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1. 고종의 국권회복 노력과 강제퇴위
  • 1) 밀사파견 외교의 전개

1) 밀사파견 외교의 전개

 고종의 국권회복 노력은 1904년 2월 韓日議定書 체결 직후부터 시작되어 강제적인 ‘보호조약’ 체결 이후 더욱 본격화되었다. ‘보호조약’은 외교권 박탈 조약이었으므로 대한제국의 해외공관들은 모두 폐쇄되고 한국주재 외국공관들도 속속 철수함으로써 공식적인 외교교섭의 통로는 봉쇄되었다. 더구나 1906년 1월 통감부 설치 이후 일제가 내정 전반에까지 점차 통치권을 잠식해 들어오면서 대한제국의 주권 상실은 눈앞으로 다가왔다.688)‘保護條約’ 이후 大韓帝國의 대내외적 주권상실의 과정에 대해서는 徐榮姬,<일제의 한국 保護國化와 統監府의 통치권 수립과정>(≪韓國文化≫18,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96) 참조. 이에 고종은 적극적으로 해외에 密使들을 파견하여 일제의 주권침탈의 부당성을 알리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하는 밀사파견 외교를 전개하였다.

 밀사외교의 첫번째 대상은 러시아였다. 고종은 러일전쟁의 와중에도 러시아의 승리를 굳게 믿고 있었다. 거기에는 光武年間 황제의 측근친위세력으로 활약했던 참모들의 영향도 컸다. 한일의정서 체결 직후 上海로 망명한 李學均·玄尙健 등은689)이학균·현상건 등의 외교노선에 대해서는 徐榮姬,<러일전쟁기 대한제국 집권세력의 시국대응>(≪역사와현실≫25, 1997) 참조. 전 주한러시아공사 파블로프(A. Pavlov)와 접촉하면서, ‘러시아가 조만간 일본을 격퇴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니 잠시 시기를 기다리라’는 내용의 密書를 고종에게 보내왔다.690)≪駐韓日本公使館記錄≫23(影印本, 國史編纂委員會, 1992), No. 42 및 No. 52, 83·88쪽.
幣原坦,≪日露間之韓國≫(博文館, 1905), 164쪽.
이들은 또 1905년 2월에 또 다른 측근세력 중 한 명인 李寅榮 측에도 밀서를 보내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러시아를 비롯한 구미열강에 호소하여 그 간섭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李容翊을 통해 이러한 내용을 상주받은 고종은 비밀리에 그 대책을 논의하게 하였다. 그 결과 궁내부 대신 李載克과 이용익이 한국의 현재 상황을 기술한 國書 5통을 작성해 상해의 이학균 등에게 전달하고, 그들로 하여금 歐美에 가지고 가게 할 계획을 세웠다는 첩보가 있었다.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외교고문 스티븐스(D. Stevens)는 즉각 고종을 알현하여 이러한 사실에 대해 추궁했고 결과적으로 한국에 중대한 불이익이 생길 뿐이라고 협박하였다.691)金正明,≪日韓外交資料集成≫5(巖南堂書店, 1967), 1905년 2월 11일, 406쪽. 그러나 3월 하순 상해에서는 러일전쟁 발발 이후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의 폭압과 내정간섭을 고발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하는 고종의 친서가 발견되었다.692)≪日韓外交資料集成≫5, 1905년 3월 5일, 422쪽;3월 26일, 423쪽;3월 28일, 425∼426쪽;4월 1일, 437쪽 및≪日本外交文書≫38-2, 1905년 3월 19일·3월 21일, 407∼408쪽 등의 자료를 종합해볼 때,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고종의 親書는 총 120자 정도로, 고종황제의 自署와 印章이 찍혀있는 것이었다. 또한 1905년 4월경 종친 李載現이 주러한국공사 李範晉과 러시아군 참령 金仁洙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皇帝의 封書’가 언급되는 등,693)≪日韓外交資料集成≫5, 1905년 4월 26일, 453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23, No. 423, 1905년 5월 15일, 407∼408쪽.
고종과 측근참모들은 러일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리라 전망하면서 여러 차례 러시아에 지원을 호소하였다.694)현재 모스크바 帝政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보관중인 1905년 1월 10일자 고종의 親書에서도 고종은 하루빨리 러시아군이 한반도에 진주하여 일본의 압제를 제거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1905년 9월 포츠머스조약으로 러시아는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保護·指導·監理’의 권한을 인정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간섭 능력을 상실하였다. 더구나 만주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일본간의 긴장이 심화되면서 일본이 러시아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 결과 1907년 7월에는 제1차 러일협상이 체결되었다.695)이창훈,<러일전쟁후 동북아 신질서의 형성과 한국의 대응(1905∼1910)>(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한국외교사≫2, 집문당, 1995) 참조. 러시아는 1884년 처음 한반도에 진출한 이래 청과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주권을 지켜보려는 고종에게 큰 기대를 가졌고, 삼국간섭과 아관파천을 통해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일시 저지하기도 했으나 이후 소극적인 對韓政策으로 일관하면서 고종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고종은 미국에 대해서도 한일의정서 체결 직후부터 지원을 요청하는 親書를 여러 차례 보냈다. 1904년말에는 주미한국공사관 고문이자 콜롬비아 대학 총장인 니담(Charles W. Needham)을 통해 미국무장관에게 밀서를 전달하고, 미국정부가 현존 조약과 저촉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한국의 독립유지에 진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니담은 국무장관으로부터 동정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회답을 보내왔다.696)≪日韓外交資料集成≫5, 1905년 6월 12일·14일, 491∼492쪽. 이 시기 미국의 對韓政策의 기조로 볼 때697)러일전쟁기 미국의 對韓政策, 특히 루즈벨트의 친일적 동아시아 정책과 對韓방침에 대해서는 金基正,<1901∼1905年間의 美國의 對韓政策 硏究>1(≪東方學志≫66, 1990) 참조. ‘同情’의 실제적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는 의문이나, 이후 고종은 미국의 주선을 더욱 기대하게 되었다.

