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4) 정치구국운동
  • (3) 한일합방 반대운동

(3) 한일합방 반대운동

1909년에 들어 軍部 주도하의 일본 정부는 한국병합에 대한 적극정책을 추구하여, 6월에는 對韓 온건파인 통감 이토를 퇴진시키고, 7월에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병합을 단행할 것”과 “병합의 시기가 도래하기까지는 병합방침에 基하여 충분히 보호의 실권을 거두고 힘써 실력부식을 도모할 것”을 골자로 하는 한국병합 방침을 확정하였다.1011)國史編纂委員會,≪高宗時代史≫6, 855∼857쪽. 일제는 한국병합을 실현키 위한 정지 작업으로 9월과 10월에 걸쳐 소위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을 벌여 잔인하게 항일의병운동을 진압하고, 한편으로는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한국의 유력한 정치세력을 규합하여 한일합방의 여론을 조성시키려고 하였다.

1909년 8월부터 태동된 일진회·대한협회·서북학회의 3파 제휴론은 대한 온건파인 통감 이토가 퇴진한 뒤, 일진회의 李容九와 宋秉畯이 한일합방을 추진하기 위하여, 먼저 국내의 유력한 정치 사회단체를 규합하려는 데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력한 정치 사회단체로는 대한협회·서북학회·일진회의 3개 단체를 꼽을 수 있었다. 대한협회와 서북학회는 평소에 배일주의를 표방하여 친일적인 일진회와는 전혀 입장을 달리했으나, 당시 이완용 내각의 횡포에 대해서는 다같이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일진회의 이용구 등은 그 일치점을 이용하여 3파 제휴를 실현하여 한일합방운동에 이용함으로써 합방정국을 주도하려 했던 것이다.1012)李鉉淙,<大韓協會에 關한 硏究>(≪亞細亞硏究≫8-3,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0), 39∼40쪽. 그런데 서북학회가 응하지 않게 되어 일진회와 대한협회의 제휴가 모색되었다.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국민적 정당을 자부하며 정권 장악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대한협회는 1908년 8월 ‘東洋拓殖株式會社法’에 대한 정부의 승인을 계기로 이완용 내각 반대운동을 전개하여 이완용 내각의 퇴진을 요구하는 단계에까지 갔다. 이러한 현상은 1909년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대한협회는 정권을 담당하고 있던 총리대신 이완용뿐만 아니라, 합방론을 주장하는 일진회의 대표 송병준도 신랄히 비판하였다.1013)柳永烈·朴哲河,<大韓協會의 政黨論과 政治活動>(≪崇實大學校論文集-人文科學篇≫25, 숭실대 인문과학연구소, 1995), 404∼405쪽. 대한협회가 평소 賣國黨이라고 매도하던 일진회와 제휴하려는 주된 목적은 일진회와 제휴하여 이완용 내각을 퇴진시키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1014)李鉉淙, 앞의 글(1970), 28쪽. 그러나 대한협회의 실력자 尹孝定은 일진회와의 제휴가 ‘聯合’이 아니고 ‘連結’임을 강조하고, 兩會 연결의 본의는 ①국민생활 곤란의 구제, ②거국일치한 여론의 확장, ③國情을 온건히 하여 현상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고 밝혔다.1015)尹孝定,≪大韓民報≫, 1909년 10월 26일,<兩會聯結의 主旨>.
≪大韓民報≫, 1909년 11월 30일, 대한협회에서 작성한<聲明草案>.
곧 애국계몽단체인 대한협회가 친일단체인 일진회와 제휴하고자 한 것은 우선 보호정치의 현상을 유지하여 일진회의 합방노선을 견제하고, 일진회와 제휴하여 이완용 내각을 퇴진시키고 국정을 장악하고자 하는 정치운동의 한 방책이었던 것이다.

1909년 9월초에 시작되어 ‘國民團結’과 ‘國利民福’을 내세운 대한협회와 일진회의 연결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10월 26일 安重根 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피살되어 일제의 한국병합정책은 급진전되었다. 일진회는 정세의 변화를 감지하고 대한협회와 공동으로 한일합방 성명서를 발표하려고 했으나, 대한협회가 거부함에 따라 12월 4일 단독으로 한일합방 성명서를 발표하고, 3차에 걸처 한일합방 상소를 올리는 한편, 정부와 통감에게 한일합방 청원서를 제출하였다.1016)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1, 460∼473쪽. 일진회의 매국적 합방성명은 전국민의 분노를 일으켜, 일진회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상소와 연설 및 격문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쏟아져 나왔다.

