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2. 애국계몽사상
  • 1) 애국계몽사상의 개념과 형성
  • (1) 애국계몽사상의 개념

(1) 애국계몽사상의 개념

한말의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은 흔히 애국계몽운동이라 불리고 있으며, 그 사상은 애국계몽사상이라 불리고 있다. 그러나 그 운동과 사상의 개념과 용어는 학계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여, 이 운동은 애국계몽운동·계몽운동·구국계몽운동·문화운동·애국문화운동·자강운동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용어의 불일치는 ‘애국계몽’이라는 개념이 역사적 개념으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국계몽운동’이란 용어는 해방 후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孫晉泰는 1949년에 간행된≪國史大要≫에서, 한말의 개화지식인들이, “남의 힘에 의뢰한 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장본이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독립을 싸워 얻어야 하겠다”는 자각에서, 학교·학회·종교단체를 만들어 신학문을 교육하고, 정치사상을 선전하며, 민족정신을 고취하여 완전한 독립을 추구한 운동을 ‘애국적 계몽운동’이라고 하였다.0696)孫晉泰,≪國史大要≫(乙酉文化社, 1949), 138∼139쪽. 이후 한말의 실력양성운동을 ‘애국계몽운동’으로 보는 시각이 보편화되었다.

예컨대 한말 애국계몽사상이란 1905∼1910년 사이에 전개된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어 간 사상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라 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어느 시기에나 있을 수 있는 일반적 개념으로서가 아니고, 한말이라는 일정한 시기에 있었던 운동으로서 ‘역사적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1905년 11월 소위 을사조약에 의하여 국권을 박탈당한 이후, 개화자강파가 중심이 되어 완전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전개한 1905년∼1910년 사이의 민력계발과 민족독립역량 양성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정의하고, 그 운동 내용으로 ①신교육구국운동 ②언론계몽운동 ③민족산업진흥운동 ④국채보상운동 ⑤신문화·신문학운동 ⑥국학운동 ⑦민족종교운동 ⑧해외독립군기지 창건운동 등을 제시하고 있다. 곧 해외독립군기지 건설운동까지를 애국계몽운동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0697)愼鏞廈,<韓末 愛國啓蒙思想과 運動>(≪韓國史學≫1,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 269·272쪽.

한편, 1905년 11월 ‘보호조약’ 이후 신지식층의 개화사상이 애국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이 애국계몽운동은 갑신정변-독립협회운동을 잇는 개화의 제3단계 운동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0698)姜在彦,≪朝鮮の開化思想≫(東京:岩波書店, 1980), 247∼248쪽. 이 견해는, 애국계몽운동의 당면 목표는, 대중계몽과 학교교육을 통하여 民智를 열고, 민족산업의 육성을 통하여 민력을 배양함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었고, 그 궁극적인 목표는, 시기를 포착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동시에 조선왕조의 재건이 아니라 근대적 국민국가의 형성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곧 국민국가 건설운동까지를 애국계몽운동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0699)姜在彦,≪韓國의 近代思想≫(한길사, 1985), 235쪽.

한편, 한말의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은 이미 일제시대에 ‘계몽운동’으로 이해되었다. 黃義敦은 1926년의<光武隆熙時代의 啓蒙運動>이란 글에서, 독립협회의 언론을 통한 민중계몽활동을 ‘조선의 계몽운동의 서광’으로 보았고,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조약 이후의 언론기관과 사회단체의 문화운동·정치운동·사회운동 등을 계몽운동의 眞面目 또는 민중전체의 각성적 운동으로 높이 평가하였다.0700)黃義敦,<光武隆熙時代의 啓蒙運動>(≪新民≫14, 1926).
―――,≪韓國近世史論著集≫1, 舊韓末篇 (太學社, 1982), 322∼326쪽.

최근에도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국민적 역량을 배양하기 위해 전개된 실력양성운동을, 의병전쟁과 함께 구국운동으로 이해하되, 정치운동이 약화된 계몽운동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한말의 망국사태에 대처한 구국운동이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전제하에, 의병운동은 ‘구국의병운동’이라 하고, 계몽운동은 ‘구국계몽운동’이라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견해는,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계몽운동의 사상을 ‘한말계몽주의’ 또는 ‘계몽주의’라고 표현하고 있다.0701)趙東杰,<韓末啓蒙主義의 構造와 獨立運動上의 位置>(≪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運動史硏究≫, 지식산업사, 1989), 97·108쪽.
―――,<獨立運動史硏究의 回顧와 課題>(≪정신문화연구≫25, 1895), 20·22쪽.

