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Ⅲ. 러일전쟁
  • 1. 러일전쟁의 배경
  • 2) 청일전쟁 후 동아시아 국제관계

2) 청일전쟁 후 동아시아 국제관계

 19세기 중엽 서방세력들의 동아시아 진출 이후 동아시아 국제정치에 개입하는 열강들은 중국과 일본이란 두 지역세력, 최대의 식민지를 보유한 해상·상업세력인 영국, 태평양 세력인 미국, 대륙으로 동아시아와 연결된 러시아 그리고 유럽의 중심세력인 독일과 프랑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열강들의 침탈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외 열강들은 동아시아에서 갖는 이해의 성격, 이 지역이 자국의 대외정책 전반에서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이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이 지역의 국제정치, 혹은 세력균형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단순히 세력분포 기능만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중 일본과 러시아는 이 지역에서 정치적·전략적 이해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던 국가에 속한다. 대륙세력이면서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와 접한 러시아는 19세기말 해상세력의 시대에 뒤이어 등장하는 철도의 발달로 아시아 내륙 깊숙이 수송망을 건설하면서 인도와 중국 등에서 남하정책을 감행하고 있었다. 일본 역시 명치유신 이후, 특히 청일전쟁 이후 주변 지역을 대상으로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이것은 양국이 한반도와 그 인근 지역문제를 두고 충돌하였으며 한반도는 주요한 대상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본에게는 한반도는 일본열도의 심장을 겨눈 비수이자 일본이 대륙으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 러시아에게는 극동 시베리아 개발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해 줄 수 있는 배후 기지였으며 부동항을 보유한 지역으로서 높은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양국은 이런 의미에서 이 지역의 기존 국제체제에 변화를 추구하던 세력으로 분류된다.

 해양·상업세력인 영국은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에 설치한 개항장을 중심으로 소위 비공식 제국망(informal empire)을 구축, 무역을 주도하면서 양자강 유역 등에 광범위한 이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결과 인도제국의 보호와 중국에서 경제적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전략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중국에서는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중국과의 準동맹적인 관계에서, 즉 친중국적인 입장에서 동아시아 정책을 추진해왔다. 영국은 중국이 그들의 상업적 활동을 저지할 만큼 강력해지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사회적으로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영국의 이권과 해상·상업활동에 유리할 것으로 평가하였다. 반대로 중국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은 경제적 이익 추구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열강들, 특히 범세계적 차원에서 영국과 경쟁하는 러시아가 정치·군사적으로 남진팽창정책을 추구할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이었다. 한반도에서도 영국은 중국과의 협조를 통해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봉쇄해 왔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 시기 중국과 협력하는 영국의 한국정책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351)Kiernan, E. V. G., British Diplomacy in China 1880∼1885(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9), p.85. 미국도 태평양 세력이라는 관점에서 이 지역에 어느 정도 정치적·전략적 이해를 갖고 있었지만 정치적 야심보다는 경제적·상업적 이익의 극대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과 미국은 지역정세의 안정을 기본정책으로 삼는 현상유지 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동아시아 지역정치를 이해하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동아시아가 19세기말이 되면 유럽 중심적 국제정치에 종속되는 場으로서 기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보불전쟁 이후 고립되었던 프랑스가 1890년 이후 러시아와의 동맹관계에 들어감으로써 유럽의 국제체제는 전환기를 맞는다. 또 이 시기에 절정기에 도달한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도 동맹관계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미국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필리핀을 획득(1898. 12), 이 지역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국제정치상의 이같은 변화는 청일전쟁 이전까지 주로 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된 열강들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정치적·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됨으로써 동아시아는 유럽 열강들의 범세계적 국제정치 체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전개되었던 것이다.352)Langer, William L., The Diplomacy of Imperialism, 1890∼1902(New York:Alfred A. Knopf, 1951), pp.167ff. 유럽 세력균형의 구조적 변화에 따른 국제체제의 변화에 대해서는 Morgenthau, Hans J., Politics Among Nations, fifth edition(New York:Alfred A. Knopf, 1973), pp.348∼350 참조. 러일전쟁도 이같은 관점에서 유럽의 중심국과 주변국과의 전쟁으로 평가된다. 당시 이 지역에서 최대의 이해를 보유한 영국에게조차 동아시아는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하던 대상이 아니었다. 영국에게 중요했던 것은 유럽의 세력균형이었으며, 이것은 구체적으로 독일·러시아·프랑스와의 관계였다. 따라서 ‘영광된 고립’정책을 포기한 것으로 평가되는 영일동맹도 단기적으로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러시아와의 타협(삼국협상)을 가능케 한다는 전략적 의미를 강하게 갖는 것이었다. 즉 영일동맹의 기능은 유럽의 국제정치에 보조적이었다는 평가이다.353)Lowe, C. J., The Reluctant Imperialists-British Foreign Policy 1878∼1902 (London:Routledge & Kegan Paul, 1967), pp.248∼251. 따라서 영-러 양국은 동아시아 문제는 거론하지 않고 페르샤·티벳·아프가니스탄 문제만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유럽의 강대국인 독일과 프랑스의 정책도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 우선이라는 기본정책을 바탕으로 다른 열강과의 관련 속에서 동아시아·한국문제에 일정한 가치를 부여했다. 유럽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한 독일은 1890년대 이후 세계세력으로서의 지위 확보를 위해 해군력 확장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 전략의 일환으로 1898년 교주만을 租借 동아시아에 진출했다. 물론 1880년 이래 독일의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중국과의 교역량이 영국 다음으로 늘어나는 등 동아시아에 대해 관심도 증대되는 추세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러시아와 프랑스간의 협력관계가 성립되면서 독일의 관점에서는 안보위협이 심각해짐에 따라 유럽 지역의 안보체제 구축에 주력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실질적 이해가 빈약한 동아시아 지역은 관심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동아시아로 통하는 해상로는 영국 함대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독일의 동아시아 정책은 여러 연구서의 평가대로 ‘공세적 방어’나 ‘엄정 중립’을 취하는 정도였다.354)Schrecker, John E., Imperialism and Chinese Nationalism-Germany in Shantung(Cambridge, Mass.: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pp.8∼41.
Bee, Minge C., ‘Origins of German Far Eastern Policy’, Chinese Social and Political Science Review, 21-1(Apr., 1937).
White, John Albert, The Diplomacy of the Russo-Japanese War(Princeton: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4), pp.92∼94·170∼178.

