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5. 대한제국기의 재정정책
  • 3) 황실·군사부문의 지출 증대와 황실의 자금 축적
  • (1) 황실·군사비의 팽창과 행정·사업비의 축소

(1) 황실·군사비의 팽창과 행정·사업비의 축소

 대한제국기의 재정지출을 보면 황실비·내부·탁지부·군부의 예산이 세출예산 총액의 9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표 4·5>참조). 특히 군부의 예산은 1901년 이후 전체 세출 총액의 40%에 육박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이 군부예산의 팽창이 세출예산의 급격한 증가를 주도하였다.

 황실비는 크게 御用費(황제 직접 경비), 祭享費, 궁내부 직원들에 대한 봉급, 궁내부 운영경비 등으로 구분되는데, 액수로는 1896년의 50만원에서 1904년에는 120만원으로 크게 증가하였지만 전체 세출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안팎으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산에 편성되지 않은 황실 관련 예비비 지출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실제 황실비의 비중은 이보다 훨씬 높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警衛院·鐵道院·西北鐵道局·礦學局 등 궁내부 소속 일부 기관의 예산은 황실비와 별도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1901년에는 6만원에 불과하던 것이 1901년 경위원의 신설, 1902년 광학국의 설치에 따라 1904년에는 32만원으로 늘어났다. 따라서 이들 기관들의 예산이 전체 세출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01년의 0.7%에서 이후에는 2∼3%로 높아지고 있었다.

 이 예산의 대부분은 궁궐의 경비, 황실범·국사범에 대한 감시, 그리고 개항장의 경찰업무를 맡았던 경위원을 위해 지출되었다. 궁내부와 궁내부에 소속된 모든 기관의 인건비·운영비가 황실비로 편성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들 기관에 대해서만 별도의 예산을 책정했던 것은 이들 기관이 고종의 주도하에 추진되던 근대화사업을 담당하는 기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기관에 책정된 예산은 사업비가 아니라 소속된 관리들에 대한 봉급과 기관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경위원을 제외하면 각 기관에 배정된 예산은 각각 2만원 내외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적은 편이었다.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황실비 384,615 10.1 500,000 7.9 560,000 13.4 560,000 12.4 650,000 10.0 655,000 10.6
궁내부                        
기로소                        
원수부                     44,893 0.7
의정부
(내각)
15,030 0.4 29,799 0.5 25,636 0.6 32,016 0.7 35,506 0.5 37,884 0.6
내부 525,198 13.8 1,274,445 20.2 990,305 23.6 1,010,947 22.3 1,020,988 15.8 1,036,461 16.8
외부 35,435 0.9 71,932 1.1 78,718 1.9 132,396 2.9 166,743 2.6 236,122 3.8
탁지부 1,679,488 44.1 1,695,320 26.8 869,727 20.8 882,485 19.5 2,037,907 31.5 879,300 14.3
군부 321,772 8.5 1,028,401 16.3 979,597 23.4 1,251,745 27.7 1,447,351 22.4 1,636,704 26.6
법부 41,806 1.1 47,294 0.7 37,815 0.9 46,853 1.0 38,925 0.6 56,313 0.9
경무청 120,240 3.2 172,185 2.7 190,163 4.5 214,708 4.7 241,904 3.7 301,340 4.9
학부 70,349 1.8 126,752 2.0 76,778 1.8 89,340 2.0 141,627 2.2 163,005 2.6
농상공부 50,977 1.3 183,416 2.9 150,440 3.6 189,230 4.2 259,004 4.0 377,136 6.1
중추원     14,987 0.2 8,468 0.2 9,712 0.2 25,628 0.4 17,128 0.3
호위대                 50,986 0.8 51,610 0.8
양지아문                 11,660 0.2 43,916 0.7
표훈원                     22,160 0.4
통신원                        
혜민원                        
지계아문                        
합 계 3,244,910 85.3 5,144,531 81.4 3,967,647 94.7 4,419,432 97.7 6,128,229 94.7 5,558,972 90.2