한말의 애국계몽운동을 ‘문화운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제 말기에 崔南善은 한말의 실력양성운동이 기본적으로 교화사업·학교설립·학회설립·어문학연구·사학연구·종교활동 등 문화분야의 운동이므로, 이 운동에 ‘문화운동’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0702)崔南善,≪故事通≫(三中堂, 1943), 245∼246쪽.

최근에도 애국계몽운동은 甲申政變·甲午改革·獨立協會運動의 맥을 이은 문명개화론자들이 주체가 되어, 신문·잡지 등의 언론과 학교설립의 교육을 통하여 전개한 문화운동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는, 애국계몽운동자들의 민중에 대한 불신과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로, 그 운동이 개량적 문화운동에 그치고 말았다고 하여, 그 의의를 과소 평가하고 있다.0703)金度亨,≪大韓帝國末期의 國權恢復運動과 그 思想≫(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88), 10·122∼113쪽.

한편 애국계몽운동은 ‘애국문화계몽운동’ 또는 ‘애국문화운동’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건대, 북한에서 간행된≪근대조선역사≫는, 을사조약을 계기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애국문화운동을, 문화분야에서 민족 부르죠아지의 제반 요구를 반영한 반침략·반봉건 운동으로 규정하고, 그 운동은 민족문화를 대중적·근대적 토대 위에서 발전시키는 계기를 열었으나, 일제의 침략과 봉건제도를 혁명적으로 청산하는데 이르지 못했다고 그 한계성을 지적하고 있다0704)이종현,≪근대조선역사≫(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 일송정 복간, 1988), 248∼249·256∼257쪽..

애국계몽운동을 ‘자강운동’에 역점을 두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한말 보호국체제 하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무장투쟁노선의 의병전쟁과 실력양성노선의 자강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자강운동은 교육과 실업을 진흥함으로써 경제적·문화적 실력을 양성하고, 나아가 부국강병을 달성하여 장차 국권회복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운동이었다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이 견해는, 본래 ‘애국계몽운동’이라는 용어는 주로 계몽운동이라는 운동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기업의 식산흥업이나 정치단체의 정치운동을 ‘계몽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하고, 당시 신교육운동·식산흥업운동·계몽운동의 슬로건은 모두 ‘자강’ 곧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이었다는 점을 들어, ‘애국계몽운동’을 ‘자강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주장하고 있다.0705)박찬승,≪한국근대 정치사상사연구≫(역사비평사, 1992), 17∼18쪽.

애국계몽운동은 한말의 망국적 보호국체제 아래서 문화적·경제적·정치적·군사적으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애국계몽운동을 애국적 계몽운동 또는 애국적 문화운동으로 좁은 의미로만 볼 것이 아니고, 목적으로서의 애국운동과 수단으로서의 계몽운동으로, 또는 민중계몽의 방법이 강조된 모든 애국운동으로 확대 해석해 보면, ‘애국계몽운동’이란 용어가 결코 부적절한 용어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한편, 애국계몽운동과 그 사상의 전개 시기에 대하여, 첫째로 18세기 후반 실학파의 북학사상을 ‘조선의 계몽사상의 맹아적 형태’로 보는 시각이 있으며,0706)姜在彦,≪近代朝鮮の變革思想≫(日本評論社, 1973), 208쪽. 둘째로 아관파천 이후 독립협회의 민중계몽활동을 ‘조선의 계몽운동의 曙光’ 곧 계몽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0707)黃義敦, 앞의 글, 322쪽.
김종덕,<한말계몽운동의 계보와 성격>(≪한국의 사회와 문화≫1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173쪽.
셋째로 1904년의 러일전쟁과 1905년의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전개된 구국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계몽운동’의 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0708)趙東杰, 앞의 글(1989), 111쪽. 넷째로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계기로 국권 일부의 상실과 이에 대응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애국계몽운동의 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0709)愼鏞廈, 앞의 글(1980), 269쪽.

애국계몽운동을 한말의 민족운동으로 제한시켜 볼 때,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을 계기로 한반도가 사실상 일본의 준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에서, 국권회복과 국민국가건설을 목표로 하는 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되었으므로,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조약의 시기를 포괄하여 애국계몽운동의 기점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한말 애국계몽운동은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한일합방’ 때까지 전개된 개화지식인들의 국권회복과 국민국가건설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었다는 개념 정의가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애국계몽운동이 국권회복을 위한 정치운동을 등한시했다고 하여, 문화운동 또는 계몽운동으로 범위를 축소시켜 보는 시각이나, 민중에 대한 인식의 결여를 지적하여 그 평가를 절하하여 보는 시각은, 대한제국 말기에 폭넓게 전개된 국권회복과 국민국가건설을 위한 실력양성운동 곧 애국계몽운동의 민족운동사적 의미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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