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4. 대한제국기의 자강·구국교육정책
  • 1) 경본예참의 국가주의 자강교육

1) 경본예참의 국가주의 자강교육

 대한제국정부 초기의 교육정책은 급진적 개화세력을 계승한 독립협회 등 민권파가 국민자강을 통한 자주독립을 달성하고자 한데 반하여 황제권의 강화를 중시하는 국가자강주의를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정부는 재래의 교육전통을 존중하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서양의 새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 즉 經本禮參敎育을 정책기조로 하였다.219)邊勝雄,<大韓帝國政府의 經本禮參政策과 儒生層의 新敎育參與>(≪建大史學≫7, 1989), 89∼119쪽 참조.

 이러한 시책은 교육에 있어서 첫째, 예절과 도덕 즉 충효사상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대한제국 학부대신 申箕善은 각처 공립소학교에 훈령하여, 교원은 한갓 文字·藝術敎育으로 能事를 삼지 말고 학동들에게 먼저 예절과 도덕교육을 실시하고 과정에 이르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220)≪皇城新聞≫, 光武 3년 3월 13일, 雜報<訓令各校>. 그리고 이러한 교육정책은 중학교관제에도 반영되었다. 중학교관제 제1조에 ‘중학교는 실업에 就코져 하는 인민에게 正德·利用·厚生하는 중학교육을 보통으로 교수하는 처로 정함’이라고 명시함으로써 正德을 교육의 선행지표로 제시하고 있다.221)≪官報≫, 光武 3년 4월 6일, 勅令 제11호 中學校官制. 이는 갑오·을미년간의 친일내각 당시에 이용후생을 교육의 선행지표로 삼았던 각종 교육관계 법령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대한제국정부가 경본예참 교육정책을 채택한 것은 갑오·을미년간의 개혁에서 재래교육을 ‘虛文의 學’으로 규정함으로써 야기된 재래 지식인인 유생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취해진 조치의 일환이었으므로 이는 성균관관제에 우선 반영되었다.

 을미사변 후 계속되는 의병봉기에 광무황제는 ‘교육을 잘못하여 자초한 화란’이라고 규정하고,222)≪高宗實錄≫, 建陽 元年 4월 1일. 義兵宣諭詔勅을 발표하는 한편 유학교육과 성균관교육을 중시하는 南路宣諭使 신기선을 학부대신에 임명하였다.223)≪高宗實錄≫, 建陽 元年 4월 16일. 이어 성균관 경학과 규칙을 개정·발표하였다.224)≪高宗實錄≫, 建陽 元年 6월 11일.
≪官報≫, 建陽 元年 7월 16일.
이<성균관경학과규칙>은 그 제21조에서 성균관 경학과 졸업생 임용을 정부 각 부처에 요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리고 제22조에서는 年終試及第로 생기는 성균관 학도의 결원을 고등학교 생도 가운데 우등생과 사범학교 고급학도 중에서 선발 충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성균관을 최상위 학교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균관교육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은 대한제국정부로 이어지고 있다. 자주독립을 표방하고 황제의 권력강화를 추구한 대한제국정부는 광무 2년(1898) 5월과 3년 3월의 성균관관제의 일부 개정에 이어 유교를 숭상하고 성균관관제를 개정·강화하겠다는 조칙을 발표하였다.225)≪高宗實錄≫, 光武 2년 5월 26일, 3년 3월 24일, 3년 4월 27일. 이는 1895년 친일내각 주도하에 발표하였던<敎育立國詔書>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난 제2의 교육입국조서라 할 수 있다. 사회혼란기에 학교교육은 흔히 보수적 기능을 강화하려는 태도를 갖는다고 한다.226)陳元重·李圭煥,≪韓國敎育의 社會的 基礎≫(培英社, 1971), 126∼128쪽.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한제국정부가 유학교육과 성균관교육을 강화하려고 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 사회는 이미 재래의 유학·경학교육으로는 그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지고 있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정부는 외세와 사회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실무관료의 양성을 지향하는 방향 즉 禮參의 교육정책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의 사회사정은 대외통상의 확대와 외국인의 왕래로 많은 분쟁이 야기되고 있었고, 실무에 어두운 관료들이 제대로 분쟁에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외국인의 침탈행위가 더욱 심화되어 갔고 민원이 끊임없이 야기되었다.227)≪皇城新聞≫, 光武 2년 9월 17일, 雜報<豈能盡善> 및 光武 4년 1월 19일, 雜報<通漁章程 津浦船價> 등 관련기사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정부가 외국과 체결한 通商約章을 인쇄하여 각 관찰부에 반포하기도 하고228)≪皇城新聞≫, 光武 3년 1월 12일, 雜報<外約頒布>. 지방 수령 중에는 지방에 법률해득자가 없기 때문에 부하 직원을 차출하여 중앙에서 새로 반포된 법률을 배워오게도 하였다.229)≪皇城新聞≫, 光武 4년 5월 18일, 雜報<忠察과 法律主事>. 그리고 지방 수령들은 중앙정부에 법률학식자의 파견을 요청하기도 하는 한편으로 학부 신간책자와 법규류편 등을 구매하여 郡吏로 하여금 익히게 하는가 하면230)≪皇城新聞≫, 光武 3년 1월 31일, 雜報<事事良吏>. 지방민들에게 교육하기도 하였다.231)≪皇城新聞≫, 光武 3년 2월 16일, 雜報<可鎭海隅>. 그러나 많은 지방 수령들이 신식 장정과 시무에 어두워 사직하기도 하는 등 주어진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례들이 많이 발생하였다.232)≪皇城新聞≫, 光武 3년 2월 21일, 雜報<試講何關> ; 6월 15일, 雜報<或有技術>.