국장비     70,000 1.1 90,000 2.1 70,000 1.5        
궁내부                        
의정부                     1,903 0.0
내부 60,000 1.6 19,100 0.3 130,000 3.1 34,400 0.8 36,200 0.6 53,300 0.9
외부         480 0.0 480 0.0 480 0.0 480 0.0
탁지부     282,500 4.5 2,300 0.1            
군부     700 0.0                
학부                        
농상공부             1,218 0.0 6,223 0.1 47,216 0.8
합 계 60,000 1.6 372,300 5.9 222,780 5.3 106,098 2.3 42,903 0.7 102,899 1.7
  예비금 500,000 13.1 800,000 12.7         300,000 4.6 500,000 8.1
  세출총계 3,804,910 100 6,316,831 100 4,190,427 100 4,525,530 100 6,471,132 100 6,161,871 100

<표 4>세출예산 Ⅰ(1895∼1900년) (단위:元, %)

*출전:<표 1>의 자료.

    1901 1902 1903 1904 1905








황실비 900,000 9.9 900,000 11.9 1,000,000 9.3 1,200,000 8.4 1,454,000 7.6
궁내부소속 61,039 0.7 257,017 3.4 261,032 2.4 327,541 2.3 323,556 1.7
기로소         24,026 0.2 27,552 0.2 25,927 0.1
원수부 73,242 0.8 65,275 0.9 65,853 0.6 86,929 0.6    
의정부 38,298 0.4 37,510 0.5 38,730 0.4 61,188 0.4 59,778 0.3
내부 982,599 10.8 973,410 12.8 980,533 9.1 990,948 7.0 893,487 4.7
외부 244,552 2.7 288,838 3.8 278,198 2.6 287,367 2.0 510,834 2.7
탁지부 764,324 8.4 578,736 7.6 1,665,716 15.5 2,741,999 19.3 3,525,491 18.4
군부 3,594,911 39.6 2,786,290 36.7 4,123,582 38.3 5,180,614 36.4 4,852,175 25.4
법부 56,774 0.6 57,520 0.8 56,702 0.5 63,967 0.5 8,671 0.4
경무청 426,039 4.7 276,154 3.6 361,331 3.4 406,925 2.9 386,749 2.0
학부 184,983 2.0 167,730 2.2 164,743 1.5 205,673 1.4 218,756 1.1
농상공부 70,117 0.8 40,892 0.5 46,300 0.4 51,070 0.4 57,108 0.3
중추원 17,152 0.2 17,128 0.2 18,580 0.2 19,396 0.1 17,834 0.1
호위대 56,032 0.6 55,792 0.7 58,099 0.5 81,978 0.6 80,718 0.4
양지아문 129,664 1.4 7,824 0.1            
표훈원 22,345 0.2 18,457 0.2 20,993 0.2        
통신원 398,080 4.4 374,910 4.9 461,935 4.3 637,648 4.5 472,540 2.5
혜민원     6,446 0.1            
지계아문     22,108 0.3 71,018 0.7        
합 계 8,020,151 88.3 6,932,037 91.4 9,697,371 90.1 12,370,795 87.0 12,947,624 67.7




국장비                    
궁내부             625,395 4.4 210,000 1.1
의정부 1,903 0.0 720 0.0         3,300 0.0
내부 54,300 0.6 50,800 0.7 50,800 0.5 53,288 0.4 37,288 0.2
외부 480 0.0 480 0.0 480 0.0 480 0.0    
탁지부                 4,615,453 24.1
군부                    
학부                    
농상공부 1,848 0.0 1,840 0.0 1,840 0.0 6,340 0.0    
합 계 58,531 0.6 53,840 0.7 53,120 0.5 685,503 4.8 4,866,041 25.5
  예비금 1,000,000 11.0 600,000 7.9 1,015,000 9.4 1,158,000 8.1 1,300,000 6.8
  세출총계 9,078,682 100 7,585,877 100 10,765,491 100 14,214,298 100 19,113,665 100

<표 5>세출예산 Ⅱ(1901∼1905년) (단위:元, %)

*출전:<표 1>의 자료.

