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3. 통감부의 식민지화 정책
  • 1) 식민지화의 기반조성
  • (4) 행정·사법제도의 개정

(4) 행정·사법제도의 개정

 한일의정서 체결 후 노골적으로 전개된 이권탈취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이 거세지고, 일제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나오면서, 더욱 부각된 것이 바로 ‘시정개선’이란 말을 앞세운 행정·사법제도의 개정이었다. 대리공사 오기하라(萩原守一)는 이미 1904년 7월, 성급한 이권탈취가 한국인의 실망을 불러오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제언하였다.

시정의 개선 중 직접으로 인민의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중앙 및 지방관리의 收斂과 정부의 壓制를 금하는 것이 있다. 이를 위해 중앙에서 가까운 경기도를 模範 行政區로 만들어 우리가 생각하는 바의 善政을 먼저 경기도에서만 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金正明 편,≪日韓外交資料集成≫5, 문서번호 305, 1904년 7월 15일, 韓國荒蕪地開拓問題に關連し韓國內政改善意見上申の件).

 즉 지방관의 조세수탈과 정부의 압제를 금지하는 모범적인 선정을 경기도에만이라도 펼쳐서 한국인들의 저항을 잠재워 보자는 것이다. 당시 한국의 惡政·秕政은 누구나에 의해서 언급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이의 개선을 통해 한국인들의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토는 특히 사법제도의 개혁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한국 지배에는 한국인의 협조가 필요했으므로 먼저 한국민을 도탄의 고통에서 구해주어 인심을 수습하고 감복시켜 놓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법제도의 개혁이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1904년 10월 27일 官制彛整所를 설치하고 정부조직을 개정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주안은 첫째로 경비절감을 이유로 정부기구를 대폭 축소하고, 보다 중요하게는 황제권을 축소하고 반면 의정부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반일의 구심점이었던 고종의 힘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607)서영희,≪광무정권의 국정운영과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한 대응≫(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8), 204쪽 참조. 그래서 발표된 것이 1905년 2월 26의<의정부관제>였으나, 고종의 저항으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마침내 일제는 1907년 6월 14일<내각관제>을 발포했는데, 일본의 내각제를 모방한 이 법령에 의하면 내각총리대신은 내부·탁지부·군부·법부·학부·농상공부 등 각부를 통할하고, 필요한 경우 閣令을 발포하는 등 명실공히 정부수반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608)서영희, 위의 책, 288쪽 참조.

 이같은 상황에서 행정제도 개혁은 1907년 7월 정미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행정각부의 차관으로서 임명되고, 1907년 9월의<통감부및이사청관제>로 통감이 한국 국정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권자가 되면서 보다 급속하고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609)서영희, 위의 책, 288∼294쪽 참조.

 지방행정제도의 경우 일제는 1906년 5월 지방제도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들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1906년 가을 지방제도를 개정하였다. 그 요점은 飛入地·斗入地를 정리하고, 개항장 소재지의 郡을 府로 바꾸며, 府郡의 鄕長 및 巡校를 폐지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조치는 기존의 향촌질서를 크게 뒤흔드는 것으로 구래 향임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면장의 기능은 일제에 의한 조세징수와 지방 치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면서 점차 강화되어 갔다.610)이상찬,<1906∼1910년의 지방행정제도의 변화와 지방자치 논의>(≪한국학보≫42, 1986).
이영호,≪1894∼1910년 地稅制度 연구≫(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2), 289∼306쪽.
이로써 중앙·지방의 통치기구와 기능, 인사행정과 재무행정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고 획기적인 변화가 초래되었다.611)김운태,≪일본제국주의의 한국통치≫(박영사, 1986), 140쪽 참조.

 일제의 한국 재판제도 개혁 시도는 이미 갑오개혁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지만, 이 시기에 들어서 보다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는데, 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무엇보다 이것을 한국 시정개선의 핵심중의 하나로 보았기 때문이었다.612)남기정역,≪일제의 한국 사법부 침략 실화≫(육법사, 1978), 90·212쪽 참조. 보호국시기 이것은 1907년 1월 법무보좌관의 배치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말이 보좌관이었지 실제로는 각급 재판소의 판결에서 ‘감독-지시’의 권한을 휘둘러 재판권을 실제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613)전봉덕,<일제의 사법권 강탈과정의 연구>(≪애산학보≫2, 1982), 183쪽 참조.

 한편 1907년 7월 정미조약 제3조에는 “한국 사법사무는 행정사무와 구별할 것”이 규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이토가 사법제도 개량의 단서를 ‘행정관의 수중에서’ 사법권을 ‘독립’시키는 데서 찾았기 때문이었다.614)남기정역, 앞의 책, 90쪽 참조. 이 조약에 따른<한일협약실행각서>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재판소 설치에 관해 규정되어 있었다. 이와 함께 법률 제8호<재판소구성법>, 제9호<재판소구성법 시행법>, 제10호<재판소설치법>등을 공포하고, 12월 23일 칙령 제51호<법부관제>을 공포하였다. 이에 의해 재판은 區재판소·지방재판소·공소원·대심원의 4개급 3심제였으며, 일본의 재판소구성법을 모방하여 사법권의 한일간 통일을 꾀하였고, 재판소의 명칭도 또한 동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9년 7월 12일<한국 사법 및 감옥사무위탁에 관한 한일각서>가 교환되면서, 한국의 사법권은 완전히 통감부 소관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각서에 따라 일제의 재판소인 통감부 재판소의 신설을 보게 되고, 한국 각급 재판소는 법부와 함께 10월 31일 폐지되었다. 한국 법부에 속했던 사무는 통감부 사법청에 이관되고 각급 재판소에 속한 사무는 통감부 각급 재판소에 인계되었다.615)전봉덕, 앞의 글 참조.

 사법제도의 개혁은 일제 자신이 상당히 자부심을 가진 것이었고, 여기에 참여했던 일인들도 ‘모든 것을 일본식으로 엄정·공평한 자세로 권력에 굴하지 않고 부귀를 멀리하고 모든 인민을 동등하게 취급하도록 지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616)남기정역, 앞의 책, 68쪽 참조.던가 관찰사나 군수의 불법행위에 엄정히 대처한 결과 일반민중은 대환영이었다던가,617)남기정역, 위의 책, 120쪽 참조. 그 결과 ‘제도는 가장 새로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성적은 가장 良好’618)남기정역, 위의 책, 100쪽 참조.하였다던가 자화자찬하고 있었다. 官과 人民간, 양반과 평민 사이의 송사에 있어서는 이같은 일본인들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진보성은 ‘국사범의 재판에 관해서는 排日思想 등 관계 때문에 (한국인) 판검사가 小官의 의견에 따르지 않는 일’이 있어 곤란을 느꼈다는 한 일본인 법무참여관 촉탁의 회상이 암시하듯이,619)남기정역, 위의 책, 53쪽 참조. 한국의 주권이 제약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일제의 침략을 돕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이었으며, 결국 일제의 침략과 지배를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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