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2) 교육구국운동
  • (4) 실업·상무교육 실시운동

(4) 실업·상무교육 실시운동

애국계몽가들은 국민 보통교육을 위한 의무교육 실시운동과 함께 국민의 자립생활을 위한 실업교육을 강조하고 국권회복 전쟁에 대비한 상무교육을 중시하였다.

애국계몽가들은 국가의 독립은 자강의 실현에서 가능하고, 자강의 실현은 실업의 발달에서 가능하며, 실업의 발달은 지식 곧 교육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하여 실업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0920)李鍾濬,<敎育論>(≪大韓自强會月報≫제7호), 1∼2쪽. 그들은 실업교육을 통하여 국민의 경제적 자립능력에서 얻어지는 개인적인 독립정신을 국가적인 독립사상으로 승화시켜 국가독립의 기초를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921)呂炳鉉,<殖産部論說>(≪大韓自强會月報≫제2호), 15∼16쪽. 나아가 그들은 실업교육을 통하여 각종 산업에 대한 연구와 기술개발을 통하여 國家富源을 증식하여 자강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922)張志淵,<殖産興業의 必要>(≪大韓自强會月報≫제1호), 32∼33쪽. 곧 애국계몽가들이 의도하는 실업교육은 국민 개개인의 경제적인 자립과 향상을 꾀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주독립사상을 배양하여 국가의 독립과 부강을 도모하려는 교육이었다.

애국계몽단체들은 산업진흥을 위한 계몽활동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업부를 조직하고, 農業·工業·商業學校를 설립하여 실업교육을 실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0923)≪大韓每日申報≫, 1909년 9월 2일, 논설<西北學校內 農林講習所 發起>·12월 18일, 논설<商業上 知識의 必要>·1908년 6월 7일, 寄書<工業을 宜獎勵>.

예컨대 서북학교는 농림업의 발달로 경제적 도탄에 빠진 인민의 생활을 개선하고자 농림강습소를 설치하여 농업교육을 실시하였다.0924)≪大韓每日申報≫, 1909년 9월 2일, 논설<西北學校內 農林講習所 發起>. 대한자강회 회장 윤치호가 경영한 韓英書院은 과수·채소·원예·목축·목공·철공·피혁·직조·사진술 등의 과목을 개설하고, 농장과 공장을 갖추어 이론과 실습을 통하여 철저한 실업교육·직업교육을 실시하였다.0925)金永羲,≪佐翁尹致昊先生略傳≫(基督敎朝鮮監理會總理院, 1934), 198·209쪽.
尹致昊,<風雨二十年-韓末政客의 回顧談>(≪東亞日報≫, 1930년 1월 15일).
평양의 숭실학교는 교내에 목공부·인쇄부·鑄物部·철공부를 갖춘 공장 곧 崇實學校機械廠(Industrial Department)을 설치하여, 학생들이 자력으로 학비를 조달하게 하고, 졸업 후 유용한 사회인이 되도록 철저한 기술교육을 실시하였다.0926)Pyeng Yang Union Christian College, 1910, pp. 12∼13 "Student Help".
Catalogue of the Union Christian College and Academy, June 1913, Pyeng Yang, p. 13 "Self-help for Presbyterian Students".
이러한 실업교육·직업교육의 실시는 한국인 개개인의 근로정신의 고취와 경제적 자립능력을 배양하여 국가적인 독립사상으로 승화시키려는 것이었다.

한편 애국계몽가들은 실업교육을 통한 국력의 배양에 못지 않게 독립전쟁에 대비한 상무교육의 실시를 강조하였다. 애국계몽가들이 상무교육을 강조한 이유는, 우리 나라의 국권 상실의 중요한 원인이 文을 숭상하고 武를 천시하여 국력이 쇠약해진 까닭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文武의 균형적 육성이 천하의 두 개의 대업”이라 하고, 국가 권력을 회복하고 민족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스파르타식 상무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0927)朴殷植,<文弱之弊는 必喪其國>(≪西友≫제10호), 1∼6쪽. 또한 그들은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상무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며, 상무교육이 아니고서는 결코 국가정신·민족주의·문명주의를 유지하고 발휘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0928)≪大韓每日申報≫, 1910년 2월 27일·3월 3일, 논설<二十世紀 新國民>.

애국계몽가들은 당시 한국인의 군사교육은 현실적으로 각종 학교에서 체육교육을 통하여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0929)≪大韓每日申報≫, 1908년 9월 22일, 논설<敎育勃興의 兆>. 그리고 그들은 군사교육 곧 상무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일차적인 방안은 “국민 일반의 체육을 발달시켜 국민으로 하여금 씩씩하고 활발한 기품을 갖도록 함에 있다”고 주장하였다.0930)≪大韓每日申報≫, 1908년 4월 10일, 논설<尙武敎育의 必要>. 애국계몽운동 당시 초기의 체육교육은 체조가 중심을 이루었다. 당시 학교체조는 주로 육군사관이 지도하는 군대식 兵式體操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부족한 체육교사와 체조의 보급을 위하여 각 학교 교사와 교원을 상대로 체조강습회도 개최되어 체육교육이 활성화되었다.0931)邊勝雄, 앞의 글, 96쪽.

이러한 군사적 실력양성을 염두에 둔 학교체육은 운동회의 개최로 더욱 확산되었고, 각급 학교의 운동회는 연합운동회로 발전하였다. 운동회에서 행해졌던 接戰競技는 砲兵隊·步兵隊·衛生隊·決死隊로 나누어 공격과 방어 등 실전과 같은 군사훈련을 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체력증진이라는 목적 외에 국권회복을 위한 미래의 실전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다.0932)≪皇城新聞≫, 1908년 6월 9일, 잡보<分校運動盛況>. 애국계몽가들의 상무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계몽으로 大韓體育俱樂部 등 민간 체육단체들이 발족되어, 상무적인 체육활동이 학교교육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일반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갔다.0933)邊勝雄, 앞의 글,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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