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4. 국채보상운동
  • 2)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 (2) 여성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2) 여성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국채보상운동은 신분, 성별, 직업, 지역을 초월한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다.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첫 반향은 여성계에서 가장 신속하게 나타났다.0399)朴容玉,<國債報償運動의 發端背景과 女性參與>(≪日帝經濟侵略과 國債報償運動≫, 아세아문화사, 1994), 142∼192쪽. 신문에 국채보상취지서가 게재되자, 여성들은 즉각 개인적으로 참여하였다.

相思洞의 李召史는 은패물 머리장식을 팔아 구화 4원을 대한매일신보사에 보냈으며,0400)≪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24일, 잡보<忠義所激>. 主醫院卿 梁性煥의 딸로 牙山 白岩의 李氏家에 출가하여 일찍이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혼자 키운 과부 梁氏는 서울 친정에 왔다가≪제국신문≫을 보고, 여자도 또한 대한 국민의 한 사람이라며 한화 20원을 제국신문사로 보냈다.0401)≪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26일, 잡보<夫人愛國>. 2월 24일에는 대구시장의 짚신장사·채소장사·술장사·떡장사 등의 행상을 하는 시골 할머니들이 50, 60전 내지 1, 2원을 다투어 의연하였다.0402)朴容玉, 앞의 글, 143쪽.

대구 국민대회 이틀 후인 2월 23일 대구 남일동의 부인들이 南一洞佩物廢止委員會를 결성하고 전국 부녀동포에게 ‘경고아부인동포라’고 하는 제목의 격문을 작성하여 신문에 게재하였다. 격문에서는 국채를 갚으려고 2천만 동포들이 석 달간 연초를 끊고 그 대금을 모금한다는 것은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고 진정 아름다우나, 보상취지서가 남성의 참여 방법만을 제시한 것을 비판하고, 여자도 나라의 백성이니 다소를 불구하고 패물 등속을 바쳐 혈심 의연하여 국채를 갚자고 제의하였다.0403)≪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8일, 잡보<경고아부인동포라>.

이것은 여성들이 처음으로 조직을 통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것이었다. 정운갑처 서씨·서병규처 정씨·정운화처 김씨·서학균처 정씨·서석균처 최씨·서덕균처 이씨·김수원처 배씨 등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발기인들은 자발적으로 솔선하여 자신들의 은반지·은장도·팔찌·목걸이 등 총 13냥 8돈중의 패물을 보상운동에 의연하였다.

대구의 부인들이, 여성도 국채보상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을 분연히 외치자, 각지에서 적극 동참하여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갔으며, 언론기관에서도 여성의 의연을 특별히 게재하여 격려하였다.

① 서울 지역

서울에서는 金一堂·金石子·朴悔堂 등에 의하여 2월 28일에 식생활을 절약하여 국채보상금에 보태자는 뜻으로 婦人減餐會가 처음으로 결성되었다. 부인감찬회는 朝夕飯米를 반감하여 그 감한 것을 3개월간 국채보상금으로 의연할 것을 결의하고, 부인들을 권면하는데 나섰다. 이들은 한 사람의 3개월간 쌀 소비량은 세 말이므로, 그 반값인 한 말 반의 쌀값 2원 70전을 의연하고, 실행기간은 3개월, 2개월, 1개월 등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율적으로 참여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발기인들은 먼저 3개월간의 감찬비를 출연하여 황성신문사로 보냈다. 또 많은 부인들의 참여를 권고하는 부인감찬회 경고문 500장과 영수증 3책을 정밀히 인쇄하여 3월 14일 경에 황성신문사에 전하여, 경고문은 신문을 배포할 때 1장씩 끼워 전달케 하고, 영수증은 의연하는 부인에게만 繕給하도록 부탁하였다. 부인들의 減餐은 남자들의 단연보다 실천이 더 어렵고 많은 인내가 필요한 것이었으므로,≪대한매일신보≫나≪만세보≫는 부인들의 감찬이 애국심과 과단성에 있어 뜻 있는 남자들보다 훨씬 존경할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0404)≪萬歲報≫, 1907년 3월 2일,<婦人減餐會警告文>·<婦人減餐會發起>.
≪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3일, 잡보<茶半叢話>.
≪皇城新聞≫, 1907년 3월 1일, 잡보<夫人愛國>·15일, 잡보<兩夫人愛國熱誠>.
부인감찬회를 발기한 3인은 모두 一進會 간부들의 副室이었는데, 이들도 국채가 국가와 민족의 존망과 관련되는 것임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인감찬회가 조직된 이후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에의 참여는 매우 활발해졌다. 또한 서울에서는 직업 등을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국채보상에 참여한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藥房 妓生 39인이 신화 20여 원을 모집하여 제국신문사에 납부하였으며,0405)≪皇城新聞≫, 1907년 2월 26일, 잡보<藥妓烟價>. 太醫院 醫女 41인이 24원, 궁내부 기녀 40인이 24원을 의연하였다.0406)≪帝國新聞≫, 1907년 2월 25일, 잡보<國債報償>·3월 8일, 잡보<국채보상>.

