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3. 특사의 헤이그 평화회의 파견
  • 2) 고종의 3특사

2) 고종의 3특사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로이터 통신을 타고 한국에 전해져 일간지에 보도되었다. 회의는 6월 15일부터 개최되며, 러시아의 군축안이 평화회의의 의제로 상정되지 못했지만 특별위원회에서 이를 考査할 터인데 독일·오스트리아가 동 위원회에 대한 대표자의 출석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않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0170)≪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10·11일.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한국으로서는 이처럼 세계 각국의 대표가 참여하는 국제회의는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강제로 침탈했다는 것을 폭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되었다. 이에 고종은 헤이그 평화회의에 ‘特使’0171)제2회 헤이그 평화회의에 파견된 한국대표들을, 당시 일본측 정보자료나 이후의 여러 저술에서, 이들이 일본의 감시망을 피하여 密行한 사실을 중시하여 대개 ‘密使’로 표현하였으나, 고종이 대표들에게 휴대시킨 委任狀을 보면, 1906년 4월 18일의 이상설에게는 ‘特使’(≪大韓每日申報≫, 1907년 7월 9일), 6월 22일의 헐버트에게는 ‘特別使節’(Clarence N. Weems 博士著, 이재승 抄譯,≪Homer B. Hulbert 博士傳記草稿≫, 李觀熙 소장), 1907년 4월 20일의 3특사에게는 ‘特派’라 표현하였고, 또한 이들의 사명이 을사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폭로하려는 특수목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투숙한 호텔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평화회의의 참석을 위하여 공개적인 활동을 했으므로 ‘特使’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를 파견하기로 결심하고 참정대신 朴齊純에게 미리 상의를 하였던바, 이 때 박제순이 “일본이 자신을 완전히 신임하고 있으므로 특사파견 사실이 발각되지 않을 것”0172)≪魚潭少將回顧錄≫2, (謄寫印本, 1930).
뒷날 고종이 “박제순을 믿었는데 그것은 짐의 완전한 착각이었고 속은 것이어서 실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라고 실토한 사실을 증거로, 박제순의 그와 같은 조언이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을 궁지에 빠뜨리려는 사전 계획에서 또는 고종의 밀사 파견 사실을 일본측에 제보하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申芝鉉,<世界에 呼訴하다-高宗의 密使>,≪民族의 抵抗-韓國現代史≫3, 新丘文化社, 1972, 210쪽).
이라는 매우 고무적인 발언을 하여 고종은 더욱 결심을 굳히고 곧 인선에 착수하였다. 극비리에 ‘재야인사들’0173)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가 원래 1906년 여름에 개최예정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부터 재야에서는 특사파견 계획이 李儁·이상설·徐正淳·李道宰·李容翊·李種浩·박상궁·베델·헐버트·맨함 등에 의해 은밀히 추진되어 왔다고 한다(柳子厚,≪李儁先生傳≫, 東邦文化社, 1947, 305∼306쪽). 그러나 崔南善은 특사파견의 맨처음 계획이 全德基·李儁·李東輝·李甲·李昇薰·金九 등 서북출신의 YMCA 회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증언하였다(전택부,≪한국기독교 청년회 운동사≫, 정음사, 1978, 100·244쪽).
특히 이상설이 1906년 4월 18일에 출국한 것은 평화회의와 관련된 고종의 密命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柳子厚,≪李儁先生傳≫, 306∼307쪽 및 주요한,≪秋汀 李甲≫, 民衆書館, 1964, 20쪽 및 李相稷,≪韓末雜報≫草藁本 등 다수).
과 숙의한 결과, 을사조약에 대하여 체결의 전말을 누구보다도 소상하게 알 뿐 아니라 ‘황제의 조약파기 선언과 殉社稷’을 주장하는 상소까지 올렸던 전 의정부 참찬 李相卨을 正使로, 원로법관으로서 ‘황제가 반대하고 수상이 감금되고 抑勒으로 결정된 조약’이 과연 국제법상 합당한 것인지 따질 수 있는 전 평리원 검사 李儁을 副使로, 러시아어·불어·영어에 능통한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李瑋鍾을 역시 副使로 하는 3特使가 확정되었다.0174)특사의 인선은 ‘당시 블라디보스톡에 망명중이던 李容翊의 추천에 의해서 되었고 원래는 4명이었다’는 설도 있다(≪魚潭少將回顧錄≫).

