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3. 정미의병
  • 1) 군대해산
  • (1) 정미7조약

(1) 정미7조약

1907년 7월에 광무황제(고종)가 강제퇴위당하고(7월 18일) 이어 丁未七條約(7월 24일)이 체결되었고, 8월 1일에는 한국군의 무장해제가 강행되었다. 황제를 퇴위시키고 군사·재정·사법 등 내정권을 탈취하고 한국군을 해산시키기까지 불과 14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제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고 그 수순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정미7조약은 조약문에서 보듯이 입법·행정(2조)·사법(3조)·관리임명(5조) 등 통치권 전반에 걸친 탈취행위였고 2년 전에 강제체결된 을사 5조약을 한층 강화하여 대한제국의 나머지 주권마저 박탈하는 조약이었다.1225)≪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7년, 往電. 그래서≪대한매일신보≫(1907년 7월 27일)는 “한국 독립의 余痕이 去하였다. 이 나라가 비록 이름은 그렇지 않으나 실제로는 일본에 의뢰함을 作하였다”고 하면서, “이제 통감은 이 나라에서 無冕之王이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그러나 정미7조약이 노린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한국군을 해산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 주권의 핵심인 兵權, 즉 군사권을 탈취하려 했던 것이다. 병권 탈취와 피침략국 국왕의 제거는 제국주의 열강이 약소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있어 반드시 거치도록 되어 있는 절차의 하나였다. 일제는 한국민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왕을 살해하기에 앞서 국왕을 퇴위시켰고 병권장악을 위하여 국군해산을 단행하였다. 이 부분은 공개되지 않은 정미조약의 비밀<부수각서>속에 감췄다.<부수각서>제3항에 보면, 군대해산의 방법과 해산군인의 사후처리 문제를 세밀히 규정해 놓고 있다.1226)≪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7년, 日韓協定履行關係 覺書 3項.
1. 육군 1개 대대를 존치하여 皇宮守衛의 任에 當하게 하고 기타는 이를 해산할 것.
2. 軍部를 비롯한 육군에 관계되는 官衙를 全廢할 것.
3. 교육받은 士官은 한국군대에 머물 필요가 있는 자를 제외하고 기타는 일본군대로 부속시켜 실지연습을 시킬 것.
4. 해산한 下士卒 가운데 경찰관의 자격이 있는 자는 이를 경찰관으로 채용하고 기타는 가급적 實業에 종사토록 할 것. 그 방법은 예컨대 ① 間島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사시킬 것 ② 屯田法으로 황무지 개간에 종사시킬 것.

즉<부수각서>에 따르면 한국군 장교는 그대로 유임시킨다. 그러니 안심하고 군대해산에 협조하도록 조처하고 사병들만 해산시킨다고 속이고 있다. 당시의 한국군 장교는 모두 양반 출신이거나 부정부패한 고관집 자제들이었다. 그들을 해산에서 제외한 이유는 사병들의 반항에 장교가 합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군대해산 때 많은 장교들이 사병들을 배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해산 사병들은 멀리 間島 땅으로 보내어 황무지 개간사업에 종사하게 한다는 조항이었다. 당시의 간도 땅은 문자 그대로 황무지로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지금껏 군인으로 봉사해온 사람들을 일시에 死地로 보낸다는 것이었으니 비정한 처사였다.

일제가 한국의 군사권을 박탈하려는 음모는 멀리는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가까이는 1904년 6월에 시작되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한국을 점령한 상태에서 한국 정부에 대해 각종 침략조약을 강요하게 되는데, 그 때 성안된 그들의 소위 ‘對韓方針’ 가운데에는 한국군의 처리방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1904년 6월 14일 사이토(齋藤三郞, 주한일본공사관부무관)가 작성한<한국에 있어서의 군사적 경영요령>에 따르면 당시 7개 연대에 달한 한국군을 대폭 감축시켜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병제개혁이라는 명의와 구실로 한국군대 7개 연대를 대부분 해산시켜 궁중을 호위하고 황제를 안심시킴에 족한 근소한 병력만 남겨두도록 함으로써 오로지 한국이 일본의 무력에 의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오늘의 이 호기를 놓쳐서는 안된다(≪日本公使館記錄≫, 1904년, 外部).

이처럼 한국군대 해산은 1904년 2월에 이미 주한일본공사 사이토가 정부에 강력히 권고한 한국군 감축안이었는데, 결국 겉으로는 병제개혁이라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한국의 군사권을 탈취하여 한국으로 하여금 오로지 일본의 군사력에 의존하도록 만들려고 한 음모였던 것이다.

사이토의 이같은 한국군 감축안은 이듬해인 1905년 4월에 단행된 元帥府 해체로 구체화되었다. 아직 을사 5조약이 체결되기 7개월 전이었다. 이 소위 병제개혁으로 인하여 한국군의 원수부가 해체되었을 뿐 아니라 1만 6천 명의 한국군 병력이 8천 명으로 반감되고 말았다. 원수부도 일제가 만든 기구였고 그것을 부셔 없애는 것도 그들의 소행이었던 것이다.1227)≪魚潭小將回顧錄≫1.

1905년 당시에 8천 명이었던 한국군은 2년 뒤 7천 명으로 줄어들었으며 겨우 궁궐을 지킬 정도의 侍衛隊(2개 연대 약 5천 명)가 서울에 주둔하고 지방의 주요 도시에는 8개 鎭衛大隊(약 2천 명)가 분산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907년의 소위 군대해산은 이미 있으나마나한 한국군에 최후의 일격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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