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5. 의사·열사의 항쟁
  • 2)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 (2)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과 그 역사적 의의

(2)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과 그 역사적 의의

1909년 10월 일본 추밀원의장 이토는 중국 동북지방(만주)을 시찰하기 위하여 여행길에 올랐다. 일본측에서는 이토의 만주 여행이 개인 자격으로의 여행이며 아무런 사명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발표하였으나, 이 여행에는 완전한 식민지 지배로의 한국의 병합과 만주침략에 대한 현안 문제의 해결을 위한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0460)김창수, 앞의 책, 52쪽. 만주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 다툼 속에서 이토는 양국간의 협상을 통하여 상호 이익을 충족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토가 안중근에게 사살당한 후 1910년 일본과 러시아가 제2차 ‘日露협약’을 체결하였는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만주에서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하여 양국이 이 지방에서 특수한 지위를 상호 확인하여 양국간 이해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여 동맹국으로서의 지위를 구축한다는 것이었다.0461)外務省 編, 앞의 책, 332쪽. 따라서 이토의 만주시찰이 한국의 병탄과 만주지배를 위한 러시아와의 밀약을 체결하려는 움직임이었다고 판단한 안중근은 한국 식민지화의 원흉으로서 이토를 지목하고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읍 광석동에서 진사 安泰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仁壽는 상당한 자산가로서 도내의 명망가였으며, 부는 초년에 신동으로 불릴만큼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안중근은 6세 때 신천군 淸溪洞으로 이주·성장하였다.0462)≪안중근의사자서전≫(안중근의사 숭모회, 1979), 17∼18쪽.
市川正明, 앞의 책, 137∼141쪽.
安重根의 소년, 청년시절에 대해서는 愼鏞廈, 앞의 글, 307∼312쪽 참조.
1905년 말 구국운동의 뜻을 펴고자 고국을 떠난 안중근은 중국의 威海衛·上海 등지를 편력하면서 동지를 구하고 해외정세를 관찰하였다. 그 뒤 1906년 1월 부친상을 당하여 귀국한 후 교육사업에 진력하여 평안도 진남포에 거주하면서 三興·敦義학교를 창설하여 후진양성에 힘쓰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07년 일본에 의한 군대 해산과 고종의 폐위 속에서 안중근은 북간도를 경유하여 露領의 海蔘威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李範允·嚴仁燮·金起龍 등과 교유하면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0463)市川正明, 앞의 책, 147쪽. 1908년 6월에는 두만강을 건너 慶興에서 일본군과 세 차례 교전하여 일본군 5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會寧에서의 격전에서는 대패하고 말았다.0464)김창수, 앞의 책, 53쪽. 이와 같이 그가 의병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할 당시부터 무장투쟁이 구국의 첩경이라는 믿음의 결과였다. 안중근은 민족의 당면한 과제로 교육과 실업에 의한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일과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는 일을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0465)≪안중근의사자서전≫, 106∼108쪽.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였지만 국권상실의 위기에 직면하여 현실적으로는 무력투쟁이 국권수호를 위한 적극적·우선적인 방법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0466)白奇寅,<安重根의 國權守護運動과 思想>(≪淸溪史學≫13, 1997), 444쪽. 그러나 1908년 8월 이후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이 실패하고, 그는 1909년 3월 20일 노보키에프스크에서 동지 11명과 함께 ‘斷指同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왼쪽 무명지 첫마디를 모두 잘라 그 피로써 ‘대한독립’ 4자를 써서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일제 고관 및 친일파 암살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0467)단지동맹 회원은 金基龍·姜基順·劉致鉉·朴鳳錫·白藥奎·康斗瓚·黃吉秉·金伯春·金春化 등이었다(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資料 6, 331쪽). 이 결사는 일종의 解黨決心式과 같은 것으로 의병투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공동행동보다 개별행동을 지향하는 투쟁방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토의 저격이 大東公報社를 중심으로0468)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資料 7, 205쪽. 한 특공대의 소수 정예대원에 의한 거사였다는 점에서 사실상 의병전쟁의 연장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10년 10월 10일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대동공보사에서 안중근을 비롯한 7명은 한국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 이토가 제정러시아 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 N.)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보도에 대하여 ‘그를’ 포살할 절호의 기회라고 결정하였다. 이때 안중근이 자진하여 실행 책임을 맡았으며 禹德淳도 안중근과 공동 실행할 것을 제의하였다.0469)愼鏞廈, 앞의 글, 338쪽.
金鎬逸,<安重根義士의「동양평화론」>(≪安重根의 義烈과 東洋平和論≫, 安重根義士 義擧 第89周年 紀念 學術심포지엄, 安義士紀念館, 1998), 42쪽.
그리하여 1909년 10월 21일 兪鎭律과 李剛 등의 전송을 받으면서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였다.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대동공보의 하얼빈 지국장인 金衡在와 회동하고 이번 거사에 曺道善을 합류키로 하였다. 이리하여 이들 4인은 거사계획을 상의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0470)愼鏞廈, 위의 글, 345쪽. 따라서 이토의 도착 지역인 하얼빈과 蔡家溝 두 곳에 저격 지점을 설정하였다.

