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1. 국권의 제약
  • 1) 한일의정서와 부수협정의 체결

1) 한일의정서와 부수협정의 체결

 일제의 韓日議定書체결을 위한 시도는 러일전쟁 이전 러일교섭의 회담이 진행중이던 1903년 10월부터 비밀리에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매수공작금을 투입하여 친일파 李址鎔·閔泳喆·李根澤을 조종하면서 추진시켜 1904년 1월 24일에 다음과 같은 밀약이 조인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韓日議定書(案)

 대한국 외부대신 임시서리 육군참장 이지용과 대일본 황제폐하의 특명전권공사 임권조는 각 상당한 위임을 받아 아래의 조관을 협정한다.

 1. 한일 양국은 국제상의 장애를 엄중히 조처하여 정의를 완전케 소통한다.

 2. 동아 대국평화에 관하여 만일 형세의 변화가 있으면 한일 양국이 성실한 우의로 상호 제휴하여 안녕질서를 영구히 유지한다.

 3. 미비 세목은 외부대신과 일본대표자 간에 형편에 따라서 협의하여 정한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日韓議定書>(影印本, 國史編纂委員會, 1991), 문서번호 706, 1904년 11월 21일).

 일본의 강압에 대해 한국정부는 국외중립 선언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고자 노력하였다. 국외중립은 전부터 논의된 적이 있었으나 일본정부가 자국의 주한공사 하야시에게 의정서 체결을 훈령한 9월경에 이미 중립보장을 일본정부에 요청하며 자구책 마련에 고심했던 것이다.424)한국정부는 이와 같은 중립보장의 요청을 문서로 작성해 주일한국공사 高永喜로 하여금 일본외무성에 전하도록 했다(日本外務省,≪日本外交文書≫36-1, 事項 7<韓國ノ中立保障要請ノ件>, 문서번호 697, 韓國ノ中立保障要請ノ件, 723쪽). 그러나 이미 전쟁준비까지 완료하고 있던 일제는 “지금에 있어서 兵戌를 談하고 중립을 語함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며 또한 시기에 적절하지도 않다”425)≪日本外交文書≫36-1, 事項 7<韓國ノ中立保障要請ノ件>, 문서번호 700, 韓國國外中立ニ關シ回答ノ件, 724∼725쪽 참조.고 강변하면서 한국정부의 중립보장 요구를 거절했다. 러시아 역시 만일의 사태시 한국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엄정중립을 지키기 어려우므로 차라리 러시아공사관의 보호를 기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 중립 승인을 사실상 거부했다.426)徐榮姬,≪光武政權의 국정운영과 日帝의 국권침탈에 대한 대응≫(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8), 145쪽.

 1904년에 접어들면서 러일간의 개전이 촉박해지는 가운데 의정서 체결이 부득이한 단계에 이르자 한국정부는 1월 21일 재차 국외중립 선언을 각국에 동시 성명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였다.427)≪日本外交文書≫37-1, 事項 4<韓國中立聲明關係ノ件>, 문서번호 334, 韓國ノ中立聲明ニ關スル件, 311∼312쪽. 이 중립선언은 극비리에 李容翊·玄尙健 등이 프랑스어 교사 마르텔(Martel), 벨기에인 고문 데레베유(Delevigue) 등과 연계하여 프랑스공사를 통해 중국 芝罘에 체류하던 밀사 李學均 등에게 타전되어 그곳에서 각국 정부에 동시에 통고되었다. 때문에 일본정부로서는 사전에 이를 저지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같은 달 21일부터 29일 사이에 영·독·불·이태리의 주한 각국 공사들은 각기 본국정부를 대신하여 이 성명을 받아들일 뜻을 회답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1904년 정초를 전후하여 전쟁 결행과 한국의 군사적 점령을 위해 인천·부산·군산·마산 등지에 군수물자를 수송해 오고 2월 6일에는 러시아와 국교단절을 선언했다. 이어 일제는 다음날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정을 급습함으로써 전쟁을 도발하였다. 2월 9일에는 지상군 2천명을 선발대로 하여 대규모 병력을 인천을 거쳐 서울에 진주시켜 서울 일원을 장악, 중립선언을 무력화시켰다.428)尹炳奭,<日帝의 舊韓國强占과 武力 위협>(≪韓國史 市民講座≫19, 一潮閣, 1996), 57∼61쪽.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공사 파블로프(Pavlov)는 공사관 직원 및 자국의 병사들과 함께 서울에서 철수함으로써 청일전쟁 이후 10년간 일본과 세력을 다투던 러시아 세력은 한국에서 물러나게 되었다.429)松宮春一郞,<露國公使の京城撤退>(≪最近の朝鮮≫, 早稻田大學出版部, 1905), 21∼25쪽.