 1905년 7월에는 러일간의 강화담판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자는 취지로 이승만을 밀사로 선정하였다.698)≪日韓外交資料集成≫5, 1905년 7월 14일·19일, 507∼511쪽. 이승만은 독립협회운동 당시 급진공화세력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선교사들의 배려로 1904년 8월 특별사면을 받고 11월 미국으로 출국한 상태였다. 당시 정부대신 중 미국과 가까웠던 민영환과 한규설은 이승만에게 미국정부 요로에 한국의 독립보전을 요청하는 서신을 전달하게 하였고, 이승만은 주한미국공사였던 딘스모어(H. A. Dinsmore)의 주선으로 1905년 1월 상순에서 2월 사이에 미국무장관 헤이(John Hay)를 면담한 바 있었다.699)고정휴,<독립운동기 이승만의 외교 노선과 제국주의>(≪역사비평≫31, 1995) 참조. 이때 다시 이승만을 강화담판 밀사로 선정했던 것은 러일간의 협상이 한국에 유리하게 결정되도록 잘 교섭해 보라는 지시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8월 4일 하와이 교민 8,000명을 대표해서 미국에 온 목사 윤병구와 함께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하고 한국의 주권과 독립보전에 대한 청원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친일파인 주미 한국대리공사 김윤정이 한국정부의 공식 훈령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면서 이들의 對美교섭을 지원하지 않음으로써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700)고정휴, 위의 글, 131∼139쪽. 물론 미국이 이미 태프트-가츠라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승인한 상태였으므로 이승만 등의 루즈벨트 면담이 특별한 결과를 낳을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의 면담에도 불구하고 러일강화조약이 일본의 한국보호권을 승인하는 것으로 결정되자, 고종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를 1905년 10월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 친서를 전달했다. 1882년 朝美條約 제1조의 ‘居中調整’ 조항에 의거하여 미국이 나서서 한일의정서를 파기하고 열강의 공동보호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견제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保護條約’이 체결된 직후인 11월 26일에는 헐버트에게 勒約은 무효라는 긴급 전문을 보냈고, 주프랑스공사 閔泳讚에게도 밀명을 내려 12월 11일 미국무장관 루트를 면담하게 하였다. 그러나 루트는 ‘한국은 1904년 2월의 한일의정서와 8월의 顧問協約 체결로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 상태가 되었으므로 미국은 어떠한 협조도 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전 주한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도 고종으로부터 운동자금 1만불과 황제의 어새가 압인된 백지 친서 등을 전달받고 미국정부를 상대로 교섭을 벌였으나 미국은 고종의 호소를 모두 묵살하였다. 미국정부의 입장은 일관되게 친일적이었기 때문이다.701)金基奭,<光武帝의 主權守護 外交(1905∼1907):乙巳勒約 無效宣言을 중심으로>(≪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까치, 1995) 참조.

 미국의 냉담한 반응에 실망한 고종은 다시 세계 열강을 상대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열강의 한국문제 개입을 호소하는 비밀외교를 전개하였다. 런던 트리뷴지 기자인 스토리(Douglus Story)에게 의뢰하여 북경주재영국공사에게 전송한 1906년 1월 29일자 國書에서 고종은 5년간 열강의 공동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헐버트에게도 1906년 6월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이태리·벨기에·중국 등 9개국 국가원수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한국문제를 제소할 뜻을 전달하도록 밀지를 내렸으나 친서는 각국에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702)위의 글, 246∼260쪽.