3밀사 중 유일하게 국내 재야단체에서 활동하던 이준은 ‘한국이 자주독립국이므로 열국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것은 이치에 응당하다’0175)The Independent, 1907년 5월호.는 내용의 고종의 전권 위임장과 ‘러시아는 한국이 무고하게 화를 입고 있음을 생각하여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참석시켜 한국정세를 설명토록 한 다음 만국의 공의와 정론을 일으켜 한국이 권리회복을 얻도록 도와달라’0176)朝鮮總督府 編,≪日韓合倂秘史≫, 제5장<韓皇廢位及日韓新條約の成立>278∼282쪽.라는 내용의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를 휴대하고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다음 북간도에서 달려 온 이상설과 합류하였다.

이와 전후하여 고종은 헐버트를 파견하여 밀사들의 활동을 측면 지원할 계획도 세웠다. 고종의 당초 계획은 1906년 여름 헐버트를 미리 보내어 각국의 수도를 방문케함으로써 다음해 헤이그에서 활동할 기반을 준비시키려는 것이었으나 비밀이 탄로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1907년으로 연기하였던 것이다. 이에 헐버트는 3특사가 헤이그에 도착하는대로 현지에서 합류할 것에 합의하고 4월초 3특사의 출발에 앞서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떠났었다.0177)H. B. Hulbert, The History of Korea(The Methodist Publishing House, Seoul, 1905:Hillary House, New York, 1962), pp. 52∼53.

이상설·이준 일행이 한국 교민 2세인 車니콜라이의 안내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한 것은 1907년 6월 중순경이었다. 여기서 이들은 이위종과 합류하여 평화회의에 제출할 長文의 ‘控告詞’와 일본의 불법행위를 폭로한 ‘부속문서’를 정리하는 한편, 이위종의 아버지이며 러시아 공사를 지낸 李範晋의 소개로 전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K. I. Waeber)와 파블로브를 만나 자신들이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할 고종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었음을 알렸다. 이 자리에서 이상설·이준 두 사람은 파블로브에게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를 전달할 수 있도록 알현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더니 수일 후 알현이 성사되어 친서를 전달할 수 있었고, 러시아 외무대신과도 만나 한국의 입장과 주장을 협의하였다.0178)姜相遠,≪李溥齋先生略史草案≫.
≪日本公使館記錄≫, <1907∼1909년 在露韓人>機密第六號.
尹炳奭,≪李相卨-海牙特使李相卨의 獨立運動論-≫(一潮閣, 1984), 62∼63쪽.
그 당시 일본측의 정보 보고에 의하면 러시아 외무대신이 한국특사들을 만나주지 않았고 고종의 친서도 전달여부가 불명인 것으로 되어 있다(≪日本外交文書≫40-1, No. 438, 428쪽).

이상설·이준은 이위종을 대동하고 페테르부르그를 떠나 베를린에 도착하여 준비서류를 인쇄한 다음 6월 24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0179)H. B. Hulbert, op. cit., p. 53. 이들의 헤이그 도착 사실은 페테르부르그 주재 네덜란드 신문사 특파원이 6월 28일자로 보도함으로써 유럽 각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3특사는 헤이그 시내 바겐슈트라街 124번지에 있는 레용이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용스(de Jongs) 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 앞에 태극기를 게양하여 밀행에서 공개활동으로 전환했음을 보인 다음,0180)Haagsche Courant, Friday 6 Sept. 1907.
田保橋潔,≪朝鮮統治史論稿≫(成進文化社, 1972 영인간행), 27쪽.
28일에는 일본을 제외한 각국 대표들에게 불어로 번역된 長書를 배포하고, 29일에는 러시아의 수석대표이며 헤이그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A. I. Nelidov)를 방문하여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을 체결당한 사정을 설명하고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가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넬리도프는 회의 참가에 대한 결정권이 형식상의 초청국인 네덜란드 정부에 있다고 책임을 회피하였다.0181)Haagsche Courant, Set 29 June, 1907.