대한협회는 12월 4일 일진회와의 분립을 선언하고 일진회의 합방성명을 반대 성토하였다.1017)≪大韓民報≫, 1909년 12월 5일, 휘보<大韓一進分立>. 12월 5일에 대한협회·漢城府民會·國是遊說團·흥사단 등 정치·사회 단체의 회원들은 원각사에서 臨時國民大演說會를 개최하여, 일진회의 매국행위를 성토하였다. 한편 대한협회는 각 단체 연합하의 합방반대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1018)黃玹,≪梅泉野錄≫6, 융희 3년 12월, 516쪽.
≪大韓民報≫, 1909년 12월 7일, 휘보<韓會發起>.
國史編纂委員會,≪高宗時代史≫6, 921쪽.
그러나 12월 12일 한성부민회에서 열기로 예정된 각 단체 연합의 국민대회는 警視廳의 집회금지령에 따라 원천 봉쇄되고 말았다.1019)≪大韓民報≫, 1909년 12월 11일, 휘보<國民大會停止>·12월 12일, 광고. 이에 대한협회는 기관지인≪대한민보≫를 통하여 일진회를 성토하고, 일진회의 합방성명에 관망적 태도를 취하는 이완용 내각를 비판하는 등 합방반대 감정을 고무하였다.

일진회의 합방상소에 접하여 애국계몽언론인≪대한매일신보≫는 “일진회가 이미 일본인이 되었다”고 규정했으며, 12월 8일자 논설<再告 韓國同胞>에서는 매국적 일진회의 죄악사를 폭로 규탄하고 동포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다.1020)趙恒來,<舊韓末 社會團體의 救國運動>(≪省谷論叢≫7, 성곡학술문화재단, 1976), 566쪽.
朴成壽,<愛國啓蒙團體의 合邦反對運動>(≪崇義論叢≫5, 숭의여자전문대학, 1981), 61쪽.
천도교는 교도들에게 일진회 반대 성명문을 배포하여 일진회의 망동을 규탄했고, 기독교인 裵東鉉 등은 ‘일진회 성토문’에서 한일합방은 “政合邦이오 合倂이 아니라”는 기만적인 일진회의 성명서를 성토했으며, 구세군에서도 전도회를 통하여 노예적 합방을 반대하였다. 한성부민회는 내각에 보낸 건의서를 통하여 일진회의 해산과 국민신보사의 폐쇄를 주장하였다.1021)趙恒來, 위의 글, 569∼570쪽. 유학생들로 조직된 大韓興學會에서도 대표 2명을 귀국시켜 일진회의 합방성명서 발표에 대한 성토문을 반포하였다가 경시청에 체포되기도 하였다.1022)≪大韓民報≫, 1909년 12월 15일, 휘보<警廳招問>.

일진회의 합방성명에 대한 반대운동은 전국 각 지방으로 번졌다. 12월 8일 평양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모여 일진회의 매국행위를 성토했고, 대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대한협회 평양지회와 서북학회 평양지회도 합방반대를 결의하였다. 14일 평북 선천에서는 2천여 군민이 군의 客舍 앞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고 일진회 박멸을 결의했으며, 16일 평북 철산에서는 대한협회 회원들이 시장에서 성토대회를 열고 일진회의 즉시 해산을 요구하는 電文을 정부에 발송하였다. 17일 황해도 해주에서는 대한협회 회원과 변호사·학교 교사들이 합방반대 국민대회를 계획했는데, 190명이 서명한 대회선언문은 “國賊 일진회를 규탄하고 전국에 성토의 義聲을 공포한다”고 하였다.1023)趙恒來, 앞의 글, 572∼573쪽. 1910년 1월 3일 평북 영변에서는 장날을 이용하여 합방반대 국민대회를 열었다. 경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400여 명의 읍민이 보통학교 교정에 모여 일진회의 합방상소를 규탄하고 이용구의 죄목을 나열하였다. 일진회의 매국행위와 합방에 반대하는 성토는 1910년 봄까지 지속되었다.1024)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2, 491∼492쪽.

결국 애국계몽단체들과 온 국민의 강력한 저항으로 일진회의 합방책동은 한동안 무산되었다. 한말에 많은 단체들이 등장하여 사회의 개명진보와 국가민족의 안녕을 주장하며 활동하였다. 비슷한 구호를 주장하는 애국계몽단체와 친일매국단체를 구분하기에 모호한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상식적이고 명확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대한협회처럼 자강독립의 노선를 걸은 단체는 애국계몽단체로 분류되고, 일진회처럼 한일합방의 노선을 걸은 단체는 친일매국단체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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