여학생들이 집단적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것은 養閨義塾 여학생 33인이 4원 20전, 이화학당의 교사와 생도 35인이 5원 70전을 의연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0407)朴容玉, 앞의 글, 151쪽. 상류층 양반집의 부인들도 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초에 大安洞國債報償婦人會가 결성되어<國債報償婦人會趣旨書>를 전국 부인들에게 보냈다.0408)≪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15일, 잡보<국채보상부인회취지서>. 취지서에는 여성도 국가의 혜택을 입고 있으므로 백성된 도리로서 참여하여 협력하자는 뜻에서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한 것임을 밝히고, 각자가 의무를 느껴 자발적으로 의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들은 회원자격을 양반부인에 한하지 않고, 누구든지 의금을 내기만 하면 성책에 올려 같은 회원이 된다고 함으로써 신분적 개방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앉아서 의금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이 직접 집집을 찾아다니며 독려하고, 바로 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약속 예정액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의 적극적인 활동이 물의를 일으키자, 부인회에서는 3월 20일 경 기금을 억지로 수렴하지 않고 누구든지 의금을 가져오는대로 받는다는 취지서를 여성들에게 보내고 보상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장만 하였다.0409)≪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21일, 잡보<夫人知義>·23일, 잡보<협잡가통>.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에서 전통사회의 지도적 위치를 점하던 북촌의 양반가 부녀들에 의하여 조직되었으므로 사회적 지도력과 공신력이 높았으며, 여성계의 국채보상운동을 대표하는 총합기구로서의 역할을 자임하였다. 그들은 양반 부인들의 전통적인 고압 자세를 버리고 적극 발벗고 나서 실천적으로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지방의 호응을 많이 받았다.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가 조직된 후 11월까지의 모금실적은 1회에 걸쳐 199명으로부터 현금 141원 10전, 은 4냥중을 수합하여 대한매일신보사로 보냈는데, 그 가운데 다섯 번은 지방에서 수합한 것이었다.0410)朴容玉, 앞의 글, 148쪽.

이 밖에 서울에서는 전부터 설치되어 있던 여성단체들의 국채보상운동도 활발하였다. 서울여자교육회·진명부인회·대한부인회 등이 보상금 모집소를 설치하여 활동하였다.

② 경상도 지역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이자 여성단체가 제일 먼저 조직된 곳이었으므로, 대구 여성들의 국채보상 참여는 매우 활발하였으며 참여자도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대구 斷煙會가 北後停에서 국채보상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민대회를 개최한 지 2일 후인 2월 23일 대구 여성들은 南一洞佩物廢止婦人會를 결성하고, 남성 위주의 국채보상운동의 편파성을 지적하는 한편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여성들의 의식을 계발시키는 계몽적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구의 여성들은 현금과 쌍가락지, 은장도 등을 대구군 국채보상회사무소에 집송하였다. 大邱斷煙償債會事務所가 대한매일신보사에 보낸 의연자의 명단 중 부인은 227인에 달하였고, 이들은 舊貨 407냥 3전, 新貨 189원 90전, 그리고 패물 5점을 출연하였다.0411)≪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12일 및 5월 14·16·17일, 광고. 이렇듯 대구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 결성 이후 계속해서 귀천을 불문하고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 참여가 늘어났는데, 특히 남의 집 고용살이나 針工으로 겨우 생명을 이어가는 여인들의 의연과 외로운 과부의 의연은 많은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들을 감동케 하여 참여의식을 한층 더 고취시켰다.0412)李尙根, 앞의 글, 19쪽.

부산에서는 여성들이 오히려 남성보다 먼저 이 운동에 참여하여 釜山港佐川里婦人會減膳義捐會·부산영도국채보상부인회, 그리고 부산항 내의 기생단연동맹·수정동부인의연회 등이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박정희의 처 淑夫人 張氏가 중심이 되어 좌천리에서 조직된 부산항좌천리부인회감선의연회는 충군애국의 마음은 남녀가 다를 수 없다고 강조하고, 가정의 治産을 맡은 부인들이 우선 살림에서 절용하여 조석 반찬값에서 매일 3, 4푼씩을 줄여, 한달에 新貨 20전 가량을 모아 국채보상금으로 출연하여, 이것으로 국채의 적은 부분이라도 갚아 국토를 지키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를 밝혔다.0413)≪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19일, 잡보<부산항좌천리부인회감선의연취지서>·7월 17일, 광고.

