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3. 특사의 헤이그 평화회의 파견
  • 3) 특사의 장외 언론활동

3) 특사의 장외 언론활동

특사들은 평화회의에 참석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언론을 통한 활약으로 한국의 억울한 사정과 일본의 침략을 세계에 알릴 수는 있었다. 이에는 헐버트의 활동이 크게 작용했다.

헐버트는 특사 일행에 앞서 4월 초 한국을 출발하여 일본과 중국을 경유, 다시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러시아를 거쳐 스위스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상설 등의 특사 파견 계획이 탄로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자신이 고종으로부터 밀명을 받아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발설함으로써, 소문이 꽤 널리 퍼져 나갔고 이 때문에 일본은 헐버트가 평화회의에 참석한다는 사실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0189)≪日本外交文書≫40-1, № 436, 427쪽. 헐버트는 스위스·프랑스 등지에서 언론인들과 접촉하면서 한국을 위해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는데, 특히 뒷날 한국 특사들의 활동에 다대한 도움을 준 영국의 언론인 스태드(W. T. Stead)를 베를린에서 만나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여 그의 협력을 얻는데 성공했다. 스태드는, 1898년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 때는 저명한 신문기자로서 활약하였고,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즈음해서는 헤이그에서 출판되는≪꾸리에 드 라 꽁페랑스≫(Courrier de la Confèrence)라는 일간신문을 편집하고 있던 사람인데, 특사들의 언론을 통한 활약은 주로 이 사람의 도움으로 행하여졌다.0190)H. B. Hulbert., op. cit., pp. 52∼53.
Clarence N. Weems, ed, op. cit., pp. 52∼53.

한국 특사들에 관하여 외국신문들이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6월 30일부터였다. 동일자≪꾸리에 드 라 꽁페랑스≫에는 특사들이 각국 대표들에게 보낸 호소문의 全文이 게재되었다. 또 스테드는 편집자 주석 기사를 통하여 특사들의 신임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황제 자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따라서 한국대표들은 공식초청을 받지 않았다하더라도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191)Courrier de la Conférence, Sunday 30th June, 1907. 이것을 시발점으로 해서≪꾸리에 드 라 꽁페랑스≫이외의 여러 신문들도 한국의 특사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문의 보도는 일본 당국을 몹시 당황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0192)The New York Herald, 1907년 7월 15일. 특사들이 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효과는 가져다주지 못했다하더라도 세계에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입장을 주지시키는 역할은 할 수 있었다.

특사들의 언론을 통한 활약의 절정은 평화회의를 기회로 개최되었던 각국기자단의 ‘국제협회’(The Foundation of Internationalism)에서 행한 이위종의 연설이었다. 이 협회를 주재하던 스태드의 협력을 얻어 7월 8일 밤 이상설과 이위종은 귀빈으로 초대되었는데, 이위종은 많은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모인 석상에서 유창한 불어로 일장의 연설을 하였다.0193)≪日本外交文書≫40-1, № 455, 436∼437쪽. 이위종은 오랫동안 러시아에 머물러 영·불·러시아어 등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스태드의 소개에 이어 등단한 이위종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통하여 일본의 침략에 희롱당한 조국의 처지를 절규하였다.

<한국을 위하여 호소함(A Plea for Korea)>(요지)

러일전쟁 중 일본이 공언한 전쟁목적의 두 가지는 첫째, 한국독립의 유지와 영토보전, 둘째, 극동의 교역을 위한 지속적인 문호개방의 유지였다. 또한 일본의 정치가들은 이번 전쟁이 일본 자신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문명을 위한 싸움이라고 선전하였으므로 동양에 파견된 영·미인 모두가 일본의 언명에 대한 이행을 믿었으며, 특히 한국은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장기집정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와 가혹한 행정에 허덕여왔으므로 일본인들을 애원과 희망으로 환영하였다. 그당시 우리들은 일본이 부패한 정부관리들을 처벌해주고, 일반 백성에게는 정의감을 북돋워주고, 정부 당국의 정치·행정에 대해서는 진실한 조언자가 되고, 한국민들의 개혁운동을 잘 인도하여 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일본인들은 거듭하여 그들의 한국진출을 한국의 문호개방과 모든 백성을 위한 기회균등의 보존을 공고히하기 위함이라고 극구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연승을 거두게 되자 태도를 바꾸어 추잡하고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이고 가혹한 처사를 감행하였고 지금도 여전하다. 그들의 맨 처음 요구는 한국영토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미개간지를 하등의 보상도 없이 50년간 그들에게 양도하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의 요구는 일본황제 특사인 이토가 저들 군마보포병을 동원하여 궁궐을 애워 싼 가운데서 11월 15일에 제시한, 그들에 의해서 꾸며진 조약체결 내용을 황제가 동의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이 조약의 초안은 첫째, 한국의 대외적 문제의 관할 및 지휘는 일본에게 위임할 것, 둘째, 한국 정부는 국제적 성격의 어떠한 회합이나 약정일지라도 일본의 중개 없이는 결정짓지 않는다는 것을 서약할 것, 셋째, 서울에 일본통감을 배치할 것, 넷째, 한국 내에 일본 주재관을 임명할 것 등 네 가지로 되어 있다.

