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2. 을사의병
  • 2) 전국 의병의 활동
  • (1) 경기·강원도

(1) 경기·강원도

경기·강원도 일대는 충북지방과 더불어 을미의병 시기 화서학파를 중심으로 의병세력이 특히 강성하였던 지역이다. 유인석의 제천의병으로 대표되는 이들 의병 성원들은 의진 해산 후 대체로 향리에 은둔해 있으면서 재기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1904∼1905년 일제침략이 가속화되는 시점에 도처에서 재기항전에 나서 전국 의병을 선도하게 되는 것이다.

을사조약이 늑결되기 두달 전인 1905년 8월 중순경에 일어난 원용팔(일명 元容錫) 의병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1151)원용팔 의병은 1980년대까지 을사의병의 선구 내지는 효시로 언급되어 왔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1, 1971, 334쪽;윤병석,<의병의 항일전>,≪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84, 398쪽). 柳重敎(이항로의 高弟)의 문인이었던 원용팔도 을미의병 당시 여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沈相禧 의병, 그리고 제천의병의 중군장을 지내는 등 폭넓은 활동을 한 뒤 잠적해 있던 인물이었다.1152)元容正,<卜隱>(≪昭義新編≫, 國史編纂委員會, 1975), 243쪽.

원용팔은 지방인사 朴受昌 등의 협조하에 동지 8명과 함께 1905년 8월 16일 원주 楓亭에서 거병한 뒤 군사모집에 들어갔다. 酒泉(현 영월군 주천) 일대에서 포군 수십 명을 모은 다음 단양·영춘·영월 등지를 거쳐 9월 3일에는 정선까지 진출하였다. 이 무렵에는 전력이 상당히 강화된 것으로 보여 포군이 2백여 명에 달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1153)≪大韓每日申報≫, 1905년 9월 20일,<義兵漸熾>. 이어 이 부대는 강릉 봉평과 홍천 瑞石 등지를 전전한 다음 원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 동안 한때 1천여 명에 달하던 의진의 군세는 원주진위대장 김구현이 일진회원들을 동원, 의진 와해공작을 펼친 결과 4백여 명으로 격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주 弓谷에서 유숙하던 원용팔 의병은 9월 25일 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와해되었으며, 원용팔도 횡성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이 의병은 활동이 종료되었으며, 서울로 압송된 원용팔은 1906년 3월 45세의 나이로 옥중 순국하였다.1154)權寧培,<舊韓末 元容八의 義兵抗爭>(≪韓國民族運動史硏究≫, 于松趙東杰先生停年紀念論叢 2, 나남출판, 1997), 230∼234쪽 참조.

1905년 9월 원용팔 의병이 해체된 뒤, 동지 정운경이 단양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정운경 역시 을미의병 때 제천의병의 전군장으로 활약하였던 인물로, 원용팔 의병이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李圭錫 등 동지들과 함께 항일구국의 기치를 올렸던 것이다. 이에 영춘·제천·청풍 등지에서 3∼4백명의 의병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운경 의병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원주진위대의 급습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다. 정운경은 영춘에서 체포되고, 의병을 후원하였던 유생 朴世和도 청풍에서 체포됨으로써 항일구국의 꿈은 무산되었던 것이다. 그뒤 정운경은 서울로 압송되어 평리원의 재판을 받고 1906년 10월 황주의 鐵島로 유배당하였다.1155)鄭雲慶,<同遊錄>(≪獨立運動史資料集≫1, 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1971), 575∼576쪽.

원용팔·정운경 의병 해체 후에도 인근 각지에서는 산발적인 의병 항전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다. 강원도 홍천에서는 朴長浩가 서석면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에 들어갔다. 유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한 가평 출신의 박장호는 당시 홍천 笙谷(서석면 소재)에 거주하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양구에서는 崔道煥 의병, 양평·여주에서는 李範疇, 죽산·안성에서는 朴錫汝 의병 등이 지역 산발적 형태로 활동하고 있었다.115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1(1971),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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