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3. 특사의 헤이그 평화회의 파견
  • 1)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

1)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국제정세를 보면, 사르데냐 중심의 이탈리아 통일(1861)과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1871)이 완성된 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 발발(1914)까지 약 반세기간에는 열국의 공동목표 또는 국제협조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열강은 각자의 국가 이익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세력균형이 유지되는 국제질서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세력균형을 도모하되 자국에 유리하게 전개시키기 위해 비밀외교를 행하고, 동맹과 협상을 다투어 체결하였다.

비스마르크 체제(Bismarckian System, 1871∼1890) 때는 독일을 추축으로 하는 일원적인 동맹·협상체계, 즉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 3帝同盟(1872), 독일·오스트리아 2국동맹(1879), 독·오·러 3帝協商(1881), 독·오·이탈리아 3국동맹(1882∼) 등으로써 프랑스 고립화정책하의 국제평화가 유지되었으나 그가 실각한 후에는 이들 3국동맹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러시아·프랑스 2국동맹(1891), 영국·프랑스 협상(1904), 영국·러시아 협상(1907) 등의 빈번한 이합집산을 거쳐 급기야 영·프·러 3국협상(1907)이라는 대항체제가 완성됨으로써 독일 포위체계가 형성되었다.

바야흐로 국제정국은 먼로선언(Monroe Doctrine)의 실천자로서 유럽으로부터는 이탈하여 태평양 세력으로서의 자리를 굳혀가고 있던 미국이 제외된 채, 3국동맹과 3국협상간의 힘의 대치 상태라는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처럼 양분된 대결구도하에서는 갖갖은 군사 협정을 통한 군사블록 형성에서 보듯이, 피차 군비를 경쟁적으로 강화하면서 평화를 추구하는 지극히 위험스러운 ‘무장평화’(Armed Peace)가 유지되기 때문에 항상 파국의 위험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군비경쟁에 제동을 걸기 위한 이상론의 시험이 곧 1899년과 1907년에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던 이른바 ‘헤이그 평화회의’(Hague Peace Conference)였다.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는 당시 독일 대 프랑스라는 두 적대 진영 사이를 비교적 자유롭게 넘나들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1898년 8월 24일 외상 무라비요프(M. N. Muraviev)에게 세계 각국의 군비확장을 제한하고 전운을 잠재우고자 평화회의를 개최할 것을 각국에 제안하도록 명령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처럼 러시아의 제의가 각국의 동의를 얻어 성립된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는 1899년 5월 18일부터 7월 29일까지 26개국 대표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모여 개최되었는데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과 멕시코 2개국만이 참가했다. 뮤라비요프가 1899년 1월 11일의 回章을 통하여 이미 제안한 이번 회의의 특별의제는 병력증강의 제한, 신무기 배치의 감축안, 1864년에 체결된 제네바조약의 원칙을 海戰에 적용하는 안, 陸戰의 법규와 관례에 관하여 1874년에 공포된 후 아직 비준을 기다리는 브뤼셀 선언에 대한 수정안 등이었다.

그러나 각국의 이해관계가 워낙 상층되어 주 목적인 군비축소를 실현하는 데는 아무런 진전을 볼 수 없었다. 다만 교전상태의 조건 및 육전과 해전에 관한 그 밖의 관례를 정의하는 협정들을 채택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 밖에 질식가스의 사용금지 선언, 덤덤탄(명중하면 퍼지는 탄환)의 사용금지 선언, 氣球로부터의 투사물이나 폭탄투하금지 선언 등 3개 선언이 승인되었으며, 특히 중요한 성과는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조약’의 채택으로 상설중재재판소가 1901년에 네델란드 헤이그에 설치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후의 각국간에는 오히려 군비확장이 경쟁적으로 실시되어 점점 전운이 짙어가다가 드디어 1904년에 러일전쟁이 폭발하였다. 러일전쟁을 겪고 나자 다시 전쟁의 위기를 막아보려는 국제여론이 비등하여 강대국들은 또다시 평화회의를 모색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는 ‘해군력의 증강을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던 영국과 독일의 대립을 완화하고 군비제한에 의한 각국간의 세력균형을 도모해보겠다’는 러시아·프랑스 및 미국의 의도에 따라 성사된 것이다.0168)劉孝鐘,<ハーグ密使事件と韓國軍解散>(≪季刊三千里≫49, 東京:1987 春), 40쪽. 때문에 미국의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를 제안하게 되었고 이 회의가 정식으로 1907년 헤이그에서 소집되기는 역시 니콜라이 2세의 주창에 의해서였다.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는 44개국 대표 225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개최되었다. 이번 회의의 구체적인 결정들을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군비축소안은 또다시 부결되었지만 국가간에 계약상의 채무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의 사용, 육전과 해전에 있어서의 중립국과 그 국민들의 권리·의무, 自動觸發海底水雷의 부설, 敵國 商船의 지위, 전시 해군에 의한 포격, 국제포획심판소의 설치 등의 문제에 관한 여러 조약을 체결했다. 뿐만 아니라 제1차 회의에서 승인되었던 선언 중에서 기구에서 발사물을 투하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선언도 이때에 갱신했으나 질식가스와 덤덤탄의 사용을 금지하는 선언을 재확인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强制仲裁의 원칙을 만장일치로 인정하고 의결방식의 다수결(voeux)도 채택하였다.

이와 같은 두 차례의 헤이그 평화회의는 결과적으로, 이름은 평화회의였지만 강대국들의 군비축소라는 본래 목적에서 빗나가, 육전규칙·해전규칙 및 분쟁의 ‘평화적’ 조정 등을 심의하기 위한, 이를테면, 식민지쟁탈 관련 국제법회의였다.0169)위와 같음. 그러한 가운데서도 국제문제를 처리하는 최상의 방법은 일련의 연속적인 회의를 통하는 것 뿐이라는 관념이 구체화 될 수 있었다는 점은 하나의 성과로 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이후 8년 안에 회의를 다시 소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915년에 예정되었던 제3차 헤이그 평화회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것은, 제2차 평화회의가 1906년에 예정되었던 것이 독일·오스트리아의 참가 거부로 1907년으로 연기되었던 사실이나, 정작 회의가 개최되었어도 영국의 대 프랑스 지원에 대항하여 해군력 증강에 힘을 쏟고 있던 독일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처음부터 회의에 거는 기대치를 낮게 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적으로 동맹체제와 협상체제라는 힘의 대치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쉴새 없이 빚어지고 있던 일련의 사태, 즉 ‘3B정책’과 ‘3C정책’으로 표현되는 독일·영국간의 식민지 쟁탈전, ‘모로코사건’이나 ‘알사스 로렌’을 둘러싼 영토분쟁에서 보여준 독일·프랑스간의 역사적 대립, 발칸에서 비화되고 있던 범 게르만 민족주의와 범 슬라브 민족주의의 대립 등이 끝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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