 군부예산의 경우 이 시기 군대증강 정책을 반영하여 액수나 전체 세출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 군부예산은 1896·1897년의 1백만원 안팎에서 1900년에는 163만원으로, 1901년에는 그 두 배가 넘는 359만원으로 급증하였다가, 1904년에는 다시 518만원으로 증가했다. 따라서 전체 세출예산에서 군부예산이 차지한 비중도 1897년에서 1900년 사이의 평균 25% 수준에서 1901년 이후에는 40%에 육박하고 있었다.

 1901년 이후 군부예산이 급증한 것은 1900년 청의 의화단 봉기가 국제적인 문제로 부상하면서 국내외 정세가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의화단 봉기를 청정부가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데다가 청정부가 오히려 의화단을 부추기면서 제국주의 세력에 저항하는 양상을 보이자 프랑스·영국·미국·러시아·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은 공동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北京을 점령하고 지방에까지 진출하여 의화단을 탄압하는 한편 중국을 분할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337)의화단 봉기에 대해서는 김배철,<‘교안’과 의화단>(≪강좌 중국사≫Ⅵ, 지식산업사, 1989) 참조. 더욱이 이 무렵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을 분할하자는 등의 협상도 벌이고 있었다.338)森山茂德,≪近代日韓關係史硏究≫(東京大出版會, 1987), 118∼121쪽. 이같은 사태 전개는 대한제국, 특히 황제인 고종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미 1894년에 농민전쟁을 계기로 한 일본의 침략을 경험했던 고종으로서는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이 개입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도 치안의 강화가 절실했다. 따라서 고종은 적극적으로 군대증강에 나서 군부예산을 증가시킨 것은 물론 정부 세출예산의 예비비나 내장원의 자금까지 동원해 군사비를 지원했다.

 대한제국기에는 세출예산에 편성되지 않은 豫算外支出(예비비 지출)이 많았는데, 그것은 대개 황실과 군사비 부문에 집중되고 있었다. 특히 황실과 관련된 지출이 막대하였다. 정부 세출예산의 10% 내외를 차지하는 황실비 이외에도 황제의 위상강화를 위한 慶運宮 중건 등 각종 공사와 國葬·進宴 등 각종 황실 관련 의식·행사에 많은 액수의 예산외지출이 이루어졌다.≪高宗實錄≫에 나타난 황실 관련 예산외지출 상황을 정리해보면, 1897년부터 1904년까지 정부재정의 예비비에서 황실과 관련하여 지출된 것이 약 480만원이 되는데, 이것은 예산에 책정된 연평균 87만원 정도의 황실비 이외에도 해마다 평균 60만원 가량의 비용이 황실 부문에 추가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사비에 대한 예산외지출도 상당한 편이었다.≪高宗實錄≫에 나타난 것만 해도 1897년부터 1904년까지 모두 155만원에 달했다.

 이처럼 황실과 군사비 부문의 예산외지출이 많았으므로 세출예산에 미리 책정된 예비비로는 이를 충당할 수 없었다. 따라서 1897년에 180만원, 1898년 30만원, 1899년 20만원, 1902년 270만원 등 예비비를 더 설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897년에는 고종의 황제즉위와 명성황후의 국장, 1902년에는 고종의 즉위 40주년과 耆老所 입소 때문에 이처럼 많은 예비비가 추가되었다고는 하지만 1897년의 180만원은 그 해 전체 세출예산의 약 28.5%, 1902년의 270만원은 그 해 세출예산의 약 35.6%에 달하는 막대한 액수였다.

 당시 정부의 세입이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예비비의 추가는 바로 다른 부문의 세출 감소를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황실과 군사비 부문에는 편성된 세출예산을 넘어서는 지출이 이루어지고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내부, 교육을 담당하는 학부, 관영사업 부문을 담당하는 농상공부 등 다른 부문의 세출은 책정된 예산에도 미치지 못하는 재정운영의 편중현상이 심화되어갔던 것이다.

