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1. 애국계몽단체
  • 4) 대한협회, 기타 학회들
  • (1) 대한협회

(1) 대한협회

대한협회는0639)대한협회에 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이현종,<대한협회의 조직과 활동에 관한 성격>(≪1900년대의 애국계몽운동연구≫, 아세아문화사, 1993).
김항구,<대한협회의 설립과 조직>(≪차문섭교수화갑기념 사학논총≫, 1989).
―――,<한말 대한협회의 자강독립론>(≪교수논총≫7-2, 한국교원대, 1991).
대한자강회가 1907년 8월 강제 해산된 3개월 후인 1907년 11월 10일 권동진·남궁준·여병현·유근·이우영·오세창·윤효정·장지연·정운복·홍필주 등 10인이 취지와 목적 및 강령을 포고한 후, 같은 달 17일 관인구락부에서 제1회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규칙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출함으로써 설립되었다.0640)≪大韓協會會報≫제1호,<본회역사 및 결의안>, 38∼39쪽. 당시는 고종강제퇴위, 정미7조약의 체결, 신문지법과 보안법의 시행, 조선군대의 해산 등 일련의 일제의 주권강탈정책에 의해 합법적 테두리내에서의 계몽운동이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대한협회의 설립은 대한자강회의 설립과 비교할 때 소극적 활동을 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출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와 관련한 일본인 고문 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의 회고담으로 볼 때, 새로 설립되는 단체의 성격과 관련하여 그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일제의 한국강점정책에 협력하고 공헌하겠다고 하는 양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까지 하여,0641)김항구, 앞의 글(1989), 464쪽.
이현종, 앞의 글(1993), 148∼151쪽.
실제 설립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많은 제약을 갖고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협회의 취지를0642)≪大韓協會會報≫제1호,<大韓協會趣旨書>, 1∼2쪽. 보면 이 역시 사회진화론적 시각으로 당시를 인식하여 지금은 생존경쟁의 시대이고 우자승 열자패가 대세라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우리 민족에 대한 자책과 자성으로 연결되어 지금 민족의 현실은 정치가 발전되지 못하고 교육 산업이 뒤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문명과 행복을 이루기 위해 대한협회를 조직하는데, 그 취지는 “정치·교육·산업을 강구하여, 사회지식을 발달케 하고 신진 덕성을 도야하며 전국부력을 증진케 하여, 이로써 참다운 국민적 자격을 양성코자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미7조약의 체결 등으로 상황이 더욱 나빠졌는데도 대한협회의 취지는 대한자강회와 비교해 볼 때 국권회복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 현저히 약화되어 있고,0643)김항구, 앞의 글(1989), 467쪽. 문명, 인민의 행복, 국민의 자격과 같은 새로운 사회에 맞는 인간상에 그 초점이 놓여 있다.

또한 대한협회는 현실극복을 위한 강령으로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생명재산의 보호, 행정제도의 개선, 관민폐습의 교정, 근면 저축의 실행, 권리·의무·책임·복종의 사상 고취 등을 제시하였는데,0644)≪大韓協會會報≫제1호,<本會綱令>, 467쪽. 이 강령 역시 국권회복을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문명화와 개인의 인권, 국민자격의 획득과 같은 것에 치우치고 있다.

