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 의병전쟁의 발전
  • 1) 서울진공작전의 실패와 근거지문제
  • (4) 서울 진공 실패 후의 분산활동

(4) 서울 진공 실패 후의 분산활동

경기도 양주의 13도 창의대진소에 집결한 의병부대 중에서 가장 유력한 의병장들은 허위를 비롯하여 이강년·민긍호·이은찬 등이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후 그들은 분산해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허위 의병부대는 임진강 유역에 진출해서 朴宗漢·金秀敏 의병장들과 연합하여 경기도에서 황해도 지역으로 활동 범위를 확대시켰다. 일본군측 문헌에도 다음과 같이 허위부대의 활약에 대하여 쓰고 있다.

번번히 통고를 발하여 납세 및 미곡 반출의 정지를 명령하고 군자와 양식의 징발을 위하여 한국인 순사와 헌병보조원에게 협박장을 보내며, 통신선로를 저해시키고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도발이 심했다(朝鮮駐箚軍司令部 編,≪朝鮮暴徒討伐誌≫, 119쪽).

허위 의병대의 핵심 부대는 강화도에서 군대해산에 대항하여 궐기한 池弘允·延基羽가 이끄는 해산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1908년 6월에 허위는 경기도 永平郡의 산중 마을에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서울에 압송되었다. 헌병대 사령관의 심문에 대하여 그는 태연자약하게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사령관:병을 주창한 자는 누구이며 의병대장은 누군가.

허 위:(크게 웃으며) 의병을 주창한 자는 이토(伊藤博文)이고, 대장은 나다. 이토가 우리 나라를 빼앗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토가 아니고 누가 주창하였겠는가(黃玹,≪梅泉野錄≫, 융희 2년).

捨身取義를 결심하고 의병전쟁에 투신한 의병장들의 기골있는 모습의 일단을 우리는 허위에서 볼 수 있다. 그는 같은 해 10월에 처형되었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강원도의 금강산으로부터 인제 부근에서 적들의 포위와 추격을 뚫으면서 충청북도 제천 방면으로 남진한 다음 안동·봉화 등 경상북도 북부의 소백산맥을 주름잡아 맹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미 1896년 1월부터 문경지방에서 의병투쟁에 투신한 맹장으로서 당시는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에 충청북도 제천에서 재기한 후 허위가 체포된 같은 시기인 1908년 6월에 충청북도 청풍에서 전투중에 부상을 당해 체포되었다. 죽기에 앞서 남긴<告訣八域同志>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병신년(1896)으로부터 13년 또다시 의병의 깃발을 들고 재거하여 피를 흘리며 싸우기를 큰 싸움이 30여 회요, 죽인 적의 우두머리가 백여 명이다. 불행히도 금년 6월 4일에 화살이 떨어지고 빠져나갈 길이 막혀 총알에 맞아 체포되었다(國史編纂委員會,≪韓國獨立運動史≫1, 資料編<雲岡李康年告訣八域同志>).

그는 平理院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검사는 한국 사람이었다. 본래의 義禁府가 평리원으로 개명되어 있었다. 검사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고 있다.

이강년:금부가 우리 나라의 官府인데 왜 倭酋가 여기에 있는가.

검 사:나도 또한 한국 사람이지 일본 사람이 아니다.

이강년:과연 한국 사람이라면 어찌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었는가.

(검사가 말이 없으니 다음과 같이 크게 호통을 쳤다)

이강년:내가 받들고 싶은 것은 天顔이요, 보고 싶은 것은 伊藤이다. 어찌 너와 이야기 하겠는가.

검 사:나는 임금의 뜻을 받들고 추지를 임금에게 전한 다음에 그 결정에 따르는 것이다. 公에게 원컨대 실정을 이야기 해주기 바란다.

이강년:나는 너같은 醜類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宋相燾,≪騎驢隨筆≫, 李康年).

이강년은 붓과 종이를 달라고 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거의한 것은 우선 5적과 7적을 치고 이어서 왜적을 몰아내어 위로는 나라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생민을 도탄으로부터 구제하자는 것이었다. 체포된 것이 불행이다(宋相燾,≪騎驢隨筆≫, 李康年).

검사가 5적과 7적은 누군가고 묻자 이강년은 어리석은 백성도 다 아는 일인데 벼슬아치하는 네가 모른다면 개나 돼지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같은 해 10월에 처형되었다.

이강년이 체포된 후 그 의병부대는 중군장 金尙台를 의병장으로 해서 경상북도·강원도·충청북도를 연결하는 일월산과 소백산맥 일대를 근거지로 해서 완강한 투쟁을 계속했다.1261)李康年,≪雲岡先生倡義日錄≫권 2.

