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1. 국권의 제약
  • 2) 일제의 한국 ‘보호국’화와 을사5조약
  • (3) 을사5조약의 체결

(3) 을사5조약의 체결

 주한일본공사 하야시는 이토보다 한발 앞서 11월 2일 서울에 돌아와 주한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협력하며 이토의 도착 즉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一進會로 하여금 조약을 찬성하는 취지의 선언서를 사전에 발표하게 하여 여론을 조작하는가 하면,451)≪駐韓日本公使館記錄≫25,<保護條約> 1, 문서번호 186, 1905년 11월 2일.
趙恒來,≪一進會 硏究≫Ⅴ장(中央大 博士學位論文, 1984) 참조.
沈相薰 등 원로대신을 조종하여 광무황제의 의사를 떠보는 한편 한국정부가 사전대책을 수립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452)≪日本外交文書≫38-1, 事項 10<伊藤特派大使遣韓ノ件>, 문서번호 238, 韓帝ノ不安除去ノ爲ノ工作竝ニ伊藤大使御親書奉呈ニ付報告ノ件, 484∼485쪽. 또 이완용 등을 사전에 찬성하도록 매수하였다.453)≪駐韓日本公使館記錄≫,<保護條約>1, 문서번호 220, 1905년 11월 18일. 이와 함께 일본 현지에서 증원병력을 받아 하세가와 사령관,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 미마시(三增久米吉) 영사 등 3자의 지휘하에 서울 특히 궁궐 내외에 물샐틈없는 경계망을 폈다.454)≪日本外交文書≫38-1, 事項 11<日韓協約竝統監府設置ノ件>, 534∼536쪽.

 사전준비가 완료된 시기에 맞추어 이토는 11월 9일 일왕의 친서를 가지고 내한하였다. 이토는 도착 다음날부터 행동을 개시했다. 이토는 11월 10일 12시경 광무황제를 알현하여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一從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전하면서 황제를 위협하였다. 11월 15일 정오경에 이토는 광무황제를 다시 알현하여 좌우를 모두 물리치게 한 뒤 사전에 준비한 조약의 원안을 제시하며 이의 체결을 강박하였다.455)이곳에서의 문답내용은≪皇城新聞≫, 光武 8년 11월 20일,<五件條約請締顚末>및≪日本外交文書≫38-1, 事項 10, 문서번호 249 附記 1, 韓國特派大使伊藤博文復命書, 496쪽 참조.

 11월 16일 아침에는 주한일본공사 하야시가 외부대신 朴齊純을 공사관으로 초치하여 정식 공문과 조약의 원안을 제시하고 종일토록 조약의 체결을 강박하였다. 한편 이토는 이날 오후 일본공사관에 간 박제순을 제외한 각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 등을 빠짐없이 그의 숙소로 ‘납치’하여 밤늦게까지 전날 광무황제에게 한 말을 되풀이하면서 조약체결의 찬성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내부대신 李址鎔·외부대신 박제순·군부대신 李根澤·농상공부대신 權重顯 등은 조약체결에 대한 찬성을 적극 표시하지는 않으면서도 대세상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456)위와 같음.

 11월 17일 오후 3시경 궁궐내 潄玉軒에서 군신회의가 열렸다. 이때 궁궐 내외에는 하세가와가 거느리는 완전무장 차림의 일본군이 몇 겹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일본군은 일본공사관 앞, 기타 서울시내 전역을 철통같이 경계하였으며 특히 시내의 각 성문에는 야포·기관총까지 갖춘 부대를 배치해 놓고 있었다. 다른 별동부대도 검을 찬 채 시가지를 시위 행진하였고 본회의장인 궁내에도 착검한 헌병 경찰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457)山邊健太郞,<日本帝國主義朝鮮侵略朝鮮人反抗鬪爭>(≪歷史學硏究≫특집호, 1953) 참조.

 그러나 극도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오후 3시부터 시작된 회의는 오후 8시가 되도록 누구하나 조약의 체결에 찬성하는 이가 없이 부결되어 일본측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합의까지 되었다. 이에 하야시는 이토와 하세가와를 다시 오게 하여 폐회하고 돌아가는 각 대신들을 강제로 다시 모이게 하여 회의를 재개하게 하면서 황제의 알현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제대로 되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다음날 새벽 12시 30분경까지 대신들에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조약의 체결을 강박하였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을사오적’의 찬성을 받아낸 이토와 하야시는 황제의 윤허도 받지 않고 그들 스스로 外部印을 탈취하여 조약문에 조인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을사오조약은 개인에 대한 무력적 강제와 협박, 국가 최고주권자의 승인·서명·國璽의 날인을 받지 않고 체결된 불법 조약이었다.458)金吉信,<すべての旧‘條約’は不法, 無效虛僞文書>(海野福壽編,≪日韓協約と韓國倂合≫, 明石書房, 1995), 23∼29쪽. 을사오조약의 불법성은 ① 강제에 의한 조약의 체결, ② 이토에게 조약체결의 전권 위임, ③ 한국측 수석대표(한규설)의 거부·불참, ④ 한국 外部의 官印을 탈취하여 날인, ⑤ 고종의 비준이 없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琴秉洞,<乙巳保護條約强制調印問題點>, 위의 책, 54∼61쪽).

