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3권 국권회복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 의병전쟁의 발전
  • 2) 의병전쟁의 새로운 앙양과 평민 의병장들
  • (2) 평민 의병장들의 활동

(2) 평민 의병장들의 활동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908년에 접어들면서 전국적으로 저명한 허위·이강년·민긍호·이은찬 의병장들이 체포되어 일제 침략에 대한 타협없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 주면서 순국했다.

또한 1908년이 의병전쟁의 전기간을 통하여 최고조를 이루게 된 데는 평민 의병장들의 역할이 크다. 그들에게 별로 당당한 檄文이나 倡義錄 등이 있는 것은 아니나, 역시 그들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申乭石·金秀敏·洪範圖를 들 수 있다.

경상북도와 강원도가 접경하는 日月山이 신돌석 부대의 활동무대이다. 이와 연결하는 지역이 또한 이강년 부대의 활동무대이다. 그러므로 경상북도·강원도·충청북도가 연결하는 이 지역은 한말 의병전쟁의 가장 유력한 핵심 지역의 하나로 되었다.

신돌석도 이강년과 같이 1896년의 乙未義兵에 참가한 역전의 의병장이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자 그는 1906년 3월 3백 명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또 다시 궐기하였다.

재기한 신돌석 부대의 주된 근거지는 일월산을 중심으로 한 영덕·영해·평해지방인데, 이 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누차에 걸친 포위작전이 실패하고 있다. 그때마다 일본군 기록에는 “단지 구축하는 데 그치고 수괴를 놓쳤다”라고 쓰고 있다.

이와 같이 신돌석부대가 일정한 지역을 떠나지 않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 농민들과의 깊은 연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즉 우세한 일본군의 포위에 대해서는 의병들을 농민 속에 분산시키고, 정보망을 통해서 파악한 적의 약한 고리에 의병들을 집중시켜서 기습하는 게릴라전법이다.

누차에 걸친 포위 소탕작전에 실패한 일본군은 신돌석의 부하를 매수하여 암살하는 전술을 썼다. 1908년 11월에 월동을 위하여 부대를 일단 해산하고, 자기도 영덕 訥谷에 사는 부하 金相烈의 집을 찾아갔다. 일제에 매수된 김상렬 형제는 술 대접을 받고 깊은 잠에 빠진 그를 도끼로 찍어 살해하였다.

朴殷植은 신돌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돌석은 경상도 영덕 사람인데 사납고 날쌔어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匹馬單槍으로 적을 무수히 죽이니, 일병들이 온갖 계책을 써서 생포하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현상금을 붙였더니 그 부하의 속임수에 빠져 죽었다(朴殷植,≪韓國獨立運動之血史≫,<各地義兵의 略歷>).

1908년 6월에는 이강년이 체포되고, 11월에는 신돌석이 암살당한 후 강원도와 충청북도를 연결하는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의병활동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나 그 후에도 주로 이강년 계열의 잔존 부대들에 의한 소규모 활동이 지속되었다.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허위 부대와 호응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한 김수민은 한국군이 해산되자 경기도 북부 長湍에서 기병했다.

그 후 김수민은 李鎭龍 부대가 활동하고 있는 황해도 지역에까지 진출하여 경기도 장단으로부터 황해도 瑞興 일대에 이르기까지 임진강을 넘나들면서 신출귀몰의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김수민 부대가 능숙하게 게릴라전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농민군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褓負商을 조직하여 적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박은식은 김수민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수민은 경기도 장단 사람이다. 그는 힘이 세고 사격을 잘하여 백발백중이 었으며 스스로 탄약을 제조하여 사용하였다. 13도 總都督이 되어 의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장단의 德蔭洞에 웅거하여 군량을 저축하고 보부상들을 모집하여 정찰대로 삼아 원근에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적과 교전해서 누차 승리를 거두었으나 적이 대부대를 이끌고 와서 공격하니 그의 군사는 무너지고 자신은 도망하여 버렸다. 이리하여 재거를 기도하려고 비밀리에 입경하여 인력거꾼 노릇을 하며 적정을 탐지하다가, 마침내 일본 밀정에게 체포되어 1908년 12월 17일에 죽임을 당하였다(朴殷植,≪韓國獨立運動之血史≫,<各地義兵의 略歷>).

경기도에서는 1908년 3월에 이은찬이, 6월에는 허위가 체포된 후에 11월에는 김수민이 서울에서 체포당하여 12월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김수민이 체포된 후에 延基羽는 이은찬 부대의 잔존 병력을 이끌고 경기도 麻田·장단으로부터 황해도의 兎山 지방에 걸쳐서 姜基東 부대와 연계하여 의병투쟁을 계속했으며, 황해도에서도 平山 지방을 중심으로 이진용·韓貞萬 부대들이 각지에 출몰하면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함경도 지방은 산포수가 가장 많은 지방이다. 그들은 화전민으로서 농사도 하지만 수렵이 주된 생업이다. 총포와 화약은 그들의 생활수단이다.