한국황제와 대신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결심했는데도 불구하고 이토가 이를 고집했기 때문에 황제는 이에 동의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7일 저녁까지도 결론을 짓지 못하자 일본은 “이를 수락하지 않으면 만사에 있어서 즉각적인 파괴를 의미할 뿐이다”라고까지 위협해 왔다. 공포에 질린 대신들은 주변에서 나뭇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듣더라도 일본군인들이 살그머니 옆에 접근해 오는 것으로 상상할 정도였다.

급기야 완강히 거부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을 체포하여 감금한 상태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평론가나 선전가들은 세계만방에 대하여 이 조약이 마치 한국측의 선의적이며 자진적인 양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가장 우의적이며 형제적인 우호관계를 가진 체 하면서 슬쩍 상대방의 호주머니를 터는 위선가는 공개적인 강도 행위보다도 더욱 경멸해야 할 일이며 잔인한 일일 것이다.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은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강탈·강도 또는 잔인한 흉계 등을 감행하였으니 이로 인한 3년간의 실질적인 손해는 구체제하 정부의 가장 잔혹한 정치가 50년간 저지른 해독보다 더욱 심한 것이었다. 이토가 일본에서 1억원(500만불)을 차관해 온 돈으로, 재한 일본인 관리들은 본토 봉급의 3∼4배를 받았고, 수도공사는 일인들의 거주지인 제물포와 서울의 日本人街에만 시설되었으며, 교육기관의 설치는 한국어를 根滅시키고 일본어를 대신 가르치려는 것이었고, 한국인의 해외유학은 반일주의를 호소·선전할 우려가 있다고 불허하였으며, 행정개혁은 유능하고 신망 있는 한국인 정치가를 축출하고 일본화한 사람들로 대치한 것에 불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정권은 개인 소유지를 군사상의 필요에서 아무런 보상 없이 박탈하였으며 화폐제도를 개혁하여 한국상인들을 파산상태로 몰아넣었다. …

일본인들은 항상 평화를 말하지만 어찌 사람이 기관총구 앞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겠는가. 한국민이 모두 죽어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의 독립과 한국민의 자유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한 극동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 한국 국민들은 독립과 자유라는 공동 목표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하여 한국 국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인의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이기적인 침략에 대항하고 있다. 여하한 행동을 해서라도 일본인과 싸우려고 결심한 2천만의 한국 국민을 대량 학살한다는 것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그다지 흥미 있거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문호개방에 대한 엄숙한 공약을 배반하였다(YE WE CHONG, "A Plea for Korea" The Independent, Vol. LXⅢ, New York, 1907년 8월호).

이러한 이위종의 열정적인 호소는 참석한 세계 각국의 많은 기자들을 감동시켜 폴란드 기자의 제안에 따라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의 박수로써 채택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신문에도 보도되어 세계의 이목에 한국의 입장을 알리는 효과를 발휘하였다.0194)Haagsche Courant, Wed. 10, July, 1907.

헐버트는 특사들보다 15일 늦게 7월 10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그 동안 그는 파리 등지에서 활약하면서 “일본이 서구인들과 한국인들을 배제하고 한국의 모든 재산을 독점하려고 하는 때에 유럽국가들이 한국문제에 이처럼 무관심하다면 다음에 후회하게 될 것이다”라고 선전·선동하여 특사들을 측면지원하였다.0195)≪日本外交文書≫40-1, № 441, 429∼430쪽. 그는 헤이그에 도착한 그날 저녁 스태드의 요청으로 기자회의에서 이위종의 연설취지와 같은 내용의 연설을 하여 한국 특사들의 호소를 뒷받침하였다.0196)≪日本外交文書≫40-1, № 459, 438∼439쪽.