 이상과 같이 강제로 조약이 체결, 조인된 일시는 1905년 11월 18일 오후 2시경이었으며 조약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韓日協商條約459)이 조약의 題名은 韓日文 原本에 다 欠如되었다. 그러나 후에 한국은 이 조약의 명칭을 ‘韓日協商條約’이라 하고 일본은 ‘日韓協約’ 혹은 ‘韓國保護條約’이라 통칭되었다.

 한국정부와 일본국정부는 양 제국을 결합하는 이해 공통의 주의를 확고하게 함을 원하여 한국의 富强之實을 인정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하여 아래 조관을 약정함.

 제1조 일본국정부는 재토쿄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에 한국이 외국에 대하는 관계와 사무를 감리·지휘함이 가하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신민과 이익을 보호함이 가함.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한국정부는 금후에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아니하고 국제적 성질을 갖는 하등의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기로 相約함.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闕下에 1인의 통감(Resident General)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감리함을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폐하를 內謁하는 권리를 가짐. 일본국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과 기타 일본국정부가 필요로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Resident)을 두는 권리를 갖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일체 사무를 관리함이 가함.

 제4조 일본국과 한국간에 현존하는 조약과 약속은 본 협약 조관에 저촉하는 것을 제외하고 모두 그 효력을 계속하는 것으로 함.

 제5조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한다.

 위에 의거하여 下名을 각 본국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 조인한다.

光武 9년 11월 17일 외부대신 朴齊純

明治 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 林權助

 조약문의 내용은 전술한 일제측의 원안과 수식상 몇 군데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일제측이 “수정은 결국 대체로 중대 관계없음을 인정하여 이를 용인하였다”460)≪駐韓日本公使館記錄≫25,<保護條約> 1, 문서번호 215, 1905년 11월 18일 往電제451호 참조.고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원안 그대로 체결된 것이다.

 원안과 달라진 곳을 보면 첫째 전문 중에 ‘한국의 富强之實을 인정할 수 있게 될 때까지‘라는 말이 추가되었다. 이는 한국측에서 이 조약의 유효기간을 정하든가 혹은 외교권 還付에 관한 규정을 따로 두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자 무마용으로 이같이 현실성없는 수식어를 넣었던 것이다. 제5조는 신설된 조항이었는데, 이는 한국측의 5대신이 찬성하면서도 광무황제에게 자기들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세우기 위해 이토가 휴대해 온 일왕의 친서 내용을 인용하여 간청하자 이토가 체면상 넣도록 한 것이다. 다음으로 제1조 중에 ‘완전히 自行’이라는 것과 제3조 중에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감리하기 위하여’라는 문구의 증삭이 있는 것도 황제에 대한 체면을 세우고자 ‘통감은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명기하자고 주장하는 바람에 이토가 이를 피하기 위하여 약간 고친 것이었다.

 이 조약의 체결에서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끝까지 ‘不可’를 주장하였고, 나머지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이근택·내부대신 이지용·외부대신 박제순·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五賊’은 책임을 광무황제에게 미루면서도 찬의를 표하였다.

 광무황제의 태도는 후에 궁내부대신으로부터 이 조인 전말을 듣고 ‘이와 같이 중요한 조약을 그와 같이 용이하게 급격히 체결을 보게 된 것은 千載의 遺恨’이라 하며 ‘대신 등의 무능·무기력은 心外에 견딜 수 없다’고 개탄하였다고 한다.461)≪駐韓日本公使館記錄≫25,<保護條約>1, 문서번호 245, 1905년 11월 20일 監秘제6호 참조. 그리고 이 조약이 조인된 지 10일이 채 안된 11월 26일 비밀리에 淸의 芝罘 경유로 미국에 체재 중이던 헐버트(H. B. Hulbert)에게 자신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한·일 양국간에 체결된 소위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며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니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보내기도 하였다.462)≪大韓每日申報≫, 光武 9년 11월 27일 號外<韓日新條約請締顚末>.
김기석,<光武帝의 주권수호 외교, 1905∼1907 : 乙巳勒約 무효선언을 중심으로>(≪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까치, 1995) 참조.
그러나 조약이 체결되던 당일 밤에 이토의 알현 요청시 이를 거절하면서도 ‘정부대신과 협의하라’463)≪皇城新聞≫, 光武 8년 11월 20일<五件條約請締顚末>.
≪日本外交文書≫38-1,<韓國特派大使伊藤博文復命書>.
고 책임을 대신들에게 미루었으므로 전제군주제하의 국왕으로서 광무황제의 책임이 면제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을사오조약의 체결로 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을사오조약의 이와 같은 강제체결은 한국인을 분노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 거족적 항일운동을 촉발시킨 한 계기를 이루었다.464)을사오조약의 체결을 전후한 항일운동에 대해서는 崔永禧,<乙巳條約 締結을 前後한 韓國民의 抗日鬪爭>(≪史叢≫12·13, 1968) 참조.

<尹炳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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