 한국을 군사적으로 장악한 일본은 무력을 배경으로 의정서의 체결을 서둘렀다. 일본공사 하야시는 일본군 12사단장 이노우에와 더불어 1월에 체결하려다 실패한 한일의정서 체결을 한국정부에 강박하였다. 이때 조약의 조인에 반대한 탁지부대신 겸 내장원경 李容翊은 2월 22일 밤 일본군에 납치되어 ‘遊覽’의 명목으로 일본으로 추방되어 10개월간 연금되었다. 그외 보부상단 두목이었던 鎭衛隊 제4연대장 吉永洙, 육군참장 李學均, 참령 玄尙健 등 조약의 조인에 반대한 주요 인사들도 서울에서 추방되었다.430)海野福壽,≪韓國倂合≫(岩波書店, 1995), 130쪽. 마침내 2월 23일에는 한국의 주권이 크게 침해되는 다음과 같은 한일의정서가 외부대신 이지용과 일본공사 사이에 조인되었다.

韓日議定書

 大韓帝國 황제폐하의 외부대신임시서리 육군참장 李址鎔과 대일본제국 황제폐하의 특명전권공사 林權助는 각 상당의 위임을 받아 아래의 조관을 협정함.

 제1조 한일 양 제국간에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친교를 유지하고 동양평화를 확립함을 위하여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를 확신하여 시정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용인한다.

 제2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을 확실한 親誼로 안전 강녕케 한다.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

 제4조 제3국의 침해로 인하여 혹은 내란을 당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형편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행함이 가하다. 그러나 대한제국정부는 위의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한다.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형편에 따라서 수용할 수 있다.

 제5조 대한제국정부와 대일본제국정부는 상호간에 승인을 거치지 않고 앞으로 본 협정 취지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간에 訂立할 수 없다.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되는 미비한 세부조항은 대일본제국 대표자와 대한제국 외부대신간에 형편에 따라서 협정한다(≪日本外交文書≫37-1, 事項 5<日韓議定書締結ノ件>).

 한일의정서의 내용은 1월 24일에 체결하려던 것보다 일본의 한국침략을 한층 용이하게 한 것이었다. 비록 제2조와 제3조에서 한국정부에서 주장하던 조문인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영토보전을 보증한다고 규정하였으나 실은 실효성이 전혀 없는 空文에 불과했다. 오히려 제1조·제4조·제5조·제6조 등에서 한국정부의 주장을 묵살하여 그들의 군사적·정치적·외교적 측면에서의 식민지 경영을 합리화하는 규정을 넣음으로써 ‘을사오조약’ 체결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때문에 한일의정서의 체결로 한국정부가 끈질기게 추구한 국외중립 선언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431)徐榮姬, 앞의 글, 158쪽.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함으로써 한국 식민지화 경영에 한발 다가선 일본은 이후 이 조약문을 근거로<대한방침>·<대한시설강령>과<細目>등 식민지 경영을 위한 세부계획을 마련, 1904년 5월말 일본 각료회의에서 이를 의결한 뒤 일왕의 재가를 받아 확정·시행했다.432)尹炳奭,<乙巳五條約의 신고찰>(≪國史館論叢≫23, 國史編纂委員會, 1991), 34쪽.<대한방침>에서 일제는 “帝國은 한국에 대해 政事上·軍事上 보호의 실권을 확립하고 경제상으로 더욱 우리 이권의 발전을 도모할 것”이라 하여 한국 침략의도를 노골화했다.