부산영도국채보상부인회는 언제 조직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6월 22일에 100명이 신화 16원 12전을 의연하였다.0414)≪皇城新聞≫, 1907년 6월 22일, 광고<國債報償義務金集送人員及額數>. 부산항 水晶里에서는 3월 말에 朴春必의 弟妹와 前侍從 金智泰 夫人 김씨가 애국의연에 남녀가 있을 수 없다며 국채보상에 참여하였다. 박춘필의 제매는 은비녀 8전중, 김지태 부인 김씨는 은가락지 1냥 9전 4푼중을 보내고, 田周汝 夫人 吳氏는 현금 40전, 金致弘의 16세 女息은 바느질값 1원을 출연하였다. 그리고 6월에 수정동민 40인이 의연하였을 때에도 여성 20인이 夫人義捐會로 참여하여 현금 40원 30전과 은가락지와 은비녀 2냥 2전 3푼중을 출연하였다.0415)≪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29일, 잡보<婦人義捐>·6월 7일, 광고.

진주에서는 晋州愛國婦人會, 愛國償債會 그리고 국채보상경남진주부인회가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진주 이진사의 부실과 河僉正의 부실이 동지 10여 부인과 함께 애국상채회를 발기하고 열심으로 모금하여 크게 발달하였다.0416)≪皇城新聞≫, 1907년 3월 28일, 잡보<婦人愛國>. 3월 19일 애국상채회가 진주 鳳儀樓에서 주최한 償債 연설을 듣고 감동된 진주의 기생 芙蓉은 귀가 즉시 동지 기생들을 규합하여 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의연금을 모았다. 그런데 진주성 안의 姜周植이 애국부인회에서 모은 金貨를 자기네 會로 수납하라고 압력을 가해왔다. 애국부인회가 즉각 반대하자, 강주식은 다수의 무리와 일본인 순사까지 대동하고 위협으로 애국부인회를 방해하려 하였다. 애국부인회가 강주식의 강폭한 행동을 공개하는 寄函을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여 공개하자, 서울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 회장 申簫堂은 즉각 애국부인회를 권면하는 謝禮書를 부용에게 발송하였다.0417)≪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27일, 잡보<진주부융형젼례셔>. 진주 애국부인회는 남자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액을 의연하였다. 3월 28일에는 18인이 152원을, 5월 22일에는 232인이 498원 15전을 모아 황성신문사에 보냈다.0418)≪皇城新聞≫, 1907년 3월 28일·5월 22일, 광고. 참여자 대부분이 기생 및 기생과 관련이 있는 여성들이었다. 진주에서는 다른 어느 곳보다도 기생들의 활약이 컸다.0419)朴容玉, 앞의 글, 163∼164쪽.

昌原에서는 4월중에 李開東母夫人 金氏, 玉舜職母夫人 金氏, 李鍾台母夫人 金氏, 朴大見母夫人 金氏 등 4인이 昌原港國債報償婦人會를 조직하였다. 가정과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母夫人들이 직접 각 마을의 집집을 방문하며 효유하자 많은 부인들이 고무되어 참여하였다. 이들은 4월 하순에 67원 70전을 의연하였고, 6월 초순에는 152명이 참여하여 76원 50전을 의연하였다.0420)≪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28일, 잡보<夫人熱誠>·6월 6일, 광고.

이외에도 居昌郡 能陽面 山圃里의 부인 17인이 19원 80전을 의연하였고, 宜寧郡의 退妓 21인이 16원 30전을 모금하여 磚洞 期成會로 수송하였다.0421)≪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13일,<義捐金收入廣告>·26일, 잡보<退妓出捐>. 釜山夫人義捐會도 부인 10인이 7원 90전을 의연하고, 경주군부인회는 총무 이진사 부실 文菊香이 수합한 금액을 황성신문사에 가서 전달하였다.0422)≪大韓每日申報≫, 1907년 5월 2일, 광고.
≪皇城新聞≫, 1907년 5월 22일, 잡보<경남부인회열심>.

