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 6)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 (3) 독립운동기지의 건설

(3) 독립운동기지의 건설

애국계몽가들에 의하여 국외 독립운동기지가 가장 먼저 착수된 곳은 북간도였다. 1906년 8월 이상설·이동녕·鄭淳萬·呂準·朴楨瑞 등 애국계몽인사들은 북간도의 중심지 연길현 용정촌에 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서전서숙은 甲班(20명)·乙班(20명)·丙班(34명) 3개 반을 운영했으며, 여기에서 근대교육과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여 일종의 독립운동자 양성소라고 할만 했다. 그러나 서전서숙은 1907년 이상설이 헤이그밀사로 떠나면서 재정난을 겪게 되고, 일제의 탄압을 당하여 1908년 가을에 폐숙하고 말았다.1079)尹炳奭,<1910年代 西北間島 韓人團體의 민족운동>(≪國外韓人社會와 民族運動≫, 一潮閣, 1990), 14∼16쪽.

서전서숙 폐숙 후 金躍淵은 박정서·여준 등 서전서숙 관계자들과 합력하여 용정촌에서 40여 리 떨어진 화룡현 장재촌에 明東書塾을 설립하였다. 이때 신민회는 이동녕과 이동휘를 고문, 鄭載冕을 단장으로 하고, 기독교 전도사와 의사 및 재무담당자를 포함하는 북간도교육단을 파견하였다. 평양 숭실학교 출신으로 보광학교 교사였던 정재면은 명동서숙을 明東學校로 개칭하고, 교육이념을 독립정신에 두는 근대학교, 기독교학교로 개편했으며, 明東敎會를 설립하여 선교활동도 벌였다. 명동학교는 문무쌍전의 철저한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여 이 지역 민족교육의 본산이 되었다.1080)尹炳奭,<滿洲와 沿海洲의 韓人社會와 抗日結社, 民族敎育>(≪獨立軍史≫, 지식산업사, 1990), 65∼68쪽.

명동학교의 기반이 잡히게 된 뒤, 김약연·정재면 등 명동학교 관련 민족운동자들은 북간도 한인사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할 자치기구로 ‘墾民自治會’를 조직하였다. 간민자치회는 일본측의 한인 자치활동을 방해하려는 책동 때문에 ‘墾民敎育會’(1909)로 개칭되었다. 간민교육회는 연변 局子街(연길)에 본부를 두고, 북간도 전역에 지회와 다수의 학교를 세웠으며, 모범촌운동, 문맹퇴치운동, 생산·판매·소비조합운동을 벌여 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하였다.1081)尹炳奭, 위의 글, 69∼70쪽.

1909년부터 민족운동자들은 북만주 소만국경 지대 密山府 경영에 착수하였다. 이상설·金學萬·정순만·李承熙 등은 이곳의 황무지를 사들여 韓興洞을 세우고 한민학교를 설립했으며,1082)尹炳奭, 앞의 글(1990), 16∼17쪽. 1910년대 초에 李甲 등 신민회 회원들은 밀산현 蜂密山子에 密山武官學校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또한 1912년에 신민회 간부 이종호 등은 王淸縣 羅子溝에 大興學校를 설립했고, 1913년에 이동휘·이종호·장기영 등은 이곳에 東林武官學校(大甸學校)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1083)愼鏞廈, 앞의 글(1985), 119∼121쪽.

‘한일합방’ 직후 서간도에서도 독립군기지가 건설되었다. 1911년 이동녕·이회영 등 신민회 간부들은 봉천성 柳河縣 삼원보에 新韓民村을 건설하고, 자치기구로서 耕學社를 조직했으며, 근대교육과 군사교육의 실시를 위한 신흥강습소(뒷날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에 흉작과 水土病 때문에 그들은 통화현 合泥河로 독립운동 근거지를 옮기고, 경학사를 강화하여 扶民團을 조직했으며, 신흥강습소를 新興學校로 개칭하였다. 신흥학교에는 4년제 중학과정의 본과가 있었고, 6개월 과정의 장교반과 3개월 과정의 하사관반이 있었다. 또한 신흥학교 교직원과 졸업생 중심의 독립운동단체인 新興學友團이 조직되어 있었다.1084)愼鏞廈, 위의 글, 113∼117쪽.
元義常, 앞의 글, 238·240∼241쪽.

1914년에 부민단과 신흥학우단은 신흥학교에서 양성한 독립군 385명을 근간으로 하여 ‘白西農莊’을 건설하였다. 백서농장은 백두산 서쪽 산기슭 사방 200리의 고원지대 평야에 건설한 兵農一致의 독립군 군영이었다. 金東三을 莊主로 하는 백서농장은 莊主·訓讀·총무·醫監·경리·需品·외무·農監·교관·교도대장·1중대장·2중대장·3중대장·규율대장 그리고 각 小隊의 부서가 있었다. 백서농장은 3·1운동 당시까지 수천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다고 한다.1085)尹炳奭,<白西農莊과 大韓光復軍政府>(≪獨立軍史≫), 94∼96쪽.
박 환, 앞의 책, 341쪽.

한편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露領 연해주에서도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이 전개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미 1905년에 한인사회의 공동이익을 목적으로 韓民會가 설립되었고, 1907년에는 대한청년학우회가 설립되었다. ‘합방’ 직전에 유인석·이범윤·홍범도를 중심으로 편성된 13道義軍은 연해주에 망명정부의 수립을 고종에게 상소한 바 있었으며, 의병계열과 애국계몽계열의 인사들을 망라하여 이루어진 聲明會는 각국 정부에 ‘한일합방’의 무효를 선언하고 청년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거류지를 습격하기도 하였다.1086)尹炳奭,<獨立軍基地와 聲明會 宣言書의 意義>(≪獨立軍史≫), 50∼51·60∼61쪽.

1911년 의병계열과 애국계몽계열의 연합으로 조직된 勸業會는 연해주 지역의 민족운동을 조직하고 지휘하였다. 권업회는 한인들의 교육과 실업을 장려하는 한편, 한인들의 이주 개간을 표방하고 러시아 총독과 교섭하여 흑룡강·송화강 합류지점에 光復軍 軍營地를 확보했으며, 권업회 중심의 민족운동자들은 1914년에 이상설을 정통령,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하는 大韓光復軍 政府를 세워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1087)尹炳奭,<1910年代 沿海洲地方에서의 韓國獨立運動>(≪國外 韓人社會와 民族運動≫), 199∼211쪽.

요컨대 신민회의 독립전쟁론은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운동을 발전적으로 종합한 전략으로서, ‘합방’ 이후 여러 민족운동세력의 기본적인 독립운동전략이 되었다. 그리고 ‘합방’을 전후하여 애국계몽가들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이 북간도·서간도·연해주 지역에 한인 마을과 한인 자치단체를 만들어 한인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무수한 학교 특히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자와 독립군을 양성함으로써, 3·1운동 이후 대규모 독립군부대에 의한 항일무장투쟁의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다.

<柳永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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