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Ⅲ. 러일전쟁
  • 2. 러일전쟁의 경과와 전후처리
  • 2) 전후처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
  • (3) 포츠머스조약

(3) 포츠머스조약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 종결을 위한 평화회담은 앞선 언급한 여러 이유에서 1905년초부터 제기되었다. 일본은 4월 8일 군부의 건의에 따라 각의에서 평화회담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한국에 대한 자유행동권, 요동반도 조차권 양도, 배상’ 등의 조건으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러·일간의 평화회담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전선에서 계속 패배하고 있던 러시아는 동진 중인 발틱함대가 전세를 반전시켜 줄 것으로 믿고 협상을 거부함에 따라 해전의 추이를 기다려야만 했다. 결국 발틱함대가 동해에서 전멸당한 후인 6월초 러시아는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아시아에서 러시아령의 전부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설득을 받아들임으로써 교전 당사국들은 미국 뉴헴프셔(New Hampshire)주의 포츠머스 군항에서 평화회담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회담에 러시아측에서는 위테(Sergei J. Witte)가 전권 수석대표로, 로젠(Romanovich R. Rosen) 주일공사가 차석대표로, 일본측에서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상이 수석대표로, 다카히라 코고로(高平小五郞) 주미공사가 차석대표로 참석, 8월 9일 예비회담이 열렸다.

 일본은 러시아측에 12개 평화조건을 제시하였는데 주요 내용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군사·경제상의 우월적 이익 및 지도·보호·감리의 권리 승인(1조), 러시아의 만주 철병 및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 및 경제적 기회균등과 배치되는 특권의 포기(2조), 요동반도 조차권 및 남만주철도 권익 양도(3조 및 7조), 사할린 양도(5조), 전비 변상(9조), 중립국이 억류 러시아 전함을 일본에 교부할 것(10조), 극동 해군력 제한(11조), 오호츠크해·베링해·동해 연안의 어업권 허여(12조) 등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우선 러시아는 이번 전쟁은 전승국과 패전국이 확정되지 않는 상태에서 종결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여 국가적 위엄을 손상시키는 영토할양이나 전비 배상, 그리고 러시아의 전략적 이해를 제한하는 문제들은 어떠한 양보도 거부했다. 구체적으로 사할린 양도나 전비 보상, 극동 해군력 제한 등은 양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외 중립국이 억류하고 있던 러시아 전함의 양도는 국제법과 러시아 국내법에 위반된다는 근거로 거부했다. 러시아의 강경 자세는 만주 주둔군이 강화되어 전쟁을 계속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외 일본이 제기한 조건들에 대해서는 타협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416)평화회담의 양측 대표들 간의 협상 기록은 Kajima, Op. cit., Vol. Ⅱ, 6∼8장. 특히 러시아의 입장은 수석대표 Witte의 회고록에 잘 나타나 있다(Yarmolinsky, Abraham(ed.), The Memoir of Count Witte, London:Heinemann, 1921, 15∼16장). 그외 김경창, 앞의 책, 540∼547쪽;White, Op. cit., 12∼16장 참조. 일본도 국내여론을 의식하여 배상과 영토할양을 강력히 요구함에 따라 회담은 결렬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이 평화회담의 성공을 위해 러시아 황제를 설득하고 또 일본에게는 배상을 포기토록 함으로써 러시아가 사할린 남부(북위 50도선 이남)를 양도하는 선에서 타협, 9월 5일 포츠머스조약이 조인되었던 것이다.417)포츠머스조약의 전문은 FRUS, 1905, pp. 824∼828;Kajima, Op. cit., Vol. Ⅱ, p.391.

 그러나 러·일간의 협상과정은 이 지역의 열강관계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러시아는 이 조약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지위를 영·미와 비슷한 수준으로 인정하기는 했으나 양국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영·미 양국은 러시아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세력균형은 유지되고 있다고 평가하는 반면, 러시아는 일본이 러시아 권익을 획득하는 것 자체가 균형을 파괴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일본이 취한 권익의 수준과 성격도 영·미의 해석과는 달리 러시아의 안보 등 중요한 국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경제적 우월권, 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정치적 우월권을 갖느냐 혹은 군사적 자유권까지 보장받는냐는 차이도 중요하였다. 또 현 단계에서는 패전으로 양보가 불가피하지만 언제인가 이를 회복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요구하는 권익의 성격을 가능하면 잠정적·가변적인 것으로 한정해야 했다. 일본의 한국지배가 합방과 같이 항구적인 것이면 러시아가 권익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명목상 이유를 내세워 일본이 차지할 권리의 성격을 제한하려 했다. 우선 러시아는 한반도가 러시아의 영토가 아니기 때문에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일본의 우월적 지위는 인정한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의 독립과 주권 존중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한국의 독립은 국제적으로 승인된 것이므로 전쟁을 종결하는 러·일 양국의 조약이나 결정에 의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며, 또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에는 서명할 수 없다는 것이 러시아의 명분이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평화협상에서 한국의 독립유지를 강조하였으며 2차영일동맹의 한국조항도 일본의 한국지배가 합방 전의 단계라는 점에서 수락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 다음 러시아는 이 전쟁이 대륙에 거점을 확보, 팽창적 의도를 갖고 있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음으로 한반도와 관련하여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는 전략적 불이익을 초래하는 조치는 수락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연해주를 직접 위협하는 일본군의 북한지역 주둔이나 한반도의 무장화 혹은 블라디보스토그의 비무장화는 인정할 수 없으며 또 러시아 함대의 대한해협 통행을 보장하기 위해 한반도 남단은 비무장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최종 조약안은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월적인 정치적·군사적·경제적 권익의 인정, 일본이 이를 보호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를 러시아가 방해·간섭하지 않을 것과 한·러 국경지대에서 양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군사행동을 자제할 것 등으로 조정되었다.418)White, Op. cit., pp.251∼254·268∼271. 한반도와 관련하여 앞으로 러-일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제2조이다(FRUS, 1905, p.825).

 포츠머스조약은 전통적인 세력균형정책의 운용이 낳은 전형적인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조약으로 과거 동아시아에서 수정주의적 정책을 추진해왔던 러시아의 목표가 일단 좌절되었다. 19세기말 이래 이 지역의 국제정치에서 변화추구적 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해 온 러시아가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은 종전 후 러시아가 비록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주요 행위자로 존속한다고 할지라도 그 역할이나 위상이 과거와 같을 수 없으며, 따라서 전후 이 지역의 열강관계에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사국인 일본과 러시아만이 아니라 미국·영국 등 열강들에게도 해당된다. 한 지역의 국제체계가 여러 가지 이유에서(동아시아에서는 일본과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정책에 의해) 긴장과 갈등이 조성될 경우, 흔히 전쟁이나 주변의 약소국을 분할하는 상호보상의 방법으로 이를 해소했다. 1905년 동아시아의 경우 러·일 양국은 전쟁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해관계를 조정했다. 그 대상이 러시아 영토의 일부인 사할린도 포함되었으나 대부분이 한반도와 만주라는 제3의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에서 러시아가 보유했던 권익들을 일본에 양보함으로써 보상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형태의 세력균형이 형성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영·미 양국은 보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양국은 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이 양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확신했다. 양국의 이권은 침해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원인이었던 러시아의 문호개방 거부라는 장애가 제거됨으로써 앞으로 더욱 활발한 상업활동을 보장받았다. 이들의 낙관적인 평가는 한국문제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양국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과거 러시아가 보유한 이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한반도에서 양국의 이해는 침해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양국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 방식 즉, 보호권이나 합방 등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태도로 연결되는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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