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3. 군대해산과 사법권 피탈
  • 2) 일제의 사법권 장악

2) 일제의 사법권 장악

 일제는 신협약 제3조에서 사법사무는 보통행정과 구별한다는 것으로 사법권 탈취의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일제는 이전에도 이미 법부고문·참여관·보좌관의 배치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사무에 광범하게 관여해 오고 있었다. 일제는 한국의 재판제도가 한성재판소 및 平理院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방재판소에 전담 재판관 없이 관찰사·목사 등이 겸직해온 현실을 비판하면서 사법권 독립이라는 명목으로 각 재판소에 일본인 보좌관 등을 배치하여 한국의 사법권을 침탈해왔다.779)≪韓國施政年報≫1, 91∼92쪽.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신협약 부속 각서에서 한일 양국인으로 구성된 재판소(大審院·控訴院·지방재판소·區재판소)를 신설하고, 간수장 이하 반수를 일본인으로 하는 감옥을 설치할 것을 약속받은 일제는 이제 사법권의 완전 장악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1907년 12월 법률 제8호 재판소구성법, 제9호 同시행법, 제10호 재판소설치법 공포로 일본과 같은 3심제를 채택한 일제는 大審院 1(서울), 控訴院 3(서울·평양·대구), 지방재판소 8(서울·공주·함흥·평양·해주·대구·진주·광주), 區재판소 113(한성부 1·경기도 12·강원도 8·충청남도 12·충청북도 6·함경남도 5·함경북도 3·평안남도 7·평안북도 7·황해도 8·경상북도 14·경상남도 10·전라남도 11·전라북도 9)개소를 설치하고, 典獄을 일본인으로 하는 감옥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재정상의 이유로 한꺼번에 모든 재판소를 신설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일제는 1차로 1908년 1월 대심원, 공소원과 서울 외 7개 지방재판소, 서울 외 15개 구재판소를 개청하고, 1909년 1월에는 2차로 인천 외 7개 지방재판소 지부와 개성 외 23개 구재판소를 개청하였다.780)≪日韓外交資料集成≫8, 保護及び倂合錄編, 170∼174쪽.

 뿐만 아니라 1908년 3월부터 대심원장, 검사총장, 서울공소원장 및 검사장, 서울지방재판소장 및 검사장, 서기 6인에 일본인을 용빙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다수의 일본인 법관을 임명함으로써 경찰권과 함께 통치권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국가적 강제기구인 사법기관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1908년 새로 임용된 법관 내역을 보면 일본인은 판사가 74명, 검사 32명, 재판소 서기장 4명, 번역관 4명, 서기 90명, 飜譯官補 9명이 임용된 데 비해 한국인은 판사 36인, 검사 9인, 서기 4인이 임용된 데 불과하였다.781)≪韓國施政年報≫1, 97쪽.

 또한 장차 병합 이후 한국에 대한 법률적 지배에 대비하여 구래의 한국법에 대한 조사와 그 개정작업도 시작하였다. 1908년 1월부터 형법·민사소송법·형사소송법 및 기타 부속법령의 立案 및 그 재료조사에 착수하였고, 5월말부터는 민법편찬 재료수집을 위해 한국 각지의 慣習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08년 7월≪刑法大全≫을 개정하고, 민·형사 소송규칙 및 기타 제 법률에 대한 개정 및 신설 법령이 발표되었다.782)≪韓國施政年報≫2, 43∼45쪽.

 이처럼 한국의 사법권을 장악하는 데 필요한 모든 기초준비를 마친 일제는 마지막 단계로 1909년 7월 12일 한국의 사법 및 감옥사무를 모두 일본정부에 위탁한다는 소위<己酉覺書>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1. 한국의 사법 및 감옥사무가 완비되었다고 인정될 때까지 한국정부는 사법 및 감옥사무를 일본정부에 위탁한다.

2. 일본정부는 일정한 자격이 있는 일본인 및 한국인을 재한국 일본재판소 및 감옥의 관리로 임용한다.

3. 재한국 일본재판소는 협약 또는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외에는 한국인에 대해서 한국법규를 적용한다.

4. 한국 지방관청 및 公吏는 각각 그 직무에 따라 사법 및 감옥사무에 대한 재한국 일본 해당관청의 지휘 명령을 받고 또는 이를 보조한다.

5. 일본정부는 한국의 사법 및 감옥에 관한 일체의 경비를 부담한다.

 이상 5조로 이루어진 각서의 내용에 따라, 10월 법부가 폐지되고 그 사무는 신설된 통감부 사법청으로 이관되었다. 칙령 제236호 통감부재판소령, 제243호 통감부 감옥관제를 발포한 일제는 통감부 사법청 산하에 고등법원 1개소, 공소원 3개소, 지방재판소 8개소, 동 지부 9개소, 구재판소 80개소를 설치하고 일본인 판사 192명, 검사 57명, 통역관 기타 246명 총 495명과 한국인 판사 88명, 검사 7명, 기타 215인 총 310명을 채용하였다.783)戶叶薰雄·楢崎觀一, 앞의 책, 199∼210쪽. 그러나 한국인 법관은 민사재판은 원고·피고 모두 한국인인 경우, 형사재판은 피고인이 한국인인 경우에 한정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특히 적용법규에 있어서 일본제국 법규를 원칙으로 하되 한국인에 대해서는 한국 법규 및 관습을 적용한다고 했으면서도, 실제로 한국인과 한국인이 아닌 사람의 민사소송에 대해서는 일본 법규를 적용하게 함으로써784)≪韓國施政年報≫3, 47∼48쪽. 대한제국의 국민들은 병합 이전부터 이미 대부분 일본제국주의의 법률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