 것이었다. 더불어 조세제도의 불균·편중현상에 의해 촉진되었다.097)金容燮,<朝鮮後期의 賦稅制度 釐正策-18세기 中葉∼19세기 中葉>(≪韓國近代農業史硏究≫上, 증보판, 一潮閣, 1984).
裵英淳,≪韓末 日帝初期의 土地調査와 地稅改正에 관한 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88).
李榮昊,≪1894∼1910년 地稅制度 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2).
왕현종,<한말(1894∼1904) 지세제도의 개혁과 성격>(≪한국사연구≫77, 1992).
또한 개항 이후 제국주의 열강은 개항장 및 그 주변 토지에 대한 침탈을 더욱 확대시켜 나가고 있었다. 당시에는 농촌사회의 변혁과 자본주의 발전 방향을 둘러싸고 토지문제가 핵심적인 해결과제로 등장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도 토지주권의 수호대책이 요망되고 있었다.098)鄭昌烈,<韓末 變革運動의 政治·經濟的 性格>(≪韓國民族主義論≫, 창작과 비평사, 1982).
金容燮,<近代化過程에서의 農業改革의 두 方向>(≪韓國資本主義性格論爭≫, 대왕사, 1988).

 1880년대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토지제도를 수립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1884년 광주 유생 趙汶이 주장한 方田法 실시론, 경상도 진사 宋殷成이 주장한 토지계권의 발급과 限田論, 1885년 金駿榮이 주장한 均田論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새로운 양전방식으로 頃畝法을 채택하려 하였으며, 새로 구획된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게 분배할 것을 주장하였다.099)金容燮,<韓末 高宗朝의 土地改革論>(≪東方學志≫41;≪韓國近代農業史硏究≫下, 1984, 11∼21쪽).
崔潤晤,<肅宗朝 方田法 시행의 역사적 성격>(≪國史館論叢≫38, 國史編纂委員會, 1992), 23∼30쪽.

 이에 반해 기존의 地主制를 그대로 온존한 채, 지주의 토지소유를 서양의 근대적인 법제를 통해 확고히 보장하려는 논의도 나타났다. 1884년 9월≪漢城旬報≫에서는 일본의 지조개정을 소개하면서 지주의 이해를 보장하기 위한 地券制度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1884년 갑신정변에는 ‘地租法으로 改正할 事’라는 政令이 제기되었다. 이후 1888년 박영효의 상소에서도 ‘지조를 改量하여 지권제를 시행할 것’이라고 주장되었다.100)≪漢城旬報≫, 1884년 9월 29일,<日本地租條例>.
金玉均,<甲申日錄>(≪金玉均全集≫, 亞細亞文化社, 1979), 95∼96쪽.
原敬文書硏究會編,<朴泳孝上疏文>(≪原敬關係文書≫6), 160∼174쪽.

 1891년 兪吉濬은 지권제도의 수립에 대해<地制議>에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조세의 부과대상인 토지에 대해 所有權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기초로 근대적인 지세제도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토지의 측량에 경무법을 적용하여 양전을 해야 하며, 田統圖를 작성하여 전국의 地籍圖를 마련하자고 하였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농지만이 아니라 산림·과수원·목장·漁池·鑛所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동산을 대상으로 토지소유권을 나타내는 지권을 발행하자고 하였다. 또한 田地文券圖式을 만들어 외국인과 永賣나 權賣·典當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함으로써 내국인의 토지소유권을 보호하고 동시에 지주의 토지소유권을 확립하려고 하였다.101)兪吉濬,<地制議>(≪兪吉濬全書≫Ⅵ, 一潮閣, 1971), 145∼172쪽.

