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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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3) 경제구국운동
  • (1) 황무지개간권 반대운동

(1) 황무지개간권 반대운동

일본은 1904년 6월 나가모리(長森藤吉郞)를 통하여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한국의 막대한 山林·川澤 등의 개간권을 넘겨받아 사실상 한국의 토지를 약탈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1904년 7월 전 중추원 의관 宋秀萬·沈相震 등이 서울에서 輔安會를 조직하여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반대운동을 벌였다.

일본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는 일제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지화 계획 수행의 일환이었다. 일제는 러일전쟁 도발 직후 韓日議政書를 강제로 체결하고, 새로운 對韓方針을 강구하여 한국에 대한 정치·군사적 간섭체제를 갖추고, 경제적으로는 식민지 경영을 위한 이권 획득을 급선무로 삼았다. 이러한 일본의 계획을 실천하려는 것이 ‘對韓施設綱領’이었다. 그 중 ‘拓殖’ 문제에 관한 내용의 골자는, 한국을 일본의 식량과 원료 공급지 및 상품 시장으로 만드는 한편, 일본 안의 과잉 인구를 해소하기 위하여 한국 전역에 일본인들을 이주시킨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런 목적으로 1904년 6월 한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황무지개간권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국가소유 황무지에서는 일본인이 경작 및 축산의 특허 혹은 위탁을 받아 경영하고, 민유지에서는 외국인 토지소유 제한규정을 완화하여 일본인의 토지소유를 인정받게 하려는 것이었다.0936)≪日本外交文書≫37권 1책, 對韓方針竝ニ對韓施設綱領決定ノ件, 351∼356쪽. 일본이 한국 정부에 제시한 황무지개간권의 내용은 한국의 토지개간권, 토지의 이용수익권을 50년 기한으로 일본인에게 위임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개간권은 한국 전체 황무지의 개간·정리·척식 등 일체의 경영을 통해 얻어지는 광범위한 수익권을 담고 있었다.0937)尹炳奭,<日本人의 荒蕪地開拓權 要求에 대하여>(≪歷史學報≫22, 1964), 42∼44쪽.

사실상 일본이 대한제국 전국토의 30%에 해당되는 황무지를 무상으로 강탈하려는 요구에 대하여 전국적인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일본의 황무지개간권에 관한 계약을 둘러싼 한일 양국 정부의 논의가 분분할 때, 유생 21명이 전국 13도에 排日通文을 돌린 것을 계기로 황무지개간권 반대운동이 촉발되었다.0938)尹炳奭, 위의 글, 49∼52쪽. 일제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대하여 관인과 유생들의 상소에 의한 초기의 반대운동은, 일본의 요구가 강압화함에 따라 輔國安民을 표방한 보안회 중심의 구국민중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보안회는 연일 서울 종로의 白木廛 都家에서 집회를 열고, 일본의 山林·川澤·原野·荒蕪地 개간권 요구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연설을 하며, 일본과의 교섭을 담당했던 외부대신 李夏榮을 성토하였다.0939)≪皇城新聞≫, 1904년 7월 15일, 잡보<宋氏演說>. 보안회의 황무지개간권 반대투쟁은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했기 때문에 신분 계급을 초월하여 거족적인 구국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보안회는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대한 성토대회와 선언문 발표 외에도, 각국 공사관에 서한을 발송하여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외교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0940)≪皇城新聞≫, 1904년 7월 23일, 잡보<會長說明>·<函訴各館>. 보안회의 민중을 동원한 조직적인 황무지개척권 반대투쟁은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반대운동에서 전민중적 반일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일제는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대한 거족적인 반일운동을 강경한 방법으로 진압하였다. 일제는 1904년 7월 20일 서울 내외에 군사경찰제를 실시하고, 헌병대장에게 ‘군사경찰시행에 관한 실시사항’이란 훈령을 내려, 소위 치안에 방해가 되는 집회를 금지시키고, 황무지개간권에 반대하는 신문의 발행을 정지했으며, 반대운동을 주도한 보안회 간부들을 체포 구금하는 등 군사경찰에 의한 탄압을 강화하였다.0941)≪皇城新聞≫, 1904년 7월 23일, 잡보<日兵捕縛會員>·7월 25일, 잡보<押人散會>. 결국 보안회 중심의 거족적인 황무지개간권 반대운동에 직면하여, 정부는 “전국의 국토를 尺寸이라도 절대로 외국인에게 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3천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항의집회의 해산을 종용하자, 보안회는 집회투쟁을 보류하였다.0942)≪皇城新聞≫, 1904년 7월 25일, 잡보<政府告示>·7월 28일, 잡보<諭禁撤市>.

보안회는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철회의 약속을 받고 해산하였지만, 보안회 都總務였던 李儁을 중심으로 大韓協同會(1904. 9)가 결성되어 일본의 황무지에 대한 야욕을 확실하게 분쇄하고자 하였다. 대한협동회는 결성 초기에는 회장 이상설, 부회장 이준, 총무 정운복, 평의장 이상재, 서무부장 이동휘, 편집부장 이승만, 지방부장 양기탁, 재무부장 허위 등의 조직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 후 대한협동회는 이준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일제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협조적이었던 궁내부대신 閔丙奭과 외부대신 李夏榮의 탄핵을 계획했으며,0943)申惠暻, 앞의 글, 160쪽. 일제의 토지침탈 획책 등을 성토하며 반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격렬한 반일투쟁의 결과 대한제국 정부가 마침내 ‘長森荒蕪付許可文券’을 돌려받고 일제의 황무지 침탈야욕을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0944)柳子厚,≪李儁先生傳≫(東方文化社, 1947), 103∼107쪽.

결국 보안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일제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대한 반대운동은 정부 대신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을 망라한 구국민족운동으로 발전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좌절시켰으며, 이것은 근대적 민중운동의 효시인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운동과 비견되는 전민족적 반침략운동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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