 프랑스는 19세기 후반기 유럽에서 독일·영국에 비해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더구나 유럽정세가 프랑스의 안보를 위협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자 주로 인도차이나에 제한된 이해를 갖고 있던 프랑스로서는 아시아 문제에 적극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1890년 이후 독일을 견제하기 위한 러시아와의 동맹을 외교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는데, 바로 이 기본정책의 유지가 동아시아 정책에서도 기준이 되는 것이었다. 1895년 청일전쟁 후 러시아를 지원하여 일본의 요동반도 획득에 반대한 3국간섭도 이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로 인해 동아시아 문제에 과도한 공약을 함으로써 유럽에서 프랑스의 위치가 위협받는 상황이 조성되는 것은 허용치 않았다. 1902년 러시아는 영일동맹에 반발하여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이해를 러불동맹의 정신에 따라 보장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프랑스는 이 동맹을 동아시아에 확대 적용하기를 거부했다. 프랑스는 또 강력한 해군력을 갖은 영국과 해외에서 대립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더구나 유럽에서 독일을 상대로 잠재적인 동맹국이 될 수 있는 영국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프랑스의 취약성은, 곧 언급하겠지만, 러일전쟁 직전 일본이 러·일 분쟁을 중재하려는 프랑스의 시도를 간단히 거부한 데서 잘 나타나 있다.355)White, Op. cit., pp.124∼127.
Nish, Ian H., The Anglo-Japanese Alliance-the Diplomacy of Two Island Empires 1894∼1907(London:Athlone, 1966), p.238.
李昌訓,<20세기 초 프랑스의 對韓정책>(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한불 외교사 1886∼1986≫, 평민사, 1987), 113∼117쪽.
이같은 이유에서 독일이나 프랑스의 존재는 1890년 이후 동아시아 정치에서 끊임없이 등장하였지만 항상 보조적인 역할만 담당했으며 결정적인 계기에는 사라졌던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이상과 같은 열강들의 세력분포와 정책목표는 (한국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러일전쟁 前後 시기에 동아시아 국제정치에 실질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세력은 일본·러시아·영국 그리고 미국으로 제한된다는 점이다. 둘째 이 지역에 직접적인 정치적·전략적 이해를 가진 일본·러시아를 제외한 열강들은 경제적 이익 보호를 위해 군사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한반도 문제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한반도는 열강의 국제정치 게임에서 종속적 장으로 기능하는 동아시아 무대에서 그들의 이해가 집중된 중국에 대한 정책에 또 종속되어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영국과 미국 등 해양세력이 대륙의 강대국을 상대로 군사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유럽의 경우 19세기 중엽부터 어려워진다. 따라서 이들은 유럽의 정세가 계속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열강들간에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동아시아 지역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기보다는 지역의 강대국과 제휴하거나 세력균형의 유지라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기존의 이해를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가지 언급할 것은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영국과 러시아간의 대결이다. 소위 영·러 대결은 크리미아전쟁에서부터 국제정치를 규정하는 하나의 틀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러시아의 남진정책은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영국의 식민지적 이해와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영국이 항상 일률적인 방식으로 이에 대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국은 그들의 이해가 중요한 지역에서는 당연히 러시아 남진을 다른 열강과의 동맹(1878 베를린회의)이나 군사적 수단(아프간전쟁, 1878∼1885)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저지했다.356)영국의 아프간전쟁에 대해서는 Porter, Bernard, The Lion’s Share-a Short History of British Imperialism 1850∼1983, second edition(London:Longman, 1975), pp.86∼88 참조. 그러나 영국의 이해가 희박한 지역에서는 외교적 흥정이라는 유연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동아시아 사태 중 일부 그리고 한반도 문제가 이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영국은 러시아가 양자강 유역에 대한 영국의 영향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만주에서의 러시아 영향권을 인정했다(1899). 한반도에서는 거문도 점령(1885) 이후 러시아와의 대결정책이 현명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상업용 항구를 획득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표명하였다.357)Salisbury to Satow, 1896. 2. 19(朴日槿 편,≪근대한국관계 영·미외교자료집 1887∼1898≫, 부산대, 1983, 707쪽).
영국이나 미국 외교문서는 관례에 따라 발신인 to 수신인, 날짜, FO(Foreign Office, 영국 외무성, 미국의 경우는 없음), 분류번호, 문서철 번호, 문서번호 순으로 표기한다. 일반적으로 발신인은 해외주재 대사·공사·총영사이며 수신인은 외무장관·국무장관이다. 간행된 문서는 문서의 분류번호 대신 문서집 이름으로 대신하겠다. 예를 들어보면 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DBFP(Documents on British Foreign Policy) 등 이다.
이것은 영·러 대결이라는 국제정치의 중요한 요소가 동아시아나 한반도에 절대적으로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러일전쟁도 이상과 같은 국제정치의 구조에서 전쟁의 원인이 싹텄던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러일전쟁의 기원을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에서 찾았다.358)Malozemoff, Andrew, Russian Far Eastern Policy 1881∼1904-with Special Emphasis on the Causes of the Russo-Japanese War(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58).
Nish, Ian H., The Origins of the Russo-Japanese War(London:Longman, 1985).
즉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함으로써 이 지역을 지배하던 중국 중심의 華夷體制가 완전히 소멸되면서 국제체제상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열강들이 동아시아 정책을 조정하면서 전쟁의 원인이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화이체제는 아편전쟁 이후 붕괴과정을 겪어 왔지만 열강들은 여전히 중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들의 동아시아 정책을 추진해왔었다. 그러나 일본의 승리와 이에 따른 戰後 처리는 열강들의 동맹관계와 맞물려 열강들의 이해 충돌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변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세력이 러시아와 영국이다. 청일전쟁 이전까지 친중국적인 정책을 견지하고 또 중국의 패배를 예상하지 않았던 영국으로서는 종전 후 갑자기 동아시아 정책의 동반자를 잃은 상황을 맞게 되었다. 더구나 이 지역에 대한 열강들의 진출이 가속화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지위가 약화된 영국은 일본의 요동반도 획득을 저지한 3국간섭에서 제외됨으로써 그 취약성이 더욱 노출되었다. ‘영광된 고립’이란 일반적으로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의 대륙정책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정확한 의미에서는 바로 이 시기 영국이 열강들로부터 고립되었다는 일종의 위기감을 나타낸 것이다.359)Howard, Christopher, Splendid Isolation(金相洙·金元洙 공역,≪대영제국의 ‘영광스러운 고립’≫, 한양대 출판부, 1995, 1∼2장). 이에 영국은 일본이 이 지역의 신흥 세력으로 부상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나아가서 영국과 일본의 이해가 ‘충돌하지 않는다’는 평가아래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침략성을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정책의 동반자로서 일본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360)Langer, Op. cit., pp.173∼174·185∼186. ‘동반자’란 국제정치의 협력과 갈등이란 양 극단적인 현상에서 협력의 최고 형태인 동맹관계를 의미하는 데 영·일 양국의 경우는 영일동맹으로 구체화된다.

