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1. 한반도 중립화 운동
  • 1) 한반도 중립화론의 대두
  • (1) 임오군란 후 일본에서의 한반도 중립화론

(1) 임오군란 후 일본에서의 한반도 중립화론

한반도 중립화문제가 맨처음 제기된 곳은 일본에서였다. 일본은 조선과 이미 ‘江華島條約’(1876. 2. 27)을 성사시켜 조선진출에 적극성을 보여 왔으나 壬午軍亂(1882. 7. 23)이라는 뜻하지 않은 돌출변수로 淸에게 우위를 빼앗겨 위기를 맞게 되자 임오군란의 사후처리에 정치적 관심을 집중시켜 東京에서 청과의 회담을 가졌다. 이 때의 쟁점은 다름아닌 淸韓宗屬關係였다. 주일청국공사 黎庶昌은 “일본공사관이 우리의 屬邦 때문에 暴擧를 받았으므로 청국이 파병하여 공사관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파병과 정치개입의 명분으로 屬邦論을 주장하였고 일본의 外務大輔 요시다 키오나리(吉田淸成)는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여 該國을 대함에 자주국으로서 함으로, 사후처리도 조약에 바탕을 두어 행하고 공사관 보호도 자국에 의함이 당연하다”고 하면서 獨立論을 제기하였다.0001)日本外務省 編,≪日本外交文書≫15(東京:日本國際連合會, 1947∼1954), № 102∼107, 163∼176쪽. 조선을 둘러싼 이러한 양국간의 상반된 주장은 급기야 日本朝野의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되었고,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청의 속방론을 부정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일본이 제기한 것이 한반도 중립화구상이었다.

이 당시 일본에서 제기된 한반도 중립화론의 대표적인 경우는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의 案이다. 그는 임오군란 발발 직후인 1882년 9월 17일에<朝鮮政略>0002)井上毅傳記編纂委員會 編,≪井上毅傳≫-史料編 1(國學院大學圖書館, 1966), 312∼313쪽.을 저술하고 10월 29일에<擬與馬觀察書>0003)≪梧陰文庫(井上毅文書)≫マイクロフイルム № A-856(원본은 國學院大學圖書館 소장).를 저술하여 자신의 중립화론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였다. 이를테면, 청이 비록 조선의 上國이고 조선은 淸의 貢國이지만 屬國은 아니며 하나의 독립국이므로 淸·日·美·英·獨 5개국이 공동보호하는 벨기에·스위스 형의 중립국을 만들 것을 회의로서 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의 이러한 제안은 청·한종속관계의 부정에서 출발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 베트남문제의 재연이라는 좋은 기회를 틈타 한반도의 중립화를 거론함으로써 琉球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저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하였다.0004)≪井上毅傳≫-史料編 4(1971), 617∼619쪽, 明治 15년 7월 7일부 書簡.

한편 프랑스의 법학자로서 1873년에 渡日하여 일본의 국가자문역으로 활약하고 있던 보아쏘나드(Gustave Emil Boissonade de Fontarable)가 임오군란 후 한반도 중립화론을 제기하였음이 이노우에 코와시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보낸 서간을 비롯한 몇몇 사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보아쏘나드는 원래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보다도 러시아의 조선침략을 더욱 우려하여 朝·淸·日 3국동맹론을 주장한 바 있지만,0005)≪日本外交文書≫15, № 107, 165∼173쪽.
市川正明 編,≪日韓外交史料(二):壬午事變≫(原書房, 1979), 177∼179쪽.
1882년 9월 22일에 쓴<영구중립에 관한 의견서>0006)平塚篤 校訂, 伊藤博文 編,≪秘書類纂-外交篇≫上(秘書類纂刊行會, 1934), 618∼620쪽.
이 문서 자체에는 의견서라는 기록이 없지만 이를 설명하기 위한 별도 문서에 ‘영구중립에 관한 의견서 가운데 미심쩍은 점에 붙이는 응답’(같은 책, 620쪽)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문제에 대하여 보아쏘나드가 무언가의 의견을 구하려고 쓴 것임을 알 수 있다(長谷川直子,<壬午軍亂後の日本の朝鮮中立化構想>≪朝鮮史硏究會論文集≫32, 東京:綠蔭書房, 1944, 148쪽의 주 57).
와 10월 29일에 쓴<恒守局外中立新論>0007)≪秘書類纂-朝鮮交涉資料≫中(1936), 223∼229쪽.이라는 글에서, 특히 러시아를 경계하여 청·러시아·일본 3국을 중심으로 한 관련국가들의 인정에 따라 한반도가 영세중립화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이노우에 코와시와 보아쏘나드로 대표되는 일본정가의 한반도중립화론이 어느 정도 국제외교에 반영되었을까 하는 문제는 결과론적 측면에서 볼 때 부정적인 대답 밖에 없겠지만 국제간의 현안타결과정에서 외교실무진들의 고려대상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증거는 이 당시 일본에서 대조선정책을 직접 담당하고 있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외무경과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주조선일본공사의 저간의 외교행각에서 찾을 수 있다. 다케조에는 1884년 10월 30일자로 재부임하면서 “나는 조선을 장차 영구 국외중립국으로 할 것이다. 조선으로 하여금 스위스·벨기에와 같은 하나의 영구 국외중립국으로 하려는 것은 이노우에 외무경이 항상 희망하는 바였다”0008)井上角五郞,<漢城之殘夢>(한상일 역·해설,≪서울에 남겨둔 꿈≫, 건국대출판부, 1993), 44쪽.라고 하는가 하면, 같은 해 11월 2일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淸佛戰爭(1884∼1885)의 대요를 설명하면서 “만약 조선이 프랑스에 기울어지면 청국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고 청국에 기울어지면 프랑스와 싸우게되므로 서양의 예를 본받아 국외중립을 해야한다”0009)≪秘書類纂-朝鮮交涉資料≫上, 260쪽.고 설득한 일이 있다.