 정부관료들의 새로운 국제관계와 통상문제에 대한 이와 같은 지식의 결여는 강화도조약 체결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구미열강과의 통상이 확대될수록 외국상인의 침투와 열강 정부의 이권침탈의 극대화를 초래하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민경제가 도탄에 빠지고 민중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정부가 살아남기 위한 자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제관계와 사회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유능한 관료들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제국정부는 실무·기술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장·단기, 중등·전문교육의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갑오·을미개혁의 실패를 거울삼아 학부는 성균관 경학과 교육에서 경본예참의 기조아래 일일 과정의 사분의 일을 실무에 필요한 신학문을 공부하도록 하고, ‘年終試에 급제한 자의 성명을 본부에 留案하고 궁내부와 내각 각부에 通照하야 相當職으로 次第 調用함을 요구함이 가함’이라 하여 성균관 유생들이 새로운 수용에 부응할 수 있도록 조치한 바 있었다.233)≪官報≫, 建陽 元年 7월 16일, 學部令 제4호 成均館經學科規則改正. 이어 대한제국정부는 ‘실업에 就코져 하는 인민에게 正德利用厚生하는 중학교육을 보통으로 교수하는 處’로 중학교관제를 마련하고, 중학교규칙 제4조에서 ‘중학교 고등학과 졸업생은 判任官과 전문학에 入할 자격이 具有함‘234)≪官報≫, 光武 4년 9월 7일, 學部令 제12호 中學校規則 제1관 제3조.이라 하여 고등학과 졸업생에게 관료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그리하여 중학교는 만17세 이상 25세 이하를 선발하여(제4관 제2조) 심상과에서는 윤리·독서·작문·역사·지지·산술·경제·박물·물리·화학·도화·외국어·체조를(제2관 제1조), 고등과는 독서·산술·경제·박물·물리·화학·법률·정치·공업·농업·상업·의학·측량·체조(제2관 제2조) 등을 교수토록 하였다. 당시 정부가 도모하고 있던 식산흥업정책에 부응할 수 있는 교과를 교육하고자 한 조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한제국정부는 이외에 단기 실무관료의 양성교육기관으로 전무학당과 우무학당을 설립하였다. 이는 국제교류와 통상이 확대됨에 따라 시설된 새로운 통신수단인 전보업무와 우체업무를 담당할 기술관료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정부는 1900년 7월 칙령 제27호로<전보사관제>, 칙령 제28호로<우체사관제>를 제정한 데 이어 1900년 11월 통신원령 제6호로<우무학도규칙>, 제7호로<전무학도규칙>을 제정·발포하고 해당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한 단기 속성교육을 실시하였고, 이곳에서 양성된 학도들은 郵遞總司와 電報總司에 임용토록 하였다.235)≪官報≫, 光武 4년 7월 27일·28일, 11월 5일, 勅令 제27호 電報司官制, 勅令 제28호 郵遞司官制, 通信院令 제6호 郵務學徒規則, 通信院令 제7호 電務學徒規則.

 대한제국정부는 또한 경본예참 교육정책을 기조로 식산흥업을 위한 실업교육 강화를 도모하였다. 외세의 침탈에서 벗어나 국가를 지키는 길은 식산흥업을 통한 자강이 최선의 길이었다. 식산흥업을 이루려면 이용후생의 실업교육을 진작시켜야 할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정부는 각종의 실업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236)魯仁華,<實業敎育機關>(≪大韓帝國時期 官立學校의 性格硏究≫. 梨花女大 博士學位論文, 1989), 180∼203쪽.