그런데 군대 해산 이후 의병전쟁의 확대를 막기 위하여 일제의 괴뢰가 된 한국 정부는 1907년 9월 6일에<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발표하여 민간에 있는 총기와 화약류를 수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산포수로부터 생활수단을 박탈하는 악법이었다.

당시 홍범도는 함경남도 북청군 安山社에서 산포수들의 상호부조 조직인 捕捐隊의 책임자로 있었다. 바로 산포수들에게는 일제를 반대하는 문제와 생활을 지키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었다. 홍범도는 車道善과 더불어 산포수를 중심으로 여기에 북청진위대의 해산병까지 포섭해서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홍범도·차도선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에 일진회원인 안산사 면장 朱道翼을 처단함으로써 의병전쟁의 봉화를 올렸다. 이어서 의병부대는 厚峙嶺에서 총포를 수거하여 북청으로 운반하는 호위부대를 습격하여 노획한 신식무기와 탄약으로 무장을 강화하였다. 험준한 산악과 민첩한 행동, 그리고 사격술에 능숙한 홍범도 의병부대는 각지에 신출귀몰하면서 1908년 12월에 노령 연해주로 넘어갈 때까지 위력을 발휘했다.

박은식은 홍범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홍범도는 평안도 陽德 사람인데, 이사하여 함경도 甲山에 우거하면서 사냥꾼 노릇을 하였다. 그는 체격이 훤칠하고 의지와 기개가 헌거로왔으며, 비록 글은 배우지 못하였으나 천성적인 의협심이 있어, 남을 도우는 일을 급무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1907년 겨울에 차도선·宋相鳳·許槿 등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북청의 후치령 전투에서 일본 장교 미야베(宮部)의 중대를 섬멸시켰으며 잇따라 黃水院·三水 등지에서도 대소의 교전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역부족으로 패배하고 江北(간도지방)으로 들어가서 사냥을 생업으로 삼았다. 1919년에 우리 겨레의 독립운동이 있게 되니, 범도는 그 동지와 함께 다시 의병의 기치를 들고 나와 鳳梧洞의 대첩이 있었다(朴殷植,≪韓國獨立運動之血史≫,<各地義兵의 略歷>).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08년에 종래 의병전쟁의 전반적인 추세를 좌우할 정도로 규모가 큰 의병장들이 의병전쟁의 대열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 결과 별로 지명도가 없는 평민 의병장들이 인솔하는 소규모의 의병부대들이 각지에 분산하여 일본군경을 교란시키는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다. 일제의 문헌에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년(1908)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1년 사이에 매월 출동한 폭도의 총수는 시종 약 3천 명인데, 적의 세력이 거의 대체로 고정된 景況을 보이며,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동은 때가 지남에 따라 점점 교묘함을 극하며 그 첩보, 근무 및 경계법 등은 점점 교묘히 도가 높아졌고, 행동은 점점 민첩해져서 때로는 우리 토벌대에 대하여 우롱하는 듯한 태도로 나오기도 한다. 그 세력은 때에 따라 성쇠가 있지만, 아직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며 평정이 언제 끝날 것인지 우려하기에 이르렀다.

1908∼1909년에 걸쳐서 의병장의 압도적인 대다수가 평민 의병장이 차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08∼1909년의 의병장과 副將의 계층별 구성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1263)朴成壽,<1907∼10년간의 의병전쟁에 대하여>(≪韓國史硏究≫1, 1968). 일본군, 헌병, 경찰이 조사한 의병장 및 부장 430명 중 직업과 신분이 분명한 사람이 255명이다.

255명 중에서 유생·양반이 64명(25%), 농업이 49명(19%), 士兵이 35명(14%), 무직 및 火賊이 30명(12%)으로 되어 있으며, 기타 포군(13명), 광부(12명), 主事·서기(9명), 장교(7명), 군수·면장(6명), 상인의 순으로 되어 있다.

또한 1908년에 귀순하거나 투항한 의병장 및 부장 28명 중 8명(28%)이 양반 출신이고 나머지 21명(72%)이 평민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의병의 경우에는 2,198명 중 양반이 겨우 57명(2.7%)인데 비하여 평민이 2,141명(97.3%)이다.

의병부대원의 압도적인 대다수가 평민이라 하더라도 의병장이 유생·양반출신인가 평민 출신인가에 따라 그 지도사상과 부대 내부의 階序질서에 현격한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의병장의 계층별 구성이 평민화될수록 비록 의병부대가 소규모화·분산화되더라도 그 활동은 민첩하게 될 것이며 군중과의 연계가 강화되어 상호간의 변신이 자유롭게 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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