이처럼 특사들의 장외활동이 활발하였으나 회의 참석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한국 특사들의 호소가 비록 절절하여 열국 기자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고 소수이긴 하나 회원국 대표들의 개인적인 동정도 얻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커피포트 안에서의 소동’에 불과할 뿐 국제여론을 바꿀 수는 없었다.0197)Hilary Conroy, The Japanese Seizure of Korea, 1868∼1910(Philadelphia:Univ. of Pensylvania Press), pp. 347. 헤이그 평화회의의 근본 취지가 강대국간의 군비경쟁의 수위를 상호 조절하는데 있는 이상 식민지 경략에 여념이 없었던 세계 열강들이 한국과 같은 약소국의 입장에 아무런 협조의 손길도 뻗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만약 러일전쟁 직전에 한국이 선언했던 국외중립이 성공했더라면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목하 논의되어 결정되었던 중립국의 권리·의무 조항에 따라 어느 정도 혜택을 입었을런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실패한 한국으로서는 이 회의 회원국들의 관심 밖일 수밖에 없었다.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의 이러한 성격을 朴殷植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가 만약 그 이름과 같다면, 무기를 녹여서 玉帛으로 만들고 쟁투를 종식시켜 겸양으로 변하게 하고 강권 횡포를 억눌러 약자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풀어주고 지구상에 和氣를 가득채워 중생들에게 복락을 가져다 줄 수 있으니 어찌 人道의 旗幟와 公理의 표준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회의를 제창하고 주도권을 행사하는 자는 누구이며 여기에 참석하여 조약문을 낭독하는 자는 누구이더냐. 모두가 매와 호랑이 눈빛처럼 위협하고 원숭이처럼 속이고 이리처럼 탐욕하여 날로 약소국을 침략 병탄하고 남은 종족을 박멸하는 것이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할 버릴 수 없는 의무인 양 생각하고 있으니, 어찌 이른바 평화주의라는 이름으로 약소국을 구휼하고 횡포를 억제하고, 멸망하여 단절되어 가는 국가를 일으켜 계승시키는 일들을 하여 公法을 밝히고 正道를 지킨다고 할 수 있으리오. … (朴殷植,≪韓國痛史≫, 三乎閣, 1946, 114쪽).

이로써 한국 특사들의 헤이그 활동은 약소국으로서의 통한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막을 내려야 했다. 이위종은 국제협회 연설 직후 페테르부르그로 떠났고, 이준은 7월 14일 갑작스럽게 殉國하였으며,0198)현지 소식통들은 이준의 死因을 안면의 腫氣 제거수술 후유증 때문으로 보도하였다(Haagsche Courant, July 7. 1907 및 Courrier de la Conférence, July 7. 1907 및≪日本外交文書≫40-1, № 462, 439쪽). 이상설은 이위종과 다시 합류하여 7월 19일 헤이그를 출발,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떠났다.0199)≪日本外交文書≫40-1, № 463, 440쪽.
김원용,≪재미한인오십년사≫(Readley Calif. U. S. A., 1958), 313쪽.
그 뒤 이들 일행은 9월 6일에 잠시 헤이그에 다시 들러 그 동안 假葬해두었던 이준의 유해를 현지의 ‘청년기독협회’(The Christian Union of Young Men)의 도움을 받아 ‘뉴브 아이큰다우’(Nieuw Eikenduinen) 공동묘지에 안장한 다음0200)Haagsche Courant. Sept 5, 6, 1907. 프랑스·독일·이태리·러시아·영국 등지로 순방외교에 나섰다.0201)≪大韓每日申報≫, 1907년 12월 11일 外報.
김원용, 앞의 책, 313∼314쪽.
특히 이상설은 각국의 국가원수나 정치지도자를 만나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함은 물론 동아시아의 영구평화를 위한 한국의 永世中立을 주장하였다.0202)Haagsche Courant, Sept, 6, 1907.
≪大韓每日申報≫, 1907년 7월 27일·8월 27일.
≪日本外交文書≫40-1, № 466, 446쪽.
이들은 다시 미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에 시베리아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하였고,0203)姜相遠,≪李溥齋先生略史草稿≫.
李完熙,≪溥齋李相卨先生傳記抄≫.
이위종은 페테르부르그로 떠난 후 생사가 묘연해져 버렸다. 이처럼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 참석차 조국을 떠났던 특사들이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국제적인 迷兒가 되어버린 것은, 이들의 밀파사실이 알려진 직후 조선통감부가 한국 法部를 강압하여 특사들을 ‘使命을 띤 官人詐稱罪’로 기소하고, 이에 따라 1907년 7월 20일 平理院(재판장 趙民熙)이 궐석재판을 개정하여 正使 이상설에게는 主犯으로서 사형을, 副使 이준·이위종에게는 從犯으로서 종신형을 각각 선고했기 때문이다.0204)≪舊韓國官報≫, 1907년 8월 12일.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