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2권 대한제국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
  • 1) 일진회의 창립과 정계진출

1) 일진회의 창립과 정계진출

 一進會는 오랜 일본 유랑생활에서 돌아온 宋秉畯이 1904년 8월 前독립협회원 尹始炳·尹吉炳·兪鶴柱·廉仲模 등과 함께 결성한 維新會와 9월 李容九가 전국의 舊동학교도들을 결집시켜 창립한 진보회가 결합되어 탄생하였다. 진보회가 처음에 지방 각지에서 대단한 형세를 보이며 성장하자, 대중적 기반을 가지지 못한 채 일본 주차군의 보호하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송병준 등은 이용구를 매수하여 일진회를 창립한 것이다. 송병준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당시 구로다(黑田淸隆)대사가 파견되었을 때 接伴使 隨員으로 인연을 맺어 이래 일본에 건너가 인삼재배, 직물염색 등을 공부하였고,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 小將의 군사통역으로 귀국하였다. 1894년 농민전쟁에 참여했던 이용구는 1899년 최시형 사망 이후 북한지방 선교에 종사하다가 역시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교세회복에 나선 손병희의 지령으로 진보회를 창립한 것이었다.785)일진회 창립경위에 대해서는 趙恒來,≪韓末社會團體史論考≫(형설출판사, 1972), 40∼46쪽 참조.

 윤길병이 저술한 일진회취지서에 의하면, 일진회는 기본적으로 국민주권론을 전제한 위에서 君主를 입법·행정의 大權을 총람하는 ‘無上第一’의 위치에 설정하고, 人民은 이에 협찬하는 형태로 입법권에 간접적으로 參論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황제권과 타협하에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정치참여를 통한 민권신장을 바라는 독립협회 온건파 계열의 입헌군주제적 정체관을 계승한 것이었다. 또한 연설회 개최, 정부 대관과의 면담 요구 등 운동방식도 독립협회 당시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일진회의 목표가 이러한 입헌군주제적 정체변혁운동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다만 창립초기 활동에 舊독립협회 회원들이 참여했던 것이 영향을 미친 것일 뿐이었다.

 일진회의 친일행위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북한지방 진입을 후원하기 위해 수송대를 조직하고 보급품을 운반하는 활동에서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러시아측 기밀을 정탐하기 위한 간첩활동에도 앞장섰으며, 경의철도 공사에서도 철도 工夫隊를 편성하여 공사의 속성에 일조하였다. 철도공사에 거의 무보수로 봉사한 평안남북도·황해도 거주 일진회원이 연인원 149,114명이나 참가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786)조항래, 위의 책, 114∼119쪽. 또한 1905년 11월 6일에는 ‘보호조약’ 찬성 선언서를 발표하였고, 외교권은 한일의정서 체결과 고문협약으로 이미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새삼스럽게 외교권 박탈에 저항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787)戶叶薰雄·楢崎觀一,≪朝鮮最近史 附韓國倂合誌≫(蓬山堂, 1912), 19쪽.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통감부 囑託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고문으로 맞이한 일진회는 그의 지도로 본격적으로 정계 진출을 도모하였다. 우치다는 이토통감이 부임할 때 國政調査 촉탁으로 데리고 온 대륙낭인 계열의 인물이었다.788)內田良平은 청일전쟁 당시 天佑俠이라는 낭인조직를 이끌고 방한한 경험 등으로 인해 이토통감에게 발탁되었으며, 對外硬 운동론자인 스기야마 시게마루(衫山茂丸)을 통해 일본 軍部를 대표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顯有朋)·가츠라 타로(桂太郞)·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등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趙恒來,<內田良平의 韓國倂呑행적>,≪國史館論叢≫3, 國史編纂委員會, 1989 참조). 그는 1906년 10월 황제의 옥새도용사건에789)옥새도용사건이란 고종황제가 李逸稙이라는 인물에게 밀칙을 내려 23건의 한국내 이권을 몇몇 일본인 政商들에게 양여하는 대신 그 상납급으로 비자금을 마련하고자 한 시도로서, 사건이 일본정부측에 알려지자 이일직이 사적으로 옥새를 도용해서 일으킨 것으로 서둘러 무마한 사건이다(徐榮姬,≪光武政權의 국정운영과 日帝의 국권침탈에 대한 대응≫,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8, 235∼242쪽). 연루된 李逸稙을 숨겨주었다가 투옥된 송병준을 구해주고 빈약한 일진회의 재정사정을 해결해주는 것을 빌미로 고문에 취임한 후790)黑龍會編,≪日韓合邦秘史≫上(1930 ; 原書房, 1966), 20∼53쪽. 일진회의 매국적 친일활동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실제로 우치다의 도움으로 석방된 송병준은 그 직후부터 공공연히 ‘日韓聯邦說’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황제폐위 문제에서도 일제보다도 앞장서서 과감한 결행을 제의하고 나섰다. 그러나 고종이 황제권 보위를 위해 갖은 방법으로 저항하고 참정 박제순도 일진회와의 제휴를 거절하자 일진회는 1907년 5월 2일 박제순내각 탄핵문을 제출하고 총사직을 권고했다. 유약한 박제순내각의 경질을 결심한 이토통감은 차제에 보다 강력한 친일내각을 구성하기로 결심하고, 특히 폐위문제에 적극적인 이완용을 참정에 발탁함과 아울러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입각시킴으로써 일진회를 친일내각의 지지기반으로 삼고자 했다.791)조항래, 앞의 책, 114∼200쪽. 3품대신이라는 일반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송병준의 입각은 끊임없이 정계진출을 엿보던 일진회 세력에게는 일정한 성과라고 생각되었으며, 이는 또한 그간의 친일활동에 대한 일본측의 보상이기도 하였다.