대한협회는 외형상 전국적 규모의 단체였던 대한자강회를 계승하고 있기에 외형상의 조직은 대한자강회와 유사하였다. 그리고 제1회 임원을 볼 때도 대한자강회의 임원들과 거의 유사하였다0645)≪大韓協會會報≫제1호,<本會歷史 및 決議案>, 38∼39쪽.. 설립경위의 의문점, 강령의 후퇴 등의 문제점이 있긴 하나 초기의 임원들은 항일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리하여 당시까지는 일제에 대한 협력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08년 6월 남궁억이 회장을 사퇴하고 7월 11일 김가진이 회장으로 선임된 후 대한협회의 회장을 위시하여 부회장(오세창) 등 임원들이 노골적으로 친일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 때부터 대한협회는 임원들과 회원들 사이에 이분화 현상이 나타난다.0646)이현종, 앞의 글(1993), 196쪽. 중앙조직은 평의원 30인, 찬의원 30인, 강령의 구체적 실천을 위한 교육부·실업부·법률부·재무부·지방부 등의 5개 부를 두었고, 간사원·회계·서기·회보발행소장·편집 겸 발행인 등의 기구가 있었으며, 본회 회원수는 1909년 3월까지 56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지방조직으로는 府와 郡에 지회를 설치하고 지회에서 거리가 먼 지역에는 분지회를 설치하였다. 1909년 3월경의 지회와 분지회의 총수는 60여 개로 경기 3개, 경남 6개, 경북 10개, 전남 4개, 전북 12개, 제주 3개, 충북 1개, 충남 2개, 평남 4개, 평북 7개, 함북 2개, 함남 6개, 황해 4개 등이며 회원수는 3,500명 내외였다.0647)김항구, 앞의 글(1989), 473∼474쪽. 중앙의 본회와 지회 분지회와의 관계는 본회가 지회 분지회의 설립 절차에 강한 영향력을 보였는데, 후기로 갈수록 대한협회가 일제와 타협적으로 되면서 본회는 지회의 독자적인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여 정부관헌 및 일제와의 갈등을 줄이고 자신들의 지휘 감독하에 두었다.0648)≪大韓協會會報≫제11호,<各支會에 對한 指明書>, 49∼50쪽. 당시 지회의 회원들은 임원들과는 달리 여전히 항일의식을 갖고 협회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대한협회의 계몽사상은 앞서도 보았듯이,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하여 한국과 한민족의 자책과 자성론으로 연결되고 현실극복을 위한 실력양성론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두드러진 것은 김가진 회장 출범 이후 상당수의 대한협회의 간부들이 제국주의 일본을 우자승의 위치에 있는 강자로 인식하고 그들에 의한 보호와 간섭을 어찌할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이다.0649)김항구, 앞의 글(1991), 126쪽.

대한협회 역시 실력양성을 위한 급무로 교육진흥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애국정신과 실학정신의 고취를 교육의 목표로 설정하였으며,0650)申采浩,<歷史와 愛國心의 關係(속)>(≪大韓協會會報≫제3호), 5쪽. 의무교육의 보급확대, 교육재정의 확충, 교과서의 합리적 개편 등의 방안0651)여병현,<義務敎育의 必要>(≪大韓協會會報≫제2호), 10∼11쪽.
張志淵,<교과서 검정에 관한 충고>(≪大韓協會會報≫제10호), 5∼6쪽.
嵩陽山人,<敎育普及에 對하여 發展의 方法을 先究함>(≪大韓協會會報≫제12호), 11∼14쪽.
을 제시하였다. 또한 식산흥업에 의하여 국부를 증진시키는 것을 자강실현의 급무라고 인식하였다. 특히 상업과 농업을 중시하여 그 성격을 밝히고, 발달방안을 제시하였다.0652)김명준,<殖産論>(≪大韓協會會報≫제1호), 24쪽.
권동진,<實業精神의 如何>(≪大韓協會會報≫제5호), 16∼17쪽.
―――,<상업발달의 요소>(≪大韓協會會報≫제6호), 20∼24쪽.