 이렇게 전통적인 農本사상으로서 ‘耕者有田’이라는 원칙 하에 농민의 토지소유와 경작권을 확보하기 위한 토지재분배론이 제기되는 한편, 기존의 지주제를 옹호하고 이에 의거한 농업생산과 상업자본으로의 전화를 추구하려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었다. 개항 이후 외래 자본주의의 미곡유출과 토지침탈로 인해 더욱 확대된 농민층의 몰락과 지주제의 확대 강화를 배경으로 하는 이러한 논의는 양대 계급에게는 회피할 수 없는 현안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1894년 농민전쟁과 갑오개혁에서는 토지제도의 개혁을 둘러싸고 적대적인 입장에서 상반된 개혁론으로 대립하였다. 결국 농민층의 농업경영을 보장하는 방안으로 주장된 ‘平均分作’을 비롯한 농민적 토지재분배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甲午改革에서는 봉건부세명목의 단일지세로의 통합이나 근대적 조세체제의 정비를 시도하는 수준에서 조치를 취했으며, 1895년 7월 중순 한성부내 외국인 居留地를 설정하는 계획을 수립하여 외국인의 무제한적인 토지침탈을 제도적으로 억제하려고 하였을 뿐이었다.102)왕현종,<19세기 후반 地稅制度 改革論과 甲午改革>(≪韓國 近現代의 民族問題와 新國家建設≫, 지식산업사, 1997), 149∼157쪽. 이러한 토지정책은 1893년부터 추진된 家契發給制度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점진적으로 소유권의 법인을 이루어 가는 차원에 그친 잠정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대한제국기에 들어와서 토지문제를 둘러싼 계층간의 대립은 보다 심화되었다. 대한제국정부는 1898년에 ‘率舊章而參新規’라는 이념을 내세워 新舊를 새롭게 절충하고 개혁하려는 방향전환을 모색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이전에 비해 더욱 구체적인 量田論이 제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토지제도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논의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논의 중에서 李沂의<田制妄言>이나 兪鎭億의<方田條例>는 주목할 만한 양전론의 하나였다.103)李 沂,≪海鶴遺書≫권 1, 田制妄言 및 권 2, 急務八制議.
兪鎭億,≪田案式≫, 方田條例.
兪致範,≪一哂錄≫.
이들은 구래의 결부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方田·頃畝法의 취지를 일정부분 수용·해결함으로써 객관적인 토지측량을 이룰 수 있게 했으며, 토지 소유자에게 田案을 발급함으로써 국가가 전국의 토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하였다. 장기적으로는 지주의 토지소유를 제한하면서 小農民의 토지소유 확보와 농업경영을 보장하기 위한 제반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요컨대 이전에 해결하지 못한 토지조사와 소유권 법제를 수립하는 것이 초미의 과제가 되고 있었다.104)金容燮,<光武年間의 量田·地契事業>(앞의 책, 1984), 508∼509쪽.

 이러한 양전논의를 배경으로 하여 대한제국기의 근대개혁을 추진하던 光武政權은 1898년 6월<土地測量에 關한 請議書>를 마련하였다. 6월 23일 내부대신 朴定陽과 농상공부대신 李道宰가 주도하여 ‘全國土地測量事’라는 제목으로 의정부회의에 정식 안건을 올렸다.105)≪去牒存案(農商工部去來牒存案)≫3책, 光武 2년(1898) 6월 22일, 土地測量에 關 事件.
≪奏議≫17책, 光武 2년 6월 23일.

토지측량에 관한 청의서

 전국에 지방을 分하야 구역을 정하고 구역에 지질을 측량하야 조리가 明케함은 有國에 大政이라. 夫我國에 구역이 不爲不大오, 토지가 不爲不美라. 강계가 分定만 只有하고 지질에 측량은 未詳하야 原野의 廣窄과 川澤의 장단과 山嶺의 고저와 林藪의 濶狹과 海濱의 漲灘과 畎畝의 肥瘠과 家屋의 占趾와 土性의 燥濕과 도로의 夷險을 難以取準하니 迨此政治維新한 時에 豈非一大欠典이리오. 窃念 금일급무가 토지측량에 莫過하기로 此段을 회의에 提呈事.

