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1. 갑오·을미의병
  • 4) 갑오·을미의병의 사회적 기반과 성격

4) 갑오·을미의병의 사회적 기반과 성격

갑오·을미의병의 참여층은 지휘부와 병사층에 따라 유생과 평민으로 대별되어 나타난다. 지휘부는 주로 관료출신의 양반유생 또는 재지유생들로 구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화서학파·노사학파·정재학파·남당학파 등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이 중심이었다. 화서학파 유생들은 제천의병·춘천의병·진주의병·강릉의병·의주의병 등 가장 활발한 의병세력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재학파에는 안동의병 등 경상북도 지역 의병세력이 이에 포함된다. 기우만 등의 장성의병은 노사학파 인물들에 의해 조직된 대표적인 의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홍주의병은 남당 한원진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자들이 중심이라는 점이 밝혀져 이들을 남당학파라고 명명하고 있다. 홍주의병은 동시에 화서학파의 학문적 영향을 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척사계열의 의병 중 다수는 동학농민전쟁시 동학군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던 것으로 보여 동학농민전쟁과 의병투쟁의 정치사상적인 차이를 실감나게 한다. 그러나 지휘부에는 유생만이 아닌 吏族이나 평민들도 다수(전체의 약 14%) 포함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심지어 나주의병의 경우는 이족 출신이 지휘부의 44%나 차지하고 있으며, 해주의병의 경우는 전원이 포수 출신인 것으로 보아 갑오·을미의병의 지휘부에 평민 출신의 참여율이 예상외로 높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유생이라 할지라도 선대 중에 현직을 역임한 의병장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몰락한 양반층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경제적 기반이 상당히 취약한 편이었으며 이러한 점은 의병 전력의 약화를 초래하게 하였다.

병사층에는 일부의 유생도 포함되었으나 주로 평민층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 포수가 주요 전투력이었으며, 그 밖에 소작농민을 비롯하여 보부상, 해산군인, 소수의 청군과 잠적성이 강한 동학교도가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갑오·을미의병의 지휘부와 병사층간의 상호 관계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즉 전투수행 능력보다는 신분 또는 성분에 대한 차별적인 태도가 지나치게 강조된 측면이 있다. 그 결과 전력의 약화를 초래하였으며 결국은 전투의 패인으로 작용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계급문제가 민족문제보다 우선시 되는 사상적 한계성을 노출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1147)金祥起,<甲午乙未義兵의 參與層과 擧義理念>(≪仁荷史學≫3, 1996).

이와 같이 갑오·을미의병은 尊華攘夷論에 철저한 斥邪的 성격을 띤다 하겠다. 즉 갑오·을미의병의 지휘부를 이룬 인물들은 존화양이론에 입각하여 제국주의세력의 정치경제적 침략에 주자학 질서를 수호하려는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한 바 있으며, 1894년 이후 일제의 무력적 침략에 민족의 생존권 회복을 위한 반침략 의병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갑오·을미의병의 사상적 연원은 홍주의병장 김복한이나 제천의병의 주도 인물들이 宋時烈의 학통을 잇고 있으며 특히 송시열의 존중화론에 입각한 북벌론적 인식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적인 영향으로 갑오·을미의병은 이념적으로 위정척사론에 철저했다. 또한 상원의병·유성의병·강계의병·이천의병 등과 같이 비록 특정한 학파에 속하지는 않더라도 유성의병에서 볼 수 있듯이 존화양이론에 입각한 척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

둘째, 갑오·을미의병의 성격으로 근왕성을 들 수 있다. 안동의병의 격문에서 갑오변란으로 궁궐이 불법 점령당하고 고종이 핍박당한 일을 거의의 이유로 밝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유생을 비롯한 조선인들은 을미사변을 당하자 이를 천고에 있을 수 없는 ‘大變’으로 인식하였으며, 더욱이 시해된 민비를 폐위시키는 조치에 이르러는 죽음으로써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거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갑오·을미의병의 주요 이념에서 ‘主辱臣死’의 정신으로 임금에 충성하고자 하는 근왕적인 성격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왕적 내지는 충군애국적 국가관은 국왕을 전제로 한 국가의 독립, 즉 왕조의 복구에 궁극적인 목표가 있었다 할 것이다.