 중국은 영국의 배반과 일본의 중국 침탈에 대항하여 러시아와 협조관계를 형성했다.361)중국의 대외정책을 총괄하던 李鴻章은 영국의 정책변화를 두고 ‘이기적이고 단견’이며, 중국은 영국의 배반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Ibid.) 러시아는 1860년 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지만 이 지역에서 인적·물적자원 등 대외정책을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극히 조심스러운 접근을 시도해왔다. 즉 러시아는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에게는 절대적 이해가 걸린 지역이며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전략적 가치를 부여하는 지역이므로 동아시아에서 전쟁 수행능력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한 러시아가 이들 3국을 상대로 모험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강들은 한국의 개국에서부터 볼 수 있듯이 그들의 동아시아·한국 정책에서 ‘러시아’라는 요소를 항상 고려해왔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362)Malozemoff, Op. cit., 1∼2장, 특히 pp.15∼17.
Langer, Op. cit., pp.169∼171.
청일전쟁도 이런 의미에서 러시아의 시베리아철도 건설로 야기된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변화를 우려한 일본의 예방전쟁이라는 측면이 강하다(구대열,≪한국 국제관계사 연구 1-일제시기 한반도의 국제관계≫, 역사비평사, 1995, 27∼28쪽). 한국의 개국에 있어 러시아의 간접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구대열,<한국의 대서방 개국 문제의 재검토>(≪사회과학논집≫ 3, 이화여대, 1983) 참조.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팽창이 크게 진척되면서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도 높아진다. 그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 3국간섭이었다. 러시아는 패전 후 안보위협을 느끼는 중국을 지원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열강들의 견제를 일거에 떨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는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은 중국의 정치적 중심부인 북경 주변과 한국의 독립을 직접 위협하는 것이라 경고하고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이 이를 중국에 반환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실제로 우려한 것은 일본의 요동 진출이 러시아가 구상하고 있던 시베리아철도와 만주 경영에 장애가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시베리아철도란 러시아가 중국·러시아 국경선을 따라 건설 중인 노선을 중국·몽고·러시아 3국의 국경선이 만나는 치타에서 만주를 가로질러 하얼빈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계획한 부분을 말한다. 결국 러시아는 일본이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하도록 주선한 대가로 후일 동만주철도로 알려진 이 철도 건설권과, 일본이 시모노세끼조약에서 중국으로부터 획득한 군항인 대련항을 조차하며, 그외 중국과 15년 기간의 방어동맹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 것이다.