그리고 대한협회는 정치개혁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전개하였다. 정치개혁을 자강실현의 최급무로 파악하고 국가·정체·정부·정당에 대한 나름대로의 구상을 발표하였다. 먼저 국가론을 보면 국민주권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국가를 이상적인 국가로 생각하는 국민국가론을 전개하였다.0653)金成喜≪정당의 사업은 국민의 책임>(≪大韓協會會報≫제1호), 29∼30쪽.
―――,<論外交上經驗的歷史>(≪大韓協會會報≫제8호), 4쪽.
卞悳淵,<國民과 政治의 關係>(≪大韓協會會報≫제7호), 30쪽.
그리고 국민국가를 실현하는데 합당한 정치체제로는 입헌정체 더 나아가서 민주공화정체를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0654)元泳義,<政體槪論>(≪大韓協會會報≫제3호), 27∼28쪽.
―――,<政治의 進化(續)>(≪大韓協會會報≫제7호, 25∼26쪽, 제10호 28쪽, 제11호 23쪽).
이의 구체적 실천을 위한 정부형태로는 국민여론에 바탕을 둔 국민적 정부 즉 책임 내각을 합당한 것으로 생각하였다.0655)安國善,<정부의 성질>(≪大韓協會會報≫제7호), 28쪽,<정부의 성질(속)>, 제8호, 24쪽.
金成喜,<정당의 사업은 국민적 책임>(≪大韓協會會報≫제1호), 30∼32쪽.
대한협회는 과거의 붕당은 공의보다 사리에 치우치는 편벽된 사당이며 근대의 정당은 정치상 동일한 주의를 가진 자들이 국리복지를 목표로 조직하여 공의를 존중하는 공당이라고 인식하고, 다수 정치의 실현을 위하여 정당의 존재와 정당의 분립이 불가결한 것이라고 인식하였다.0656)安國善,<정당론>(≪大韓協會會報≫제3호), 24쪽.
金成喜,<정당의 사업은 국민적 책임(속)>(≪大韓協會會報≫제2호), 21∼24쪽.
대한협회는 바로 자신이 전국의 사상을 통합한 민성발표의 정당 곧 국민의 소리를 대표하는 정당이며 사실상 국민적 정당이라고 간주하고,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정당인 대한협회가 중심이 되어 국민적 정부의 수립에 의한 국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하였다.0657)金嘉鎭,<개회취지설명>(≪大韓協會會報≫제8호), 54쪽. 대한협회의 활동은 강령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다양한 활동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정치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창립 초기에는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김가진 회장 취임 이후를 보면 통감부의 침략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하지 않고<시국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여 점진적인 개선방안만을 건의하고 있다.0658)李鉉淙, 앞의 글(1993), 160쪽. 그리고 ‘東拓法’에 대한 정부질의 대표파견,0659)≪大韓協會會報≫제6호,<본회역사>, 59∼65쪽. 순종 순회시 송병준의 망동에 대한 공박,0660)≪大韓協會會報≫제8호, 56쪽·제10호, 67쪽·제11호, 47쪽·제12호, 47쪽.
≪大韓每日申報≫, 1909년 2월 11·17·20·26일.
관리의 비행조사0661)≪大韓協會會報≫제10호, 66∼67쪽.
≪大韓每日申報≫, 1909년 2월 10일·3월 12일.
등 국권회복과는 거리가 먼 활동을 하였으며, 심지어 1909년 9월 이후에는 일진회와의 연합설0662)李鉉淙, 앞의 글(1993), 177∼191쪽.에 휘말릴만큼 국권회복운동 단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성과가 컸던 부문은 교육활동으로, 향교의 강당을 학교로 만들어 쓰기도 하고, 학교를 많이 세웠으며,≪대한협회회보≫에 교육 관련 연설문을 싣고 교육부란을 따로이 두고 교육에 대한 글을 실어 교육계몽에 앞장섰다. 또한 회보를 통하여 산업·법률·실업·지지·역사·문예 등 각 분야에 걸쳐 신교육을 소개하고 보급하는데 앞장섰다.0663)≪大韓協會會報≫참조. 그리고 솔선수범하여 회원들의 자제를 학교에 입학시키고, 각 지방 지회에서 수시로 강연을 통하여 교육계몽에 힘썼다.0664)李鉉淙, 앞의 글(1993), 165·169·198쪽.

또한 인권옹호라는 이름으로 법의 테두리에서 관리와 토호들의 탐학을 밝혀 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을 하였다. 즉 세율에 관한 조사와 판정, 재산피탈사건에 대한 조사와 진상규명 등에 앞장섰으며 근대법을 강연하여 주지시키는데 힘썼다.0665)≪大韓協會會報≫제2호, 59∼60쪽.
≪大韓每日申報≫, 1909년 3월 10일.
그리고 伸理硏究所를 설치하여 “토호탐학과 국민의 寃屈을 풀며 행정관의 간섭을 불허하고 재판의 公平堅確을 기하기 위함이라”고 밝히며 누구든지 내외국인에게 박해받은 동포는 그 전말을 알리면 본회 부담으로 최선을 다할 것임을 밝혔다.0666)≪大韓協會會報≫제6호, 59쪽·제7호, 55쪽·제9호, 54쪽.

한편 회보의 발간과 강연을 통하여 대중계몽에 앞장섰는데 교육과 근대법 인권보호에 관한 것 외에 크게 비중을 두고 계몽하였던 것이 여러 가지 사회폐습을 교정하자는 것이었다. 관혼상제에 있어서 절약·복색개량·단발실시·조혼금지·과부개가 등 전통적인 우리 사회에서 고쳐야 할 많은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대한협회가 추구했던 것은 문명화와 법테두리에서의 정치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고, 더욱이 1909년 이후 일부 임원들이 일제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임에 따라 일반회원들과 이분화 현상을 갖게 되고, 일진회와 제휴하려 했던 점은 대한협회의 애국계몽단체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번 생각케 한다. 외형적으로 대한자강회의 후신이었으나 실제 그 역할은 신민회에게 넘겨주고 대한협회는 이분화되어진 이질적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많은 오류를 지닌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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