셋째, 갑오·을미의병의 성격으로 반침략성을 들 수 있다. 의병들은 1894년 갑오변란을 일제의 침략행위로 규정하였다. 청일전쟁 역시 조선의 국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갑오변란은 유인석 등 척사유생들에게 망국적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였다. 관직에 있던 김복한·이설 등 유생들도 경복궁이 일본군에 점령당하는 사태에 접하고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의병봉기를 준비하였다. 1894년 7월 안동에서 시작된 갑오·을미의병이 일본군의 격퇴를 최고의 목표로 삼았음은 물론이다. 의병들의 최종 목표는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경복궁의 탈환이었다. 이에 따라 의병들은 단일부대로 혹은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서울 공격을 시도하였으며, 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아 무력 항쟁을 전개하였다. 제천의병이 수안보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를 수차례 감행하다가 이춘영 등 다수의 의병장들이 희생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넷째, 갑오·을미의병의 성격으로 반개화성을 들 수 있다. 척사유생들은 개화는 곧 중화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인륜을 파괴하여 금수로 만들 뿐 아니라 국가마저 멸망에 이르게 한다고 보았다. 척사유생들은 이와 같은 반개화론, 나아가 개화망국론에 입각하여 중화질서의 회복과 국가의 독립을 위해 거의한 것이다.

이들의 반개화투쟁은 갑오경장 반대투쟁으로 발전되었다. 즉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변복령과 단발령을 반대하였으며 동시에 지방제도 개편과 군사제도 개편 등 행정제도의 개편을 반대하였다.1148)金祥起,<甲午更張과 甲午乙未義兵>(≪國史館論叢≫36, 1992). 이른바 ‘개혁’이란 허울 속에 취해진 갑오경장의 정책들을 ‘倭化’라고 규정, 반대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켜 직접적인 군사활동에 들어가 군수나 관찰사를 처단하면서 그들을 ‘倭郡守’·‘倭觀察’이라 하였음은 의병의 반개화적인 성격을 말해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비유생 의병장의 경우에도 반개화적인 면이 강했다. 예컨대 이족들에 의해 주도된 나주의병의 경우에 거의한 직후 맨 먼저 참서관 안종수를 처단하였다. 안종수는 신사유람단의 隨員으로 일본의 신식 문물을 시찰한 관리로 서양의 근대농법 소개서인≪農政新編≫을 펴내기도 한 개화파 인물이다. 그가 나주에 부임하여 단발을 강요하였으며 이 일로 의병들에게 처단된 것이다.

다섯째, 이와 같은 갑오·을미의병의 척사적 성격은 유생의병의 경우에는 반동학적 성격을 동시에 띠게 하였다. 갑오·을미의병은 지휘부의 정치적 성향을 보면 1894년 동학농민전쟁시 동학농민군들을 진압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인물들이 참여하고 있는 특성을 보여준다. 그 중에 유성의병의 문석봉, 홍주의병의 김복한·안병찬, 나주의병의 정석진, 제천의병의 김백선 등은 관군의 신분으로 또는 유회군을 편성하여 동학군과 직접 무력투쟁을 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유인석을 비롯한 제천의병과 춘천의병의 지휘부, 예안이나 안동·진주·장성·김천의병의 지휘부 역시 비록 동학군과의 무력충돌의 경력은 없었을지라도 위정척사론에 입각하여 반동학적인 태도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들이 지휘한 의진에 동학군의 참여는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갑오·을미의병 중에 비유생 의병부대의 하나인 해주의병은 동학에 참여했던 이들이 주동했으며, 상원의병의 경우에는 해산된 동학군에게 연락을 취해 의병에 참여시킬 정도로 친동학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지역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북한지역 의진의 경우는 갑오·을미의병의 부분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갑오·을미의병은 남한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치열한 반개화·반침략 투쟁을 전개하였다. 갑오·을미의병의 무장투쟁은 위정자와 일제 침략군에게 큰 위협을 주었다. 단발령은 철회되었으며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제의 침략행위에 대한 반대의사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아관파천 직후 김홍집·어윤중 등 개화파 관리들은 처단되었으며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던 개화정책은 비판되어 실효를 보지 못하였다. 또한 갑오·을미의병은 표면적으로 해산되었지만 제천의병의 경우는 끝까지 고종의 해산조칙을 거부하고 만주로 들어가 재기의 항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다수의 의병장들은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의병의 기치를 다시 세우고 전국적으로 민족수호를 위한 항일투쟁을 재개하였다. 따라서 갑오·을미의병은 투쟁의 치열성과 지속성, 그리고 성과면에서 한말 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크다 할 수 있다.

<金祥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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