처음 중군장 김상태는 이강년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서하였다. 그러나 왜적에게 저지당하여 오랫동안 의병부대에 합류하지 못하다가 이강년이 먼저 잡혀 죽었다. 김상태는 이강년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죽어서 그를 만날 수가 없다고 하고 남은 병졸을 거두어 영남과 호남간을 유격하여 수삼 년에 이르렀다. 마침내 왜적에게 잡혀 대구 일군사령부에 구치되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적을 꾸짖고 굴하지 않다가 밥을 먹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들 源箕에게 유언하기를 이강년의 무덤 곁에 묻어 주면 황천에 가서도 서로 의지하겠다고 하였다.

1907년 8월에 민긍호는 한국군의 해산에 반대하여 원주에서 궐기한 의병장의 한 사람이다. 특히 민긍호 의병부대는 유생들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달라서 무장과 훈련이 잘 된 원주진위대였다.

양주의 창의대진소에 결집한 의병 약 1만 명(실질적으로는 8천 명 전후) 중에서 민긍호·이구재·이은찬이 인솔한 의병수가 6천 명이었으니 이것이 대진소의 주력부대라 하겠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후 민긍호는 양주로부터 적들의 포위 공격을 물리치면서 원주 雉岳山으로 남진했으나, 1906년 2월에 체포되었다. 그 부하들이 한사코 그를 탈환하기 위해 저항하자 일본군은 그를 사살하고 말았다.

1896년 이래 경상북도·강원도·충청북도가 접경하는 이 지역의 산악과 그 주변의 산간마을은 이강년과 민긍호 부대의 근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의병전쟁의 핵심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의병전쟁을 지휘해온 이강년과 민긍호의 체포는 의병전쟁의 전반적인 추세에 결정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인영을 설득해서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하여 원주에서 기병한 것이 앞에서도 언급한 이은찬이다. 이인영이 부친의 삼년상을 입기 위하여 귀향한 후 그는 잔여 부대를 거느리고 경기도 양주와 포천 일대에서 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도 한국인 간첩 朴魯天 등의 유인책에 빠져 서울의 적정을 탐지한다고 1908년 3월에 용산역에 잠입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 문헌도 이은찬의 고결한 인격과 그에 대한 지방민의 협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격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은찬은 강원도 원주군 부흥사면의 유생으로 천성이 영리하고 또 재기가 있어 항상 정의를 표방하여 교묘하게 민심을 모았다. … 또 식량 및 군자금과 같은 것도 직접 영세민에게 요구하지 않고 각 면장이나 동장 등에게 통고하여 일반 사람으로부터 징수시키고, 구입품에 대한 대금지불 같은 것도 일찍이 그 기일을 어긴 적이 없으며, 혹은 군표와 유사한 증표를 발행하여 이를 물자로 바꾸어 후일 반드시 통화와 교환하는 등 힘써 민심수습에 부심했다. 그러기 때문에 완미한 지방민은 이들을 환대하고 토벌대에 대하여 그들의 행동을 감추어 줄 뿐만 아니라 보초가 되어 폭도 소재지의 주위를 경계하고 혹은 밀정이 되어 관헌의 행동을 통고하는 등 음으로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朝鮮駐箚軍司令部 編,≪朝鮮暴徒討伐誌≫, 151∼152쪽).

체포된 그는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검 사:당신은 왜 叛逆했는가.

이은찬:당신들이 우리 나라를 빼앗았으니 우리는 거의하여 나라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어찌 반역이라 할 수 있겠는가.

검 사:당신의 나라는 옛날에는 청국을 섬기다가 지금은 일본을 섬기게 되었다. 당신의 이와 같은 거사가 어찌 불가하다 하지 않겠는가.

이은찬:당신들은 개명인을 자처하고 있지만 狗皮를 입은 자들이다. 우리 나라가 청국을 섬겼다 하더라도 청국은 조금도 우리의 국권과 강토를 침해하지 않았다. 다만 일년에 한 번 修信使를 파견한 데 불과하다. 당신들은 우리 국권을 박탈하고 생령을 살육하고 우리 강토로 하여금 하나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너희들을 어찌 청국에 비길 수 있겠는가(宋相燾,≪騎驢隨筆≫, 李殷瓚).

검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은찬도 결국 1909년 6월에 처형되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07년 12월에 양주 창의대진소에 집결한 가장 유력한 의병장 중에서 1908년에 접어들면서 민긍호는 2월, 이은찬은 3월, 허위와 이강년은 6월에 각각 체포되고 말았다.

서울진공작전은 시위운동으로서는 큰 의의가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종래 의병투쟁을 전개하던 지역을 떠나서 대중적 기반이 없는 지역에 집중한 의병부대들이 입은 타격은 너무나 크다.

이 시기를 고비로 해서 그 후 의병전쟁은 오히려 창의대진소에 결집하지 않은 의병부대에 의하여 지속되었고, 또한 의병장의 계층별 구성에서도 유생출신 의병장들이 크게 후퇴한 대신, 보다 평민적 성격이 농후한 새로운 계층출신 의병장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거기에 1908년 3월의 스티븐스(D. W. Stevens) 저격사건이 起爆劑가 되어 의병전쟁의 새로운 앙양을 가져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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