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3. 통감부의 식민지화 정책
  • 1) 식민지화의 기반조성
  • (3) 군사기지화 작업

(3) 군사기지화 작업

 일제는 한일의정서에 의거하여,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광대한 토지를 철도 건설, 軍用地의 명목으로 헐값에 또는 무상으로 강탈하였다. 이렇게 확보한 토지에 일제는 다시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군사시설을 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점차 일제의 군사기지로 변모되어 갔다.

 한국의 군사기지화와 관련하여 일제가 제일 먼저 서두른 것은 철도의 부설이었다. 이는 한국의 간선철도인 경부·경의선이 모두 러일전쟁중 서둘러 개통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철도는 단지 군사적으로 긴요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강령>에서 ‘한국 경영의 骨子’라고 할 정도로 정치·군사·경제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597)이 시기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관련된 철도문제에 관해서는 정재정,≪일제의 한국철도 침략과 한국인의 대응≫(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2) 참조.

 일제는 한국내에 있었던 철도들의 통일적 운영을 기도하여, 1906년 7월 이후 모든 철도를 국유화하여 통감부 철도관리국 소관으로 하였다. 그 회계도 특별회계로 하여 일반회계와 분리하였는데, 1906년∼1910년간 총 철도투자액은 95,842,721원으로 당시 한국 3, 4년 예산의 합계에 달하는 거액이었다.598)조선총독부 철도국,≪조선철도사≫(1915), 270쪽 참조. 단 이 액수에는 1904년∼1906년간의 군사비 31,383,216원이 포함되어 있다. 또 1906년의 경우 경부철도매수비 33,000,863원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액수는 일제가 한국 철도건설에 투자한 총금액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일제가 철도에 투자한 약 9천6백만원이란 금액은 1905년∼1910년간 한국정부의 지출예산 중 가장 많았던 1909년의 것이 3천만 원을 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대규모였던가를 잘 알 수 있다(이윤상,≪1894∼1910년 재정제도와 운영의 변화≫,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6, 278∼279쪽 참조). 이외에도 한국내 철도는 러일전쟁의 결과 획득된 東淸鐵道의 부설권과 관련하여 건설·운영되어, 그 軌道도 ‘萬難을 물리치고’ 4척 8촌 5분(1.435M)의 표준궤간을 채택하게 되었다 한다. 당시 일본 국내도 협궤식을 채택하고 있던 실정이었다.599)조선총독부 철도국,≪조선철도 40년 약사≫(1940), 47쪽∼79쪽 참조.

 이같은 철도부설에 필요한 광대한 토지를 일제는 한국정부를 앞세워 또는 군사력의 위협 아래 국유지를 무상으로 또는 사유지를 헐값에 강제로 수용하였다.600)이에 대해서는 박만규,<한말 일제의 철도 부설.지배와 한국인 동향>(≪한국사론≫8, 서을대, 1982) 참조. 토지는 철도부설만이 아니라 兵營 등의 군사시설의 건설을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러일전쟁 개시와 함께 일본군은 1904년 2월 20일 진해만 부근의 토지를 해군 근거지로서 수용하였고, 2월 25일 거제도와 부근의 松眞과 전라남도 八口浦, 충청남도 어청도·절영도·영흥만 일대의 송전리 및 갈마반도, 영종도와 월미도 등지가 대부분이 군용지로 점유되었다.601)송지연,<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군용지 수용과 한국민의 저항-서울(용산), 평양, 의주를 중심으로->(≪梨大史苑≫30, 1997), 69쪽 참조.

 1905년 5월 대한해협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괴멸시킨 일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군용지 수용에 나섰는데, 특히 경의선 연선의 용산·평양·의주 및 군항으로서 진해와 영흥만 일대에 집중되었다.

