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Ⅰ. 외교활동
  • 3. 특사의 헤이그 평화회의 파견
  • 4) 특사 파견의 파문

4) 특사 파견의 파문

고종을 축출할 계기만을 노리고 있던 일본에게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의 특사 파견 사건은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통감 이토가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韓皇特派使節에 관한 전문을 받았던 것은 1907년 7월 3일이었다. 이토가 이 중대정보를 받고 ‘이제야말로 稅權·兵權 또는 재판권 등 한국의 주권을 탈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인정한다’는 답전을 보낸 다음 한국 황제에게 특사파견에 대한 책임을 강박적으로 추궁하였는데, 그는 고종에게 특사파견은 일본에 대한 적대행위이고 협약위반이므로 “이와 같은 음험한 수단으로써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일본에 대하여 당당히 선전포고를 하라”고 협박했다. 난처한 처지에 빠진 고종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지만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이토는 같은 날 참정대신 이완용에게도 “황제가 조약을 무시하고 일본에 대해 공공연히 적대행위를 했으므로 선전을 포고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귀하가 적의하게 수상된 책임으로서 韓皇에 주청하여 처결을 촉구해야 한다”0205)春畝公追頌 編,≪伊藤博文傳≫下, (1940), 751쪽.고 위협하였다. 이에 7월 6일 소집된 어전회의에서 이토에 의해서 등용된 농상공부대신 宋秉畯 역시 고종에게 특사파견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사태수습책으로써 황제가 친히 일본에 건너가서 日皇에게 사죄를 하든지, 아니면 大漢門에 나가서 주한일본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를 맞이하여 항복하든지의 두가지 굴욕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협박했다.0206)朴殷植,≪韓國痛史≫, 117쪽.

이토의 침략행위는 그 혼자만의 구상이 아니었다. 뒷 날 가츠라 타로가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도 “황제 및 정부 당국자들로 하여금 과실을 범하게 할 수 있다면 이는 대 한국 정책상 가장 좋은 구실이 될 것이다”0207)山邊健太郞,≪日韓倂合小史≫(東京:岩波書店, 1966), 219쪽.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이토의 행위는 일본 정부 당국자들의 한국에 대한 보편적인 정서를 잘 실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 정부는 7월 12일자로 조선통감부에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한국 정부에 관한 전권을 장악할 것을 희망하며, 만일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내각 대신 이하 중요 관리를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으로 채울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이 문제는 극히 중요하므로 일본 외무대신을 직접 한국에 보낼 터이니 통감과 협의하여 신중히 진행하도록 하라’는 훈령을 내리고 있다.0208)≪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7년<海牙密使事件及日韓協約締約>.
釋尾東邦,≪朝鮮倂合史≫(京城:朝鮮及滿洲社, 1926), 347∼348쪽.

일본 정부는 이러한 침략 목적의 수행을 위하여 외무대신 하야시 타다스를 7월 18일에 서울에 파견하고, 도착 당일에 한국의 어전회의를 소집토록 하여 고종에게 특사파견에 대한 책임을 또 다시 추궁하면서 퇴위를 강요하였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친일 각료들 가운데서 고종의 퇴위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역시 송병준이었다.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고종은 결국 7월 18일 밤 황실과 국가의 대사를 황태자에게 대리시킨다는 詔勅을 발표하였다.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복귀를 전제로 한 일시적 후퇴로써 당장의 사태를 수습해 보겠다는 고육책이었다.0209)≪日本外交文書≫40-1, № 486, 465∼466쪽.
鄭 喬,≪大韓季年史≫하, 광무 11년 7월 16일.
그러나 헤이그 사건 발생 한 달 전인 5월 22일에 출범한 이완용 내각은 워낙 고종의 퇴위와 친일파 중심의 정계재편을 주장한 공로로 이토에 의해 조각된 정부였기 때문에 고종의 일시적 후퇴를 항구적 퇴진으로 몰아갔다.0210)≪駐韓日本公使館記錄 마이크로필름≫No. 253,<明治39년 統監府報告>. 드디어 7월 20일, 홀로 고종의 양위를 반대하던 궁내부대신 朴泳孝가 파면되고 고종과 황태자가 모두 불참한 가운데 참정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任善準, 탁지부대신 高永喜, 군부대신 李秉武, 학부대신 李載崑, 법부대신 趙重應,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등 이른바 ‘七賊’0211)柳子厚,≪李儁先生傳≫, 384∼386쪽.과 몇몇 원로만이 모인 자리에서 고종의 양위가 선포되고 말았다.0212)≪高宗實錄≫, 광무 11년 7월 18∼20일.

일본의 온갖 위협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데까지는 저항을 해 왔던 강력한 배일주의자였던 고종의 퇴위는 결과적으로 일제의 침략을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영향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고종 퇴위 4일만인 7월 24일에 조인된 ‘韓日新協約(丁未七條約)’이었다. 이 조약은 일본이 한국의 입법권·행정권·관리임용권의 탈취를 통한 內政 장악을 위해 체결된 것으로서, 이토는 우유부단한 신황제 순종을 협박하여 아무런 반발 없이 순조롭게 조약체결에 성공한 것이다. 이에 따라 향후 한국 정부의 운명은, 親日大臣들의 虛像 아래 國事의 실질적인 책임자로서 1908년 1월에 임명된 일본인 次官들, 즉 궁내부차관 小宮三保松 내부차관 木內重四郞 농상공부차관 岡喜七郞 학부차관 俵孫一 탁지부차관 荒井賢太郞 법부차관 倉富勇三郞 경무국장 松井茂 경시총감 丸山重俊 총세무사서 永濱盛三 등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가는 꼴이었다.0213)≪純宗實錄≫, 광무 11년 7월 24일.
≪日本外交文書≫40-1, № 525∼528, 488∼493쪽.
설상가상으로 고종의 양위를 반대하여 발생된 한국군의 궐기는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 군대의 해산을 서두르게 하였다. 이리하여 순종이 즉위한지 10일 이후인 8월 1일에는 한국 군대의 해산이 단행되어 한국은 군대 없는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0214)≪舊韓國官報≫, 1907년 8월 1일.

특사사건을 계기로 한국은 제국주의적인 세계질서 속에서 고립무원의 국가임을 확인받게 된 셈이며, 그 결과로 초래된 고종의 양위로 한국은 통치자를 잃고 일본의 내정간섭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가 한국에 가져다 준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하여 朴殷植은 “한국이 평화회의 밀사문제로 거꾸로 일본인에게 구실을 주고 禍를 촉진케 하였으니, 이는 소위 평화라는 名詞 때문에 우리 나라를 크게 그릇되게 한 것이다”라고 評하였다.0215)朴殷植,≪韓國痛史≫, 114쪽.

<朴熙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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