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3. 산업진흥정책
  • 2) 광무년간의 근대화정책
  • (1) 교통·운수업

가. 철도

 광무정권은 철도·광산·기선 등에 대한 외국의 이권 추구에 시달리는 한편 이들 利源의 개발이 국부에 중요한 것을 인식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철도·광산·기선업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교통운수업은 무역의 확대과정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산업으로서 특히 철도업은 일찍부터 열강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일본은 이미 1880년대에 한국에 철도를 부설하고자 구상하여, 1892년에는 경부철도에 대한 비밀측량을 실시한 바 있었다. 이후 일본공사 오도리 가이스케(大鳥圭介)는 1894년 6월의 노인정회의에서 서울과 주요 항구를 잇는 철도부설권을 요구한 바 있었고,176)鄭在貞,≪日帝의 韓國鐵道侵略과 韓國人의 對應≫(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2), 13쪽. 일본은 갑오정권이 수립된 이후 체결된<暫定合同條款>(1894. 8. 20)에서 경부·경인철도 부설권을 잠정적으로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청일전쟁 이후 열강이 한국에서의 일본의 이권 독점에 항의함으로써 사실상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열강의 철도부설권 탈취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1896년 미국인 모오스(J. R. Morse)가 경인철도, 그리고 프랑스인 그리이유(A. Grille)가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한편 일본은 1898년 9월<경부철도합동조약>에 의해 다시 경부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미국이 차지하였던 경인철도 부설권도 모오스의 자금사정으로 1897년 5월 일본의 경부철도발기위원회에 인수되었다.

 한편 철도건설을 위한 한국정부의 노력은 갑오개혁 당시 工務衙門 내의 철도국의 설치로 나타나고 있었지만,177)≪高宗實錄≫, 31년(1894) 6월. 구체적인 부설 계획은 없었다. 이후 1896년 7월에 국내철도규칙을 제정하고, 나아가 1896년 11월에 정부는 외국에 철도 및 광산이권의 양여를 금지한다는 방침을 의정부회의에서 결정하였다.178)李炳天,<舊韓末 湖南鐵道敷設運動에 대하여>(≪經濟史學≫5, 1981), 119쪽. 이와 함께 정부는 1898년 6월에는 경성에서 목포까지의 노선에 대해 최초로 철도부설을 결정하고 고종의 재가를 얻기도 하였으나179)≪高宗實錄≫, 광무 2년(1898) 6월 19일.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1898년 7월 6일에는 농상공부대신 휘하에 별도로 鐵道司를 설치하였으며 27일에는 철도국으로 개칭하였다.180)≪韓末近代法令資料集≫Ⅱ, 勅令 第26號 鐵道司官制 및 勅令 第29號 鐵道司를 鐵道局으로 改稱하고 該官制를 改正하는 件. 철도국은 궁내부에 철도원과 서북철도국이 설치되면서 1901년 폐지되었다. 8월 21일에는 장차 국내철도부설을 위하여 철도감독인 브라운(J. M. Brown)을 파견하여 국내 주요노선에 관한 사정을 파악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 철도건설의 움직임이 있는 다른 한편으로 민간에서도 철도건설의 움직임이 있었다. 경향각지에서 고조된 식산흥업과 이권수호 움직임은 일부의 개화파 관료와 민간자본가들로 하여금 자주적인 철도건설운동을 추진해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하여 1898년부터 1904년 사이에 전국에서는 15개 이상의 철도관련 회사가 설립되었다.181)鄭在貞,<京釜·京義鐵道의 부설과 韓·日 土建會社의 請負工事活動>(≪歷史敎育≫37·38, 1985), 240∼242쪽.