光武 二年 六月 日

의정부찬정 內部大臣 朴定陽

의정부찬정 農商工部大臣 李道宰

의정부찬정 尹容善 각하 査照

 광무양전사업에서는 측량의 대상이 종래의 양전사업과 같이 농지의 비척이나 가옥의 규모를 조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위의 청의서에서 알 수 있듯이 지질, 산림과 천택, 수풀과 해변, 도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설정하고 있었다. 즉 전국 토지 일체에 대한 조사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렇게 거대한 측량사업을 추진하는 데는 사전에 여러 가지 異論이 검토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의정부회의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당시 회의를 주재한 참정 윤용선은 “이는 국가에 있어 최대의 정책이므로 대저 누가 不可라고 하겠는가”라고 하여 강력하게 시행의 의지를 피력했지만, 衆論은 원칙적으로는 당연한 사업이라고 해도 실시에는 적당한 인물이나 허다한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실제 의안에 찬성한 대신은 청의서를 낸 박정양과 이도재 이외에 윤용선과 궁내부 尹定求 등 4인에 불과한 반면, 반대한 대신은 외부대신 兪箕煥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閔泳綺 등 6인이었다. 결국 이 날 회의에서는 土地測量에 관한 件을 부결시키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안건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회의 결과를 보고 받은 高宗은 의정부회의 결과를 뒤집어서 본래의 청의 대로 시행하라는 批答을 내렸다. 光武皇帝인 高宗이 전격적으로 전국적인 양전사업을 시행하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7월 2일에 그는 직접 토지측량을 裁可하고 양전을 담당할 아문과 그 처무규정을 마련하라는 조칙을 내렸다.106)≪奏本存案≫3책, 奏本 123호.
≪日省錄≫35책, 1898년 5월 14일(양 7월 2일).

 한편 전국적인 토지조사방침이 공론화 되는 상황에서 한성부의 토지·가옥 문제에 대한 대책도 마련되고 있었다. 1898년 6월 23일 度支部 司稅局은 ‘漢城五署字內에 國內外人民家屋基址를 定納年稅할 事’라는 請議案件을 준비하고 있었다.107)≪外部去來牒≫1책, 1898년 6월 23일.
≪奏本≫6책, 1898년 7월 4일, 奏142호 漢城五署官有地管理定稅에 關 請議書.
이 안건은 주로 漢城府의 가옥 전체에 대해 家屋稅를 부과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전에는 미과세 되고 있었던 가옥에 대한 세를 신설하면서 그 적용 범위를 내국인의 것뿐만 아니라 외국인이 소유한 가옥에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안건에서 주목되는 점은 “毁屋한 基址나 無屋土地는 轉賣를 勿許하여 五署內에 一切 地段으로 官有에 常屬케 한다”는 원칙이었다. 여기서 ‘훼옥한 기지나 무옥토지’란 원래 소유자가 있었으나 현재는 가옥이 무너져 없어진 토지로서 소유권자가 불분명한 토지였다. 이런 토지를 외국인들이 집중적으로 매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원소유자와 현 외국인 소유자간의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정부는 가옥이 없는 나대지의 잠매가 원천적으로 불법이라는 원칙을 내세워 관리하고자 했다.

 따라서 외국인의 土地侵奪은 다만 현존의 가옥을 사용하는 地上權에 한하여 허용될 뿐이며 토지 그 자체의 소유권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국가의 입장에서 외국인이 이미 매입한 토지에 대해 재정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환수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1898년 6월 한성부 지역에서 외국인 소유 가옥에 대한 국가적인 통제나 관리를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었다.

 이 안건은 1898년 7월 6일 의정부회의에서 한성부의 토지분쟁과 관련된 부서인 내부대신 朴定陽, 외부대신서리 兪箕煥, 탁지부대신 沈相薰에 의해서 정식으로 상정되어 결정되었다.108)≪奏本存案≫3책.
≪奏議≫6책, 奏本 142號.
≪各部請議書存案≫6책.
≪奏議≫18책.
≪日省錄≫35책, 1898년 5월 18일(양 7월 6일).
이날은 공교롭게도 앞서 고종이 직접 결정한 量地衙門을 설립하는 處務規定도 축조·심의되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은 이 시점에서 토지조사 및 토지소유분쟁에 대한 처리방침을 결정함으로써 전국적인 토지조사를 통해서 토지소유에 대한 제권리를 확정하려고 하였으며, 적어도 한성부지역에서 外國人의 土地所有 擴大를 저지하고 大韓帝國의 土地主權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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