안중근은 기차의 정차역인 채가구에는 우덕순·조도선을 배치하고 하얼빈에는 자신이 직접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 계획은 다음과 같다. 채가구에서 기차가 정지하면 우덕순과 조도선이 기차에 뛰어 올라 이토를 저격하고 이것이 실패하면 종착지인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아침 9시경 이토와 코코프체프는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중요 회담을 마친 뒤 플랫폼으로 나와서 환영나온 하얼빈 주재 각국 외교사절과 인사를 나누고 러시아군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는 사열을 마친 뒤 뒤돌아 서서 다시 귀빈열차 쪽으로 향하였다. 이 때 러시아 의장대 뒷쪽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안중근은 이토가 자기 옆을 지나가자 이를 놓치지 않고 이토의 정면에서 그를 향하여 정확히 권총 3발을 발사하였다. 안중근이 이토를 향하여 발사한 탄환은 이토의 가슴과 복부에 정확하게 명중되어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동양의 평화를 상투적으로 외쳤던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는 그가 침략했던 대한제국의 애국청년 안중근에 의해 총살되었다.0471)이토 사살 사건으로 안중근을 비롯한 총 15명이 기소되었으며 일제는 외국인에 대한 폭압적 영사재판권을 실시하여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에게 사형, 우덕술에게 징역 2년, 조도선·劉東夏에게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하였다(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資料 7, 487∼488쪽). 이러한 재판을 거쳐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31세의 나이로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안중근의 이토 암살은 그 자체로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안중근 의거는 한 개인의 단발 행동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계획적·조직적인 행동이었다. 사살 대상으로 한국 식민지화 정책의 거두였던 이토를 택한 것은 비록 거사가 실패하였을지라도 사건 자체로 인한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에서 결정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안중근이 사살 대상으로 이토를 택한 것은 그가 ‘동양평화0472)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신용하, 앞의 글, 351∼356쪽.
김호일, 앞의 글, 51∼59쪽.
를 해치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제일의 적’이었기 때문이다.0473)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資料 6, 176쪽. 안중근이 제시한 이토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이토 히로부미의 罪狀 15항목>

一.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一.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에 대하여 매우 불리하게 한 일

一. 1907년 12개조 조약을 체결하여 모두 한국에 대하여 군사상 대단히 불리하게 한 일

一.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일

一. 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일

一. 불평등 조약의 체결에 대하여 분기한 한국인 의병 등 양민을 살해한 일

一. 한국의 정치, 기타의 권리를 약탈한 일

一. 한국 학교에서 사용한 좋은 교과서를 폐기처분한 일

一. 한국 인민에게 신문의 구독을 금한 일

一. 화폐개혁과 第一銀行券 발행한 일

一. 3백만원의 국채를 모집하고 한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토지를 수탈하기 위하여 사용한 일

一. 동양평화를 교란시킨 일

一. 한국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보호의 이름을 빌어 한국 정부의 일부 인사와 의사를 통하여 한국에 불리한 시정을 펼친 일

一. 일본 孝明先帝를 살해한 일

一. 한국민이 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황제나 기타 세계 각국에 대하여 한국은 무사하다고 속이고 기만한 일(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資料 6, 3∼4쪽).

한편 안중근에 의한 이토의 암살은 온 세계에 충격과 놀라움을 주었다. 식민지 정책에 몰두하고 있던 열강들은 이토의 죽음에 깊이 동정하고 있는 데 반해,0474)國家報勳處,≪亞洲第一俠客≫3(1997), 275∼276쪽. 중국 북경정부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약소 민족국가는 안중근의 의거를 크게 보도하면서 일본의 팽창정책에 큰 저해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하였다.0475)市川正明, 앞의 책(1979), 196∼200쪽. 이와 같이 안중근의 이토 암살은 당시 이토의 국내외적 인지도 및 일본의 대륙침략정책, 조선의 식민지화 정책의 실체를 국내외에 선전하고, 이 자리를 빌어 전 세계를 향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려는 독립운동가의 민족사적 행위였다. 왜냐하면 안중근은 공판정에서 자신의 행동을 암살자가 아닌 한국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동양평화의 적 이토를 척살한 것이기에 적군의 입장으로 처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안중근이 공판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은 이토 사살이 목적이 아니라 이를 통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야욕을 세계에 알리고 나아가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전쟁임을 제시하고자 함이었다.

<金周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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