 중·러관계의 밀착화는 동아시아 지역의 세력균형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한 것이었다. 제국주의시대의 철도건설은 19세기말 아프간과 페르시아에서 진행된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진행된 영국과 독일간의 경쟁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 팽창의 전단계로 평가되는 것이다. 일본 역시 이같은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한반도의 철도 건설에 착수하며, 열강들은 이후 일본이 철도건설을 통한 영향력 확대가 합방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했다.363)Jordan to Grey, 1914. 11. 16, FO/371/2018(83412/35445).
Jordan to Curzon, 1919. 9. 5, DBFP, First Series, Vol. 6, p.731.
러시아도 동만주철도의 경비를 구실로 경비병을 파견할 것이며 또 철도의 완성 후 필연적으로 뒤따를 경제적 침투를 고려하면 동만주철도 부설권의 확보는 중국영토의 추가분할 내지 만주합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러시아는 이 철도의 황해 출구를 구실로 후일 남만주철도로 알려진 지선부설권과 여순항을 획득함으로써 러시아의 팽창은 북만주 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인 발해만까지 확장되며, 자연히 한반도도 그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364)이 시기 만주 철도건설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Adu, Emmanuel O., ‘British Diplomatic Attitudes towards Japanese Economic and Political Activities in Korea, South Manchuria, Kwantung and Shantung 1904∼1922’(Ph.D thesis, University of London, 1976), 3·5장.
Lin, Tung-chi, ‘Political Aspects of the Japanese Railway Enterprises in Manchuria’, The Chinese Social and Political Science Review, 14(1930. 4).
Spinks, Charles Nelson, ‘Origin of Japanese Interests in Manchuria’, The Far Eastern Quarterly, 2∼3(May, 1943).

 그러나 한국의 관점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1896년 6월에 체결된 李鴻章-로바노프(Lobanov)조약으로 알려진 중·러 비밀군사동맹이다. 이 조약은 러시아가 동만주철도에 대한 대가로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공동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응한다는 것인데 그 대상 지역을 동아시아의 러시아 영토, 중국 및 한국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이 포함된 것은 高宗의 아관파천(1896. 2)으로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됨으로써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이 만주와 한국을 포괄적으로 취급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이때까지 한반도에 관한 한 온건했던 러시아의 정책이 적극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후일 러일전쟁에서 양국의 전쟁목표가 만주인가 혹은 한반도인가라는 논의와도 관련되는 부분이다.

 러시아의 팽창정책은 동아시아 지역수준에서는 영국과, 한반도라는 국지적 수준에서는 일본과 경쟁관계를 재연시켰다.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이 만주에 한정되지 않고 영국의 영향권인 양자강까지 계속 남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상유지 혹은 세력균형을 파괴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러·일간의 각축은 로바노프-야마가타협약(1896. 6), 로젠-니시협약(1898. 4)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명목상으로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공동관리에 합의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한국의 독립이 이 시기 상당부분 손상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38선 분할 획책, 러시아에 의한 1896년 압록강 유역 목재이권, 1900년 마산포사건, 1903년 5월의 용암포사건 등이 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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