 처음 일제는 용산·평양·의주 3지역에서 975만평을 수용할 계획이었으나 한국민의 저항에 부딪쳐 476만평을 한국정부에 반환하고 결국 약 400만평으로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약 100만평은 철도용지로 제공되었는데, 이는 이들 군용지가 애초에 군사철도의 주요지점에 설정되어, 임시군용철도감부 소유의 철도용지와 서로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602)金正明편,≪朝鮮駐箚軍歷史≫(1967), 2쪽 참조. 어쨌든 이같이 광대한 토지를 수용하는 데 든 돈은 단지 21만 5천원이었다고 하니(평당 약 4전), 얼마나 헐값에 약탈한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603)朝鮮駐箚軍經理部편,≪朝鮮駐箚軍永久兵營官衙及宿舍建築經過槪要≫(1914), 2∼3쪽 참조. 일제가 최종 지불한 21만 5천원을 군용지와 철도용지로 제공한 토지의 합계로 나눈 것이다. 1901년 당시 신문 1장 값이 7錢이었다 한다(송지연, 앞의 글, 77쪽). 이같이 헐값에 수용된 토지는 다시 일본상인들에게 헐값으로 불하되기도 하고, 일인들에 의해 다시 한국인들에게 비싼값으로 되팔리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한다(박만규, 앞의 글, 263쪽 및 송지연 위의 글, 82쪽 참조).

 이밖에 일제가 각지에서 兵營敷地, 헌병대부지, 운수부 부지, 수도용지, 사격장 용지 등으로 수용한 토지면적, 그 매수가격(약간의 가옥 이전비용 등 기타 비용 포함)을 보면 다음의<표 1>과 같다.

지 역 수용토지면적 매수가격 매수기간
마산 1,000,375평 5,683원 1907∼1909
부산·공주·대구
강릉·광주·전주·진해
62,197평
(58,399평)
79,854원 1907∼1913
함경북도
(청진·회령·나남지역 및 경흥)
20,360,247평
(12,664,229평)
315,413원 1907∼1913
원산 15,324평 12,100원 1908∼1909
합 계 21,438,143평
(12,722,628평)
413,050원  

<표 1>일제가 수용한 군용지의 내역

*면적의 괄호안은 수용된 토지 중 무상으로 제공된 관유지의 면적임.
*인천에서는 65,000원의 비용으로 토지 약간 및 건물 등을 군용지로 수용.
*출전:≪朝鮮駐箚軍永久兵營官衙及宿舍建築經過槪要≫, 2∼12쪽.

 위에서 우리는 일제가 수용한 토지가 마산, 함경북도 지역에 편중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군사상 이들 지역이 그만큼 중요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함경북도 지역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압도적인데, 이는 山城山 포병 사격연습장 약 1,869만평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제외시켜 놓고 보아도 약 173만평이라는 광대한 면적의 토지가 수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만큼 이 지역이 경의선 철도와 함께 對露 군사기지로서 중요했기 때문이었다.604)마산지역에서 수용한 토지에는 그 이전에 수용한 토지의 면적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 나머지 지역은 대개 헌병대 관련 시설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같이 수용한 토지에는 다시 일본군의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1906년 4월부터 조선주차군 1개 사단을 위한 병영 등이 건축되기 시작하는데, 그 비용은 1,500만원으로 책정되었다. 이에 따라 1913년까지 각지에 일본군의 군사시설이 들어차게 되었다.605)≪朝鮮駐箚軍歷史≫, 259∼260쪽 참조. 당시 한국정부의 예산의 대략 반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이같은 군사 기지화 비용은 한국정부의 예산과는 전혀 관계없이 집행된 것이다. 위의 토지 수용비와 함께 얼마나 막대한 액수가 군사기지화에 투입되었나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 鎭海는 한말부터 러일간의 쟁취 경쟁의 대상이 되었었는데, 이미 러일전쟁 때부터 일본해군에 의해 점거되었고, 함경남도의 永興과 함께 1908년 8월 27일 군항 예정지로 고시되었다. 이같이 군항으로 고시된 지역에서는 외국인에게 토지, 가옥, 기타 부동산의 ‘매각·교환·양여·전당 및 허가없이 貸渡’하는 것이 금지되었다.606)≪官報≫, 광무 10년 8월 27일 告示 참조. 그러나≪內部來案≫(奎17768) 등에 의하면 이같은 금지조항은 외국인과 관련된 경우에만 국한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또 국유지는 무상으로 제공되었고, 사유지는 한국정부가 매수하고 그 대금은 일본이 지급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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