 이 시기의 내부예산은 지방행정비, 특히 各郡의 경비가 대부분이었다. 내부의 세출예산은 액수에서는 1백만원 내외로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에서는 1896년부터 1898년 사이의 20% 수준에서 1899·1900년에는 15% 수준, 1901·1902년에는 10% 수준, 1903·1904년에는 그 이하로 점차 낮아지고 있었다. 반면에 내부에 소속된 警務廳(1900년 6월에서 1901년 12월 사이에는 警部)의 예산은 꾸준히 증가하였고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4%선을 유지하였다. 1902년부터 경무청 세출예산이 갑자기 축소된 것은 1901년 11월에 경위원이라고 하는 별도의 경찰조직이 궁내부에 설치되어 예산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다. 내부예산이 별다른 변화없이 고정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급격한 화폐가치 하락과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감소를 의미한다. 내부예산, 즉 지방행정비의 감소는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그렇지 않아도 지방통제력이 약했던 당시의 정부로서는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학부예산은 액수에서는 점차 증가하였지만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 내외로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더욱이 지방의 소학교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院土 등 과거 향교 관련 토지들의 관할권이 소학교로 이속되었다가 내장원의 光武査檢을 계기로 대부분 내장원으로 귀속됨으로써 학교에 대한 지원은 크게 감소된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339)소학교를 유지하려는 지방민들과 학부의 항의가 계속되었지만 내장원의 입장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皇城新聞≫1899년 10월 6일, 12월 26일, 1900년 1월 6일, 1월 8일, 1월 13일, 11월 1일, 1901년 3월 23일, 7월 2일, 雜報 등).

 사업부서라고 할 수 있는 농상공부·通信院·양지아문·지계아문 등의 예산을 살펴보면 농상공부의 경우, 1900년까지는 급속한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1900년 이후 크게 줄어들고 있다. 이는 농상공부 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우체·전신부문이 1900년에 황제 직속기구로 설치된 통신원으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농상공부 예산은 직원들에 대한 봉급과 기관운영 경비를 의미하는 本廳費를 제외하면 모두 크고 작은 사업에 투입된 경비였는데, 당시 농상공부가 관장하던 사업은 우체·전신을 비롯하여 인쇄·제언수축·製鹽·철도·잠업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하지만 우체와 전신을 제외한 다른 부문의 사업비는 극히 미미한 편이었다. 따라서 1900년 7월에 우체·전신부문이 통신원으로 이관되자 농상공부의 전체 예산이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우체·전신부문의 예산은 그 동안의 증가 추세가 통신원으로 이속된 뒤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우체·전신사업이 정부의 사업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또 비교적 잘 운영되는 사업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양전·지계사업을 담당하기 위해 1898년 7월과 1901년 10월에 각각 설립된 양지아문과 지계아문(1902년 3월 지계아문으로 통합)의 예산 역시 인건비·기관운영비를 의미하는 본청비와 양전사업비(改量費·量地費)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사업의 규모와 중요성에 비추어 양전사업비는 매우 적었다. 1900년 1만원, 1901년 10만원, 1903년 5만원 등 모두 16만원이 양전사업비의 전부였다. 양전사업비가 이렇게 적게 책정된 것은 양전을 실시하는 각 군의 결호전과 지계를 발급할 때 받는 ‘契金’으로 그 비용을 충당했기 때문인데, 양전·지계사업의 성격상 이러한 경비 충당방식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340)조동걸,<지계사업에 대한 정산 농민항요>(≪사학연구≫33, 1981) 참조.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황실과 군사비 부문을 중심으로 하여 재정수요는 늘어갔지만 이를 충당해야 할 정부의 재원은 계속 축소되어갔다. 만성적인 세입부족에 시달리는 당시의 상황에서 황실과 군사비부문의 세출확대는 상대적으로 다른 부문의 세출감축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부분 지방행정비로 구성된 내부예산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고 농상공부가 주관하는 사업도 우체·전신을 제외하면 거의 예산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처럼 정부의 재정지출이 균형을 잃고 있었으므로 정부재정을 담당하는 탁지부는 정부관리들의 봉급과 정부기구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경상비를 마련하기도 힘겨웠다. 국고 부족으로 황실비나 군인·경찰관의 월급만 우선 지급하고 각부 직원들의 월급은 지불하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하여, 정부직원들의 월급이나 각 기관의 경비를 3개월까지 지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외국어학교와 각부에 고용된 외국인들의 월급지불 독촉을 받기도 했다.341)≪皇城新聞≫, 1899년 9월 26일, 11월 30일 ; 1900년 3월 13일 ; 1901년 2월 2일, 4월 2일, 11월 8일, 11월 22일, 12월 4일 ; 1902년 2월 14일, 6월 2일, 11월 7일, 12월 24일, 12월 27일 ; 1903년 1월 6일, 雜報.
≪度支部各項用下調査抄錄≫(奎19369).