 정부에 의한 철도부설운동의 현실화는 1900년 이후 궁내부에 의해 주도되었다. 고종은 당시 경부철도주식회사 창립위원의 1인이었던 오미와 쵸베에(大三輪長兵衛)의 요청을 받아들여 1900년 4월 10일 궁내부내에 鐵道院을 설치하였다. 다시 1900년 9월에는 경의철도의 직영을 결정하면서 궁내부에 西北鐵道局을 두었으며182)≪韓國近代法令資料集≫Ⅲ, 140쪽. 여기서 직접 건설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서북철도국은 처음에 조병식이 총재였으나 이어 이용익이 총재로 되었다. 정부는 1901년 京義路線中 서울∼개성간의 노선을 측량하고,183)≪日本外交文書≫34, No. 470, 1901년 10월 23일. 1902년에 그 공사를 착공하였으나184)≪日本外交文書≫35, No. 251, 1902년 3월 20일. 자금사정으로 중단하였다. 이후 정부는 경의철도를 관업으로 건설하는 방침을 세우는 한편 大韓鐵道會社에게도 부설권을 인정하는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3년 8월에<大韓鐵道會社專擔協定>에 의해 경의선 철도부설권은 실질적으로 대한철도회사로 넘어가게 되었다. 서북철도국의 철도부설운동의 중단은 정부차원의 철도부설 노력의 종식을 의미한다.

 한편 민간인에 의한 최초의 철도부설 시도는 정부에서 경성·목포간 철도부설을 결정한 1898년보다 그 이전에 발생하였다. 부산 개항 이후 下端浦는 부산으로 유입되는 화물의 집합지로 되어 부산·하단포간은 철도부설의 요지의 하나였는데 朴琪淙·尹基永 등은 釜下鐵道會社를 조직하여 1897년 6월 이 노선에 대해 輕便鐵道의 부설을 계획, 농상공부에 허가를 신청하여 다음해 5월에 허가를 받았으나 제대로 진행되지는 못하였다.185)조기준,≪한국기업가사≫(박영사, 1974), 89∼94쪽.

 이후 1899년 3월에 박기종 등이 발기한 大韓國內鐵道用達會社는 6월에 京城·元山·鏡興을 연결하는 경원철도 부설을 신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또한 7월에는 편의적으로 명의를 대한철도회사로 변경하고 프랑스가 확보하였었지만 기한 만료로 무효가 된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186)李炳天,<舊韓末 湖南鐵道敷設運動에 대하여>(≪經濟史學≫5, 1981), 126쪽. 박기종은 이 중에서도 경원철도를 국내자본을 동원하여 부설하고자 하였으나 약간의 측량을 행한 데 그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의욕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한국정부나 민간에 의한 철도부설이 부진한 가운데 일제는 경부철도와 연계하여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경영이 부실한 대한철도회사의 李載完·박기종 등은 일제에 부설권 매도교섭을 벌이다가, 1903년 8월에는 대한철도회사전담협정에 의해 서북철도국 관할의 경성·개성간의 부설권까지 실질적으로 확보한 후, 동년 9월 일본제일은행과의 차관계약에 의해 경의철도 전체노선에 대한 부설권을 일제에 넘겨주고 말았다. 또한 이 차관계약의 부수계약에는 이미 서북철도국에 의해 부설되었던 경성·개성간의 부설철도를 서북철도국과 협의하여 양도할 것과 경원철도부설에 필요한 사채는 제일은행과 협의한다는 조건까지 부가되어 있었다.187)위의 글, 130쪽. 이처럼 1903년 9월의 시점에서 경의·경원철도 부설권은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으며, 이러한 계약조차도 露日戰爭과 함께 군용철도부설계획에 의해 폐기되어 1904년 2월과 8월에 경의·경원철도에 대해 각각 軍用鐵道敷設監部에 의한 부설결정이 내려졌다.

 결과적으로 관설철도기구와 마찬가지로 민간인 철도회사도 철도건설에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당시의 각 철도회사의 발기인이나 간부들 중에는 박기종·서오순 등과 같은 개명인사들도 있었지만, 당대의 대관료 혹은 황실과 가까운 실권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철도부설권을 얻어내거나 특혜자본을 끌어오는 데 힘을 발휘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봉건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기업가로 보기는 어렵다. 이와 함께 당시의 철도회사들은 민간자본을 광범하게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고, 정부도 또한 관료자본이나 국가자본을 투자하여 이들을 지원·육성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하였다.188)鄭在貞, 앞의 책, 48쪽.

 전체적으로 1903년 9월 일제에게 경의·경원철도의 매도를 마지막으로 대한제국기 봉건정부 및 민간인에 의한 철도부설운동은 호남철도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그리고 모든 철도부설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의 발발을 전후하여 임시군용철도감부가 편성됨에 따라 일제의 군용철도부설계획 속으로 편입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철도건설에 있어서 광무년간 한국정부나 민간인의 노력은 몇 번의 유효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결실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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