 한편 고종의 최측근인 이용익은 1905년 9월 상해로 망명한 후703)≪日本外交文書≫38-1, 1905년 9월 4일, 922∼926쪽. 직접 유럽을 거쳐 러시아를 방문하고 한국문제에 개입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파리· 베를린을 경유하여 11월 하순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이용익은 주러한국공사 李範晉과 함께 외무대신 람스도르프(Lamsdorf) 등을 수 차례 면담하였다. 이용익은 러시아측에 한국 이권을 주는 대신 보호를 요청한다는 고종의 啓字공문을 제시하였으나, 러시아는 이미 러일강화조약으로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한 이후였고, 또한 제1차 볼세비키혁명의 와중이어서 한국문제에 깊이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이용익은 결국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1906년 3월 상해에 귀환한 후,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국내의 고종과 연락하면서, 세계 각국에 밀사들을 파견하여 일본의 강압실태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할 계획을 세웠으나, 1907년 2월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704)상해 망명 이후 이용익의 행적에 대해서는 日本外務省편,<韓國人李容翊來朝並同人擧動取調一件>(≪極秘 日本의 韓國侵略史料叢書≫14, 한국출판문화원) 참조.

 그런데 이때 이용익은 고종으로부터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종은 우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이용익을 파견하여, 그를 한국의 독립문제에 관한 수석 전권으로 임명했음을 알리고 러시아측 협조를 얻게 하려 했던 것이다.705)위의 책, 458∼461쪽. 그러나 이용익이 급작스럽게 사망해버리자 다시 李相卨·李儁 등을 헤이그밀사로 선정하였다.706)헤이그밀사에 대해서는 윤병석,≪國外韓人社會와 民族運動≫(一潮閣, 1990), 353∼363쪽 및 日本外務省,<韓國において第2回萬國平和會0議へ密使派遣並び同國皇帝の讓位び日韓協約締結一件>(≪日本外務省特殊調査文書≫37·38, 高麗書林) 참조. 이상설 등은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러시아에 도착한 후 주러공사 이범진의 아들로서 프랑스 유학 경험이 있는 李瑋宗과 합류하여 헤이그회의에 참석하였다.707)≪駐韓日本公使館記錄≫28, No. 99, 1907년 3월 1일. 이상설 등이 가지고 간 고종의 친서는 ‘일본이 1905년 11월 18일 勒約 이후 우리 나라에 가한 모욕과 기만에 대해 심히 민망하던 차에 海牙에서 平和會議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전 의정부參贊 이상설과 平理院 판사 이준, 駐露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위원으로 특파하여 일본의 불법행위를 각국 위원에게 알리고자 하니, 세계가 모두 한국의 고난을 알고 公法에 의거하여 公議로써 다시 한국의 국권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格外의 派員임을 용서하고 짜르가 헤아의 러시아 委員에게 칙명을 내려 한국위원들을 도와서 회의석상에서 한번 호소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708)모스크바 제정러시아 대외정책 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이 친서는 1907년 4월 20일자이고, 고종의 친필 서명이 들어 있다. 고종은 이때까지도 여전히 러시아측에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세계여론에 호소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종은 한일의정서 체결 직후부터 1907년 강제로 퇴위되기까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끈질기게 밀사외교를 전개하였다. 해외로 망명한 측근친위세력들은 물론이요, 친한파 외국인들도 밀사로 파견하였다. 광무년간 宮內府 內藏院을 통해 축적한 막대한 재원과 오래전부터 홍콩·상해 등지의 외국계 은행에 예치해오던 고종의 秘資金이 그 자금줄 역할을 하였다.709)고종의 비자금에 대해서는 徐榮姬,≪光武政權의 국정운영과 日帝의 국권침탈에 대한 대응≫(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8), 189∼194쪽 참조. 러시아와 미국을 향해 끊임없이 한국문제에 개입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보호조약 이후에는 열강의 공동보호를 요청하면서까지 세계여론의 관심을 이끌어내려고 고심하였다.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提訴라는 법률적 차원의 해결도 모색하였다. ‘保護條約’은 강압에 의한 것이고, 황제의 비준이 없었으므로 국제법상 무효라는 法理的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과 측근 참모들의 밀사외교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기본적으로 萬國公法的 인식에 의거한 이러한 외교활동은 당시의 제국주의 세계질서에 대한 현실적 인식을 결여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1880년대에 한국에 들어온≪萬國公法≫·≪公法會通≫등 서양의 국제법 저서들은 이 땅의 지식인들이 기존의 華夷論的 세계관에서 벗어나 제국주의시대의 국제질서에 대해 인식하게 하였으나, 한편으로 그것을 너무 이상주의적으로 맹신하고 오해하게 한 문제점도 있었다. 고종과 그 측근들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만국공법류의 인식에 의거하여 끝까지 국제여론에 대한 호소 등 외교적인 방법으로 일제의 주권침탈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710)金容九,<西洋國際法理論의 朝鮮傳來에 관한 小考>1(≪泰東古典硏究≫10, 1993).
姜相圭,<高宗의 對外認識과 外交政策>(≪韓國史 市民講座≫19, 一潮閣, 1996).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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