 <대한시설강령>과<세목>은<대한방침>에 따라 구체적인 식민지화 방안을 명시한 것으로 국방·외교·재정·교통·통신·拓植의 6개 조항으로 되어 있다.433)<對韓施設綱領>6개항은 다음과 같다. ① 防備를 온전히 할 것. ② 外政을 감독할 것. ③ 財政을 감독할 것. ④ 교통기관을 장악할 것. ⑤ 통신기관을 장악할 것. ⑥ 拓植을 도모할 것. 먼저 제1항에서는 한국에 일본군을 영구 주둔시켜 한국의 국방을 장악하는 동시에 한국 국민으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일본에 의존시키며 한국 영토내 및 연안에서 모든 군사상 필요한 지역을 자의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제2항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를 감독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원만하게 일본의 이익과 정책의 수행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3항은 한국의 재정권을 장악·탈취하는 동시에 재정의 곤궁을 핑계삼아 친위대를 제외한 여타의 한국군을 해산하고 재외공관을 철수시킨다는 것이다. 제4항과 5항에서는 철도를 비롯한 모든 교통기관 및 통신기관의 운용을 일본이 관장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6항에서는 농업·임업·광업·어업 등에서 일본의 한국에 관한 척식 방안을 규정하였다.434)≪駐韓日本公使館記錄≫24,<1904년 長谷川·丸山·스티븐스에 對한 訓令及對韓施設綱領並加藤增雄傭聘契約>, 문서번호 13, 1904년 7월 8일, 機密送제51호.

 이러한 강령과 세목을 확정한 일본은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각 조항의 계획들을 강력히 실천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됨을 이용, 1904년 8월 22일 한일의정서 제1조에 규정된 ‘내정개선’을 구실 삼아<한일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를 외부대신 서리 尹致昊와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했다.435)≪日本外交文書≫37-1, 事項 6<日韓協約締結ノ件>참조.

 이 협정서의 체결은<대한시설강령>의 제2항과 제3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이 협정에 따라 대장성 主稅局長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를 재정고문에, 또한 20여 년간을 일본정부에 고용되어 충성을 바친 미국인 스티븐스(Stevens)를 외교고문에 취임시켰다. 이를 통해 한국의 외교와 재정을 감독·정리한다는 미명하에 외교권과 재정권을 침식해 갔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이와 같은 일을 충분히 실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용빙계약에서 그 권한을 부여하였다. 즉 재정고문은 첫째 한국정부의 재정을 정리·감사하며 재정상의 제반시설에 관하여 심의·기안할 책임을 가진다. 둘째 재정에 관한 한국정부의 각종 회의에 참석하여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음은 물론 의정부 결의 및 각부의 사무상 재정에 관계된 것은 상주하여 결재를 받기 전에 반드시 재정고문의 동의 서명을 요하게 한다. 셋째로 재정상에 관한 의견을 청하여 상주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436)≪日本外交文書≫37-1, 事項 6<日韓協約締結ノ件>, 문서번호 424, 目下田韓國財政顧問傭聘契約電報ノ件, 373∼374쪽.

 다음으로 외교고문은 첫째 한국정부가 타국 정부 혹은 타국 인민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외교상 및 기타 안건에 관하여 심의 입안할 책임을 갖는다. 둘째 한국의 외교에 관한 일체의 왕복문서 및 모든 안건은 사전에 반드시 외교고문의 동의를 구하고 또한 의정회의에 참여하여 외교에 관한 제의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셋째 한국황제를 알현하여 외교상 의견을 上奏할 수 있게 하였다.437)≪日本外交文書≫37-1, 事項 6<日韓協約締結ノ件>, 문서번호 426, 韓國外交顧問‘スチーブンス’氏契約案竝同氏宛內訓寫送付ノ件, 374∼376쪽 참조. 더욱이 두 고문의 권한은 한국정부가 자의로 변경하지 못하도록 하는 부수조건을 조약문 속에 명시하였다.

 이와 같은 재정 및 외교고문의 용빙계약에 의하여 한국의 주권은 한일의정서의 조인에 의한 것보다 가중한 제약을 받게 된 것으로, 한국은 이미 온전한 독립국이라고 볼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두 고문의 강제 용빙을 전후하여 조약에 하등의 조건도 없이 자진 초청한다는 형식을 빌려 각 부에도 모두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고문을 차례로 두게 하여 이른바 ‘고문정치체제’를 확립시켜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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