 정부는 이러한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였다. 우선 호구조사, 양전·지계사업, 지방관에 대한 결호전 상납 독촉 등 재정수입을 늘리기 위한 조치들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들 사업이나 조치들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정부는 또한 재정지출을 줄이는 조치들도 취하였다. 그 중 하나가 고급 관리들의 봉급을 삭감하는 조치였다. 이것은 앞서 1895년 3월 문무관리들의 봉급에서 勅任官은 20%, 奏任官은 15%, 判任官 5등 이상은 10%씩 감액하기로 했던 조치를 이어서 실시하되, 판임관과 지방관은 제외하기로 한 것이었다.342)≪勅令≫제2책, 1895년 3월 30일, 勅令 제69호 文武官의 俸給 減給에 관한 건, 236쪽. 이러한 조치는 이후 해마다 반복해서 실시되었으므로 칙임관·주임관 등 상급 관리들의 봉급은 실질적으로는 삭감된 것과 같았다. 또한 1902년에는 관찰사·목사·부윤·군수 등 지방관의 부임 여비를 지급하지 않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343)≪勅令≫제10책, 1901년 12월 12일, 勅令 제22호 各觀察使·牧使·府尹·郡守의 赴任旅費를 당분간 停止하는 건, 604쪽.

 재정수입 증대와 지출감축을 위한 정부의 이러한 조치들이 뚜렷한 성과를 거두기는 힘들었으므로 이제 탁지부가 쓸 수 있는 방법은 화폐를 주조하는 전환국이나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내장원 또는 해관에서 자금을 빌려 급한 불을 끄거나, 한국의 국고금을 취급하는 일본 제일은행 지점에서 단기차관을 들여오는 수밖에 없었다.344)1899년 9월, 1903년 1월 등 몇 차례에 걸쳐 전환국에서 빌려온 자금으로 황실비, 군대·경찰, 각부 직원의 봉급 등이 지불되었고(≪皇城新聞≫, 1899년 9월 26일, 1903년 1월 6일, 雜報), 1900년 11월에는 해관에서 지폐 10만원을 빌려와 관리들의 봉급을 지급할 수 있었다(≪皇城新聞≫, 1900년 11월 29일, 雜報). 내장원으로부터도 1901년 2월·11월, 1902년 6월·10월·12월, 1903년 4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자금을 빌려와 급한 지출을 해결했다(≪皇城新聞≫1901년 2월 2일, 11월 22일, 1902년 6월 2일, 10월 31일, 12월 27일, 1903년 4월 11일, 雜報). 그리고 1903년에 도입한 군함 揚武號의 대금도 일단 내장원에서 빌려서 지급했다(≪皇城新聞≫, 1903년 7월 13일, 雜報). 탁지부의 차입금 중에는 특히 내장원으로부터 빌려온 것이 많았는데, 그 상환은 탁지부가 직접 한 것도 있었지만 대개는 각 지방의 결호전을 내장원에 양도하는 외획의 방식이 사용되었다.345)탁지부는 1901년 11월말 월초에 빌려온 내장원 자금을 직접 갚았지만(≪皇城新聞≫, 1901년 11월 30일, 雜報), 이후에는 앞서 언급한 양무호 구입대금을 1904년에 가서 상환한 것 이외에는 직접 갚았다는 기록이 거의 없다. 아마도 이후에는 대부분을 외획의 방식으로 갚았으리라 생각된다. 1903년의 경우 모두 1천만냥 이상의 자금을 갚아야 했던 탁지부는 내장원의 요구에 따라 전라도·경상도 각군의 결호전을 외획하기로 했고 내장원은 각군에서 거둔 결호전으로 그 지역의 상품을 구입해 서울에 내다파는 상업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탁지부가 전환국·내장원·해관 등에서 들여온 자금은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단기차입금으로서 곧 갚아야 할 것들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자금의 도입은 정부의 재정난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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