넬리도프와의 교섭에 실패한 특사들은 네덜란드 외상과 각국 사절을 歷訪하면서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고 회의 참석권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후온데스 외상의 한국에 대한 태도는 완강한 것이었다. 그는 영일동맹·영일공수동맹 및 포오츠머드 강화조약에 의해서 한국은 일본의 보호하에 들어갔음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고, 아울러 “을사조약에 의해 외교권이 일본에게 위임되어 2년간이나 외국과 斷交되었으므로 한국은 독자적인 외교권 행사가 불가능하여 회의 참가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한국 대표의 참석을 거부하였다. 특사들은 영강들간의 일방적 약조와 황제의 승낙이 없는 을사조약은 효력을 발생할 수 없으며,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가하려는 목적도 을사조약이 무력의 위협하에 강제로 체결된 것임을 세계만방에 고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네델란드 외상은 한국은 이미 외교권을 상실하였고, 그 증거로 주한 각국 외교관들이 철수했다는 사실을 들면서 끝내 한국측의 요구를 묵살해 버렸다.0182)Clarence N. Weems, ed, Hulbert's History of Korea, Vol.Ⅰ(Hillary House Publishers Ltd. New York, 1962), pp. 52∼54.
柳子厚,≪李儁先生傳≫, 356∼358쪽.
이에 특사들은 중재 재판을 다루는 제1분과위원회에 출석하여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여 외교권을 빼앗고 자유권을 손상하니 서로 교호하는 우의와 약소국을 부축하는 뜻으로, 이를 각 우방에 알려서 법을 세우고 한국의 독립을 보전하도록 힘써달라”0183)The Independent, 1907년 8월호.는 내용의 황제의 평화회의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제출하려 했지만, 그것조차 정치적인 문제는 제1분과위원회의 심의사항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됨으로써 아무런 효력을 발하지 못하였다.0184)≪Homer B. Hulbert 博士傳記草稿≫, 1∼24쪽.

특사들은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대표들을 개별 방문하여 그들에게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체결한 을사조약은 황제의 동의가 없었고, 무력을 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법률과 관습을 무시해서 행동한 사실 등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므로 우리 일행은 이처럼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서 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었는데도 일본에 의해 회의참석이 어려우니 여러분들의 호의적 배려가 있기를 바란다”0185)≪日本外交文書≫40-1, № 453, 435∼436쪽.는 요지의 호소문을 배포하여 각국의 동정을 얻어내고 여론을 환기시켜 회의에 참석하려는 노력도 해보았다. 특사들의 이와 같은 노력은 의장인 넬리도프와 네덜란드 외상과의 교섭이 모두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취해진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특사의 노력에 못지 않게 일본의 방해공작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6월 27일 경에 한국사절의 존재를 확인한 헤이그 주재 일본대사 츠즈키 케이로쿠(都築馨六)가 急電으로 이를 본국 정부에 알렸고, 이에 일본 정부는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즉각 헤이그의 츠즈키, 동경의 수상 사이온지 킨모치(西園寺公望)와 외상 하야시 타다스(林董), 그리고 서울의 조선통감 이토 사이의 3각 통신망을 구축하여 특사의 회의 참석과 그 밖의 행동을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방해하기 시작하였다.0186)≪日本外交文書≫40-1, № 433∼472, 425∼449쪽.
≪日本公使館記錄≫, <1907年 海牙密使事件及韓日協約締結>.
츠즈키는 특사들이 가지고 온 신임장과 친서가 모두 위조이고 한국에 대한 외교권은 자기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자치능력이 없는 이 미개 민족에 대해 일본이 그 보호를 담당하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선전이 효력을 발휘하여 특사들은 번번이 각국대표들로부터 면회를 거절당했고, 설사 면회가 이루어졌다하더라도 그들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받아야 했다.0187)≪大韓每日申報≫, 1907년 7월 3·7·14일. 더욱이 미국은 ‘태프트-가츠라 밀약’(1905. 7. 29)에 따라, 영국은 ‘영일동맹’(1902. 1. 30)에 따라 이미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특수권익을 인정했고, 프랑스는 청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문제로 일본과 ‘佛日協定’을 막 체결한 상태였고(1907. 6. 10), 믿었던 러시아조차 ‘외몽골에 있어서의 러시아의 특수권익을 일본이 인정하고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정치상 권익을 러시아가 승인하는’ ‘제1차 러·일협약’ 체결(1907. 7. 30 예정)을 목하 일본과 진행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이들 열강들이 공식적으로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0188)≪日本外交文書≫40-1, № 123, 120쪽, № 436, 427쪽.
國會圖書館立法調査局編,≪舊韓末條約彙纂≫上中, (新書苑, 1989), 244∼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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