 송병준은 내각에 들어가자 더욱 맹렬한 친일행위로 일본측 기대에 부응하였다. 특히 일제가 숙원사업으로 생각해온 고종의 폐위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었다. 1907년 7월초 헤이그밀사사건이 알려지자 송병준은 가장 앞장서서 고종의 폐위를 極諫하고 이를 관철해 내었다. 그러나 고종폐위와 신협약 체결에 성공한 일제는 일진회에 대한 일반의 심각한 반대여론에 부담을 느끼고 점차 일진회를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이어지면서 반일 분위기가 고조되고, 일진회가 그러한 반일운동의 공격 목표가 되자 이용가치보다는 오히려 통감부 통치에 부담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애초에 우치다 등도 일진회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후에는 財團으로 만들어 산업활동에 종사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792)≪日韓合邦秘史≫上, 338∼347쪽. 이러한 일본측 의도를 전혀 간파하지 못한 일진회는 일제의 후원으로 언젠가는 정권을 장악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일진회는 의병의 공격에 대항하여 自衛團을 결성하였으나, 통감부측은 일진회가 국난극복을 빌미로 당세확장을 도모하며 양민에 대한 폭행·협박·단발 강제 등을 일삼아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유로 경고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793)위의 책, 433쪽.

 이처럼 통감부측 태도가 돌변하자 내각내에서 송병준의 위치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참정 이완용은 통감부와의 밀착관계를 기반으로 권력을 독식하면서 송병준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송병준은 이토통감이 자신을 폐위문제에만 이용하고 권력은 이완용 쪽에 실어주는 것에 심히 분노하였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 일진회의 대립은 단지 권력갈등의 문제라기보다는 원천적으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세력이 정권장악을 위해 연합한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즉 일진회가 구래의 양반 지배질서에 대한 철저한 해체를 지향한데 비해 이완용을 비롯한 대부분의 관료들은 일진회를 하층 무뢰배 출신이라 냉소하였고, 이에 통감부측 일본인들도 동조하면서 일진회측 불만이 고조된 것이었다. 날로 높아가는 회원들의 불만으로 더 이상 조직을 운영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진회 지도부는 이완용내각과 통감부를 상대로 한 특단의 조치를 도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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