이노우에 카오루가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주일 영·독 외교관들의 본국 보고서를 보면 임오군란 직후에 한반도 중립화를 염두에 둔 적이 있고,0010)British Foreign Office, Japan:General Correspondence, 1856∼1905, Microfilm F.O. 46, 288 Vols. (Great Britain Public Record Office), Parkes to Granville, No. 128, Secret, Sep. 12. 1882.
Akten des Auswärtigen Amtes. A. 7168 Pr. 독일외무성문서 1882년 12월 1일.
특히 갑신정변(1884. 12. 4) 후 일본특명전권으로 조선에 왔을 때 ‘조선이 일방적으로 중립화를 선언한 다음 관계열국이 승인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거나 ‘此法甚妙’라는 등의 언급을 하였음이 주조선 독일영사 부들러(Hermann Budler)와의 대화에서 확인되고 있다.0011)≪日本外交文書≫18, No. 202 附記. 357∼369쪽.
≪秘書類纂-外交篇≫上, 621∼624쪽.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編,≪舊韓國外交文書≫15:德案 Ⅰ(1966) No. 95, 49∼50쪽, No. 98, 51쪽.

임오군란 후 일본 정가에 한반도 중립화론이 한창 일고 있던 시점에 언론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의가 잇따랐다.

조선문제에 대한 구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밝혀 준 신문은 立憲改進黨의 기관지인≪郵便報知新聞≫이었다. 이 신문은 조선이 유럽 大國들 사이에서 자주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스위스·벨기에와 같은 지위를 가지기를 바라며 이러한 독립자주의 실력을 갖는데 있어서 명의상 貢國 또는 屬邦으로 칭하더라도 朝·淸·日 3국관계에 아무런 영향은 없다고 한 다음,0012)≪郵便報知新聞≫, 1882년 9월 13일 사설<日淸兩國ハ向後如何ニ朝鮮ヲ處置スべキカ 第一>·9월 14일 같은 사설<第二>·9월 19일 같은 사설<第六>. 이를 위한 방책으로써 조선과 청 및 영국·미국·독일·프랑스에 의한 列國會議를 東京에서 개최하여 조선의 ‘虛名所屬實勢獨立’의 위치를 확정할 것을 제시하였다.0013)≪郵便報知新聞≫, 1882년 9월 20일, 위의 사설<第七>.

역시 입헌개진당계 신문인≪東京橫濱每日新聞≫도 베를린회의(1878)에서 불가리아가 터키의 朝貢國이면서도 내치·외교는 자주권을 가질 것을 명확히 한 것처럼 청·영국·미국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조선도 불가리아와 같은 권리를 가질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014)≪東京橫濱每日新聞≫, 1882년 9월 10일 사설<日韓及ビ淸國ノ關係ヲ論ズ 第二>·9월 17일 같은 사설<第五>.

이처럼 임오군란 이후 일본의 각계에서 제기된 한반도 중립화론에 대하여 그 성격을 종합 검토해 보면, 한결같이 패권주의를 추구하는 국가가 자력으로 조선을 지배하기가 어렵게 되었을 때 경쟁관계에 있는 세력들과 제휴하여 어느 단일 세력에 의하여 독점지배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중립화를 활용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본에서의 한반도 중립화론에 대하여 ‘그것은 오로지 열강의 세력균형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실현시키고자 한 일본의 1880년대 대조선 정책의 주류적 위치였다’라는 소수의 반론이 있지만,0015)大澤博明,<朝鮮永世中立化構想と近代日本外交>(≪靑丘學術論集≫12, 東京:韓國文化硏究振興財團, 1998), 179∼229쪽. 실제에 있어서는 침략의도를 대전제로 한 일시적인 제안으로 조선의 안전보장과 독립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였을 뿐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