③ 경기도 지역

경기도 지역에서는 인천의 掬米積誠會, 金浦郡 黔丹面의 國債報償義務所, 安城의 場基洞婦人會募集所, 南陽郡夫人義成會 등이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1907년 3월 29일 인천에서 기독교 부인들이 발기하여 국미적성회가 조직되었는데, 적성회는 설립취지서에서 세계 각국을 보면 남녀의 분별은 있으나 권리는 여자도 남자와 조금도 등분이 없으며, 또한 여자도 황제의 적자는 일반인데 옛 법만 지키며 안연히 부동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집마다 양식 다루는 주권을 가진 여자들이 매일 먹는 양식 중 식구 수효대로 때마다 한 술씩 모아 국채를 갚기로 작정한다고 밝혔다. 개회식을 정식으로 개최한 국미적성회는 회원 80여 명에서 권고위원 20명을 뽑아, 위원 2명이 한 동리씩 맡아 여성들의 참여를 권고하였다. 그러자 회원 수는 수일만에 500여 명으로 증가되었다. 매주일마다 위원들이 절약미를 수합한 결과, 음력 2월 한달 동안에 미곡 18섬 8되 8홉, 동화 254원 36전, 1냥중짜리 은비녀 2개가 수합되었다.0423)≪제국신문≫, 1907년 3월 14일,<夫人의 愛國誠>·4월 1일,<인천항적성회취지서>.
≪皇城新聞≫, 1907년 3월 24일, 잡보<夫人의 愛國誠>.
김포군 검단면 고찬리에 거주하는 한씨·노씨·김씨 등의 부인들이 조직한 國債報償義務所는 군내의 각 동리에 다니며, 충효의 윤리에는 남녀의 차가 없고 국채보상은 나라의 흥망과 직결되는 것임을 역설하고, 나라가 위급한 때에 부인이라고 안연히 있는 것은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라며 부인들을 일깨우고, 錢荒한 때에 돈만 낼 것이 아니라 금은 패물이나 각종 곡식 등을 힘 닿는대로 의연할 것을 제안하자, 부인들이 일상생활에 별로 소용없는 사치품을 국가에 유효하게 쓰자며 패물을 의연하고, 日常食을 節用하여 곡물을 부인회에 가져왔다.0424)朴容玉, 앞의 글, 153쪽.

안성군에서는 4월 중순에 군청의 직원들이 국채보상금을 모으자, 안성 장터의 중소 상인의 부인들도 동심으로 발기하여, 47인이 19원 50전을 의연금으로 수합하여 대한매일신보사로 보냈다.0425)≪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20일, 잡보<婦人贊成>·5월 19일,<國債報償義捐金收入廣告>. 남양군 남양읍내에 거주하는 기독교 여성인 김희경·김혜경·안마리아 등 3인은 4월에 夫人義成會를 조직하고, 116명이 의연한 43원 6전을 제국신문사로 보냈다.0426)≪帝國新聞≫, 1907년 4월 17일, 잡보<婦人熱誠>. 8월 14일에는 여주 흔바위에 사는 부인 10인이 2원 80전을 대한매일신보사에 의연하였다.0427)朴容玉, 앞의 글, 154쪽.

④ 충청지역

충청도에서는 鎭川郡 廣惠院內 國債報償夫人會와 준 단체적 활동이 비교적 활발하였다. 광혜원의 유지 부인들은 3월에 비록 부인이라도 국채보상에 눈감고 침묵할 수 없다는 취지로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하고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다수 부인들이 힘 닿는대로 은반지와 은비녀를 내놓아, 제1차 의연에서 53인이 엽전 404냥과 은비녀 한 개를 의연하였으며, 일찍이 여자교육회를 설립한 기생 翠蘭은 100냥을 의연했다.0428)≪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31일, 잡보<蘭妓熱心>.
≪皇城新聞≫, 1907년 4월 29일, 잡보<婦人愛國誠>.

또한 충청도에서는 여성들이 단체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에 참여한 것보다 집단적으로 의연한 경우가 많았다. 陰城郡 金目面 無極里에서는 3월 초에 일반 紳士 등이 한화 179원 40전과 은비녀 1개를 의연하자, 21명의 부인들도 은반지 8개, 은비녀 1개, 의연금 15원 20전을 수합하여 대한매일신보사에 보냈다.0429)≪大韓每日申報≫, 1907년 3월 9일, 잡보<簪環報捐>. 報恩郡에서는 7월 말에 都事·進士·監役 등 지역의 지도적인 양반의 부인 75인이 엽전 334냥 5전을 의연하였다.0430)≪皇城新聞≫, 1907년 7월 30일, 광고<義務金集送人員及額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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