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1. 갑오·을미의병
  • 3) 을미의병의 전개
  • (2) 단발령 공포와 을미의병의 확대

가. 경기·강원지역

을미사변으로 유성·강계 등지에서 의병봉기가 일어나고, 전국 각지에서 봉기계획이 진행되고 있을 때인 1895년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 김홍집 내각은 단발령 공포를 강행하였다. 고종의 강제 단발소식과 관리들의 단발 강요 및 행패는 유생들로 하여금 의병봉기의 불을 붙이기에 충분하였다. 단발령 공포 후 전기의병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이천·춘천·제천·홍주·강릉·안동·진주·장성·나주 등 남한지역을 중심으로 봉기한 특성이 있다.

이천의병은 단발령 공포 다음날인 1895년 11월 16일 봉기하였다.1137)柳漢喆,<金河洛義陣의 義兵活動>(≪한국독립운동사연구≫3, 1989). 서울에 있던 金河洛·具然英·申龍熙·金泰元·趙性學 등 젊은 유생들이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이천 화포군 도영장 方春植을 영입하고 포군 100여 명을 포섭하여 이천의병을 결성한 것이다. 주도자인 김하락은 우선 이천의 梨峴에 진영을 설치하고 구연영을 양근과 지평 방면에, 조성학을 광주 방면에, 김태원을 안성 방면에, 신용희를 음죽 방면에 파견하여 의병을 소모케 하였다. 이들은 閔承天의 안성의병과도 연합하여 민승천을 창의대장으로 삼고 김하락은 도지휘, 조성학은 도총, 신용희는 우군장, 구연영은 중군장, 김태원은 선봉장을 맡아 항일투쟁에 돌입하였다. 이천의병은 1896년 1월 17일 이천의 백현에서 일본군과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광주군수를 처단한 광주의병과 前司果 沈相禧가 조직한 여주의병이 합세해 와 이들과 함께 2월 28일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서울 진공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천의병이 남한산성을 점령하자 정부에서는 참령 張基濂에게 1개 혼성대대의 병력을 주어 이를 공격하게 하였다. 장기렴부대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20여 일 공격해 왔으나 의병의 반격으로 격퇴당하였다. 그러나 후군장 朴周英과 좌군장 金龜元이 관군의 꾐에 빠져 3월 22일 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김하락 등은 박주영 3부자를 처단한 후 산성을 탈출하여 이후 안동·의성·경주 등지로 이진하면서 의병활동을 계속하였으나, 김하락은 영덕에서 신돌석부대와 합세하여 항쟁하던 중 전사하였다. 심상희는 선봉장 김태원과 함께 제천의진에 합류하였다.

춘천의병은 강원도 관찰부 소재지인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을 말한다. 이 지역은 이항로의 학통을 이은 柳重敎·柳弘錫·李昭應 등 척사론자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어 의병봉기의 분위기는 성숙되어 있었다. 춘천의병은 1896년 1월 춘천유생 鄭寅會가 군인 成益煥과 상인 朴玄成을 포섭하고 포군 400여 명과 함께 춘천관찰부를 습격,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1138)오영섭,<춘천지역의 을미의병운동>(≪북한강유역의 유학사상≫,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8). 이들은 단발한 박초관을 처형하고 전 유수인 탐관오리 閔斗鎬의 생사당을 파괴한 후 봉의산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어서 인근의 농민과 보부상의 의진 참여로 의진이 확대되었으며 1월 20일 당시 명망이 높던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춘천의병은 신임관찰사 겸 선유사인 曺寅承을 가평에서 체포하여 처단하고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가평 벌업산에서의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대장 이소응은 그의 종제 李晉應과 李景應에게 의진을 위임한 뒤 지평을 거쳐 제천의병에 합류하였다. 그 후 이진응은 전사했으며 이경응은 강릉의 민용호부대에 합류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춘천 이외에 강릉을 중심으로 관동의진이 결성되었다. 여주출신의 閔龍鎬는 1월 30일 평창·영월·정선지방의 포수로 의진을 구성하여 강릉부 관할 9군을 총괄한 ‘關東九郡倡義所’를 설치하였다.1139)朴敏泳,<閔龍鎬의 江陵義兵 抗戰에 대한 硏究>(≪한국민족운동사연구≫5, 1991). 민용호는 우선 강릉부의 친일 경무관 高俊錫을 처단하였다. 그 후 관동의병은 삼척·울진 등지에서 병력을 보충하고 일본군 거류지인 원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3월 19일 안변의 仙坪 전투에서 의병은 악천후로 화승총을 발사할 수 없어 강릉으로 퇴각하였다. 민용호는 각 지역의 의병장에게 격문을 보내어 상호 협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영양의 金道鉉이 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합세하였으며, 삼척의 金金憲卿 의병장과 연합하여 葛夜山城 전투를 치렀다. 5월부터 경군과 일본군이 강릉지방에 파견되어 민용호부대를 끈질기게 추격하였다. 9월초 민용호부대는 고원·영흥·정평에서 활약하다가 9월 18일 함흥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에 결국 개마고원을 넘어 만주로 들어가 후일을 기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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