 일차적으로 광무황제는 광무 3년 4월 27일 ‘국가에서 학교를 개설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장차 知見을 넓히고 이익에 나아가기를 구하여 開物成務하고 利用厚生하는 기본이 되게 함이라’ 하고 특별히 상공학교 개설을 시급히 이루도록 하라고 지시하였고, 이에 정부는 수업년한 4년의<상공학교관제>를 마련하고237)≪官報≫, 光武 3년 6월 28일, 勅令 제28호 商工學校官制. 상공학교 시설예산을 편성했다.238)≪皇城新聞≫, 光武 3년 5월 12일·12월 1일, 雜報<商工設校>. 이렇게 설립된 상공학교의 운영과 교육효과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후 1904년에 이르러 정부는 농업과를 추가하여 농상공학교로 개편했다.239)≪官報≫, 光武 8년 6월 11일, 勅令 제16호 農商工學校官制.

 다음으로 대한제국정부는 수업년한 3년의 鑛務學校를 설립하였다.240)≪官報≫, 光武 4년 9월 6일, 勅令 제31호 鑛務學校官制. 광업은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산업발전의 원천을 이루는 중요한 지하자원 내지 화폐결재의 수단으로서 반드시 필요한 산업이었기 때문에 열강의 가장 중요한 이권침탈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정부에서는 열강의 이권침탈에 대항해 자주적인 광산개발에 착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광산기술자를 양성하는 것이 시급하였고 이를 위해 광무학교를 설립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광무학교 교육은 기술교육을 담당했던 외국인 감독과 교관들이 자기 나라의 이권침탈에 앞장서고 대한제국정부 또한 광산개발을 황실재정의 충당수단으로만 여김으로써 산업진흥의 수단으로서 기여하는 데 한계를 보여 주었다.241)魯仁華, 앞의 글.

 이에 비해 외국에서 근대 양잠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인물들을 관리로 임명하여 1901년부터 설치 운영했던 잠업시험장의 양잠교육은 그런대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242)金英姬,<大韓帝國時期의 蠶業振興政策과 民營蠶業>(≪大韓帝國硏究≫, 이화여대, 1986), 7∼28쪽.

 그런데 정부가 이와 같이 새로운 학교를 세우고 신교육을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재정난은 학교의 설립과 신교육의 실시를 어렵게 하였다. 대한제국정부의 재정난은 심각하여 매달 봉급일을 당하면 月俸을 마련하지 못하여 탁지부대신이 사면을 청하고,243)≪皇城新聞≫, 光武 3년 9월 1일, 雜報<國庫現況>. 國庫貯置額이 부족하여 軍警의 월급만 우선 지급하고 각부의 월급은 보류한 채 각처에서 이를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 그러한 형편에 이르고 있었다.244)≪皇城新聞≫, 光武 3년 11월 30일, 雜報<後先給俸>. 따라서 학교예산을 예산편성에서 정지하기도 하였다.245)≪皇城新聞≫, 光武 4년 1월 19일, 雜報<校費停止>.

 정부의 교육시책이 이렇듯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장정과 법제 등에 대하여 밝은 지식을 가진 인재의 양성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이에 황실의 측근을 비롯한 전·현직 관료들은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자제들에게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군수를 역임한 경력이 있는 金信榮이 왕실의 외척인 閔泳煥을 추대하여 설립한 것으로 생각되는 興化學校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흥화학교는 영어·산술·지지·역사·작문·토론·체조 등을 교육하는 심상과 외에 특별과와 量地速成科를 설치하였다. 특히 양지속성과는 量地衙門과 계약을 체결하고 정부가 광무 2년부터 시작한 토지측량사업인 量田地契事業에 참여할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외에도 법률전문과를 설치하였던 光興學校를 비롯하여 樂英學校·中橋義塾·사립법률학교·光成商業學校·牛山學校·사립철도학교 등 많은 학교들이 전·현직 고급관료 들에 의해 설립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246)邊勝雄,<韓末 私立學校 設立動向과 愛國啓蒙運動>(≪國史館論叢≫18, 國史編纂委員會, 1990), 9∼55쪽.

 이들 학교의 설립자와 교사들은 학문과 교육의 목적이 문명개화의 실학을 연마하고 군주를 받들고 국가경영을 돕는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들 학교는 정부의 새로운 시책이나 사업계획에 따라 정부와 약정을 체결하고 특수학과를 설립하여 실무관료의 양성에 협력하는 한편 정부로부터 사립학교출신의 서용을 위한 특별조치를 얻어내기도 하여 그 학교 출신의 관리직 진출을 도모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무렵에 설립된 각종 사립학교 출신들 중 많은 수가 대한제국 관원으로 활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정부와 황실·외척 및 중앙의 전·현직 고급관료군에 의한 학교의 설립과 신교육의 실시는 정치·사회의 변화에 대처하고 식산흥업을 담당할 신식관료군을 양성하여 황제권력을 중심으로 국가자강을 이루려는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즉 尊皇的 국가주의 교육을 지향하였다.247)邊勝雄,≪近代私立學校